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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도망치는 황후 (82/151)

82. 도망치는 황후2021.10.14.

16549689411167.jpg“어서 오세요, 황후 폐하. 마리안느 살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벨리아가 점원들의 안내에 따라 가게에 들어가려 하자, 호위기사들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점원들이 그들을 막았다.

16549689411167.jpg“신사분들의 입장은 곤란합니다.”

16549689411167.jpg“우리는 황후 폐하를 수행하는 호위기사다. 황후 폐하께서 어딜 가시든 따라가야 할 의무가 있어.”

16549689411167.jpg“하지만 이곳은 여자의 비밀을 다루는 가게예요. 아시죠? 여자들은 모두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법이잖아요.”

점원들의 말에 호위기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는 자도 있었다. 그 정도로 우회적으로 말해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월경용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제국에서 여성의 월경은 비밀스럽고 숨겨야 할 일로 취급됐다.

16549689411167.jpg“하, 하지만…….”

어째서 따라 들어가면 안 되는지는 이해했으나, 고용주인 로벨리아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기에 기사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로벨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16549689411196.jpg“굳이 이런 곳까지 따라 들어오진 않아도 돼.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

16549689411167.jpg“예, 알겠습니다.”

16549689411196.jpg“고생이 많은 경들을 위해 씹을 것을 조금 준비했으니 즐기고 있도록.”

16549689411167.jpg“따뜻한 차도 내어 드릴 테니 신사분들은 편히 쉬고 계세요.”

로벨리아가 준 과자에 점원들이 내어준 차까지, 순식간에 제법 그럴싸한 다과상이 차려졌다. 물론 명색이 황실의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정말로 편히 다과상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황실 호위기사의 규율 중에는 근무 중에는 외부인이 주는 식품을 먹지 않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다만 로벨리아는 평소에도 워낙 자기 사람들을 챙겼기에 사용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로벨리아가 주는 음식만은 예외인 것이 암묵적인 규칙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니 호위기사들은 로벨리아가 준 과자만을 한 조각 정도 먹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임이 밝혀지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0분 만에 과자를 먹은 기사들이 대부분 곯아떨어졌다. 로벨리아가 준 과자에 아주 강력한 수면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호위기사 중 과자를 먹지 않은 자, 혹은 체질적으로 수면제가 듣지 않은 몇 명은 가게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먼의 기사들에게 손쉽게 제압당했다.

16549689411167.jpg“황실의 기사들은 모두 단단히 결박해서 지하실에 가둬둬. 계획대로 말이지.”

16549689411167.jpg“아니, 황후 폐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호위기사가 경악한 얼굴로 로벨리아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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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9411196.jpg“나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경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어. 마음껏 원망해도, 다시없을 악녀라고 욕을 해도 괜찮아.”

16549689440305.jpg“황후 폐하! 황후 폐하!”

호위기사들을 지하실에 가둔 뒤, 로벨리아는 가게에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리넨으로 만들어진 수수한 옷을 입고, 눈에 띄는 붉은 머리 위에는 검은색 가발을 덮어썼다.

16549689411167.jpg“뒷문에 마차와 짐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공작님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16549689411196.jpg“정말 고마워요. 가자, 케일럽.”

16549689440318.jpg“네!”

로벨리아는 여우를 안은 케일럽과 함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곳에는 노먼이 준비해둔 마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밤이 될 때까지 로벨리아가 돌아오기는커녕 연락 한 번 없자,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을 풀어 그녀를 찾게 했다. 몇 시간에 걸친 탐문 수사 끝에, 수도 외곽에 세워진 작은 가게와 지하실에 갇힌 호위기사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가게는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별다른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호위기사들의 증언이 있었다.

16549689411167.jpg“황후 폐하께서 주신 과자를 먹고 잠에 들어 버렸습니다.”

16549689411167.jpg“황후 폐하께서는 당신이 주도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며,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증언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16549689440332.jpg‘로벨리아가 도망쳤구나.’

하지만 그녀 혼자 이런 일을 계획하고 행했을 리는 없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황실 내에 눈과 귀가 많은 그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16549689440332.jpg‘노먼 슈워츠코프!’

로벨리아와 노먼, 이전에는 조금의 접점도 없었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게다가 노먼은 자신이 로벨리아에게 호감이 있음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당당히 밝히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알렉산드로스는 노먼의 저택에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택을 관리하는 사용인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와 노먼이 협력하여 도망쳤음을 확신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있으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 했지만…….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것만큼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16549689440332.jpg‘차라리 나를 미워해 주었으면 좋겠다. 인간도 덜된 존재라고 모욕하고, 멸시하고, 마음껏 함부로 대한다 해도 난 괜찮았어.’

어두컴컴한 집무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16549689440332.jpg‘하지만, 그저 그 곁을 허락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그마저도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헤어져서, 그녀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을 그저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졌다. 그렇게나 믿고 자신했던 이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성적이지 않은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이제 로벨리아가 없으면 자신으로 존재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16549689440332.jpg‘내 것을 돌려받겠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돌려받고야 말겠다. 온 나라에 군사를 풀어 개미 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을 정도로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명을 내렸다. 바로 군사를 공작령을 향해 진군시키겠다는 명이었다. 당연히 반대의견도 거셌다.

16549689411167.jpg“하지만 폐하, 아직 공작이 황후 폐하와 함께 있다는 심증만 있을 뿐이고 물증이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슈워츠코프 공작가는 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 중 하나인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황실과 공작가의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될 것이고, 어쩌면 공작가와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16549689440332.jpg“상관없다. 슈워츠코프 공작 외에 그녀를 데려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만일 그녀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 누구도 알렉산드로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군사를 공작령으로 보낼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 한편, 로벨리아가 도망쳤다는 소문은 궁내에 빠르게 퍼졌다. 그 소문에 뛸 듯이 기뻐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이샤였다. 그녀에게 로벨리아는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적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암살이 실패해서 들킬까 봐 불안해하던 참이었는데, 로벨리아가 제 발로 사라져 주었으니 이렇게나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신관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16549689468172.jpg“황제의 황후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황후가 도망쳐버리면, 황제의 집착만이 더 강해질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황비 전하를 황후로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될 가능성이 요원해질 수 있습니다.”

16549689468179.jpg“그래도 어쩌면…….”

16549689468172.jpg“게다가 최악의 상황은 결국 황제가 황후를 되찾아오거나, 혹은 황후가 제 발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신관은 아이샤의 미련 가득한 말을 딱 자르며 설명했다.

16549689468172.jpg“그 경우에는 황제의 집착만 더더욱 강해진 채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니, 우리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16549689468179.jpg“그럼 우린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요?”

16549689468172.jpg“단언하건대, 황제가 황후를 찾기 전에 황후를 죽이는 편이 낫습니다. 황후가 그의 곁에 있을 때와 달리, 도주 중인 지금은 죽는다 해도 산적 등 외부인의 소행인 척하기 쉬우니까요.”

대신관의 말에 아이샤는 가슴 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16549689468179.jpg‘어차피 도망친 여자인데,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을까?’

하지만 대신관의 말에 토를 달아보았자 멍청하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89468179.jpg“알겠어요.”

두 사람은 황궁의 혼란을 틈타 빠져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 나라의 최북단인 공작령에 도착하려면 마차로 5일을 달린 뒤 포탈을 이용해야 했다. 토파즈 궁이 있는 옆 도시에 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긴 여행이었다. 더군다나 옆 도시로 갈 때와는 달리, 길도 포장되지 않아 무척이나 험난했다. 마차에 타고 있어도 길의 험함이 몸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래도 로벨리아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6549689411196.jpg‘전생에 했던 온갖 고생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딜 만 하지. 마차도 크고 좋은 마차고, 노먼이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주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불평 한마디 없이 길고 험한 여행길을 의연하게 견뎠다. 그런 로벨리아를 보며 노먼은 내심 깊은 감명을 받았다.

16549689495432.jpg‘공작 영애로서 귀하게 자란 데다가 황후로서 최고의 대접만 받았을 숙녀가 이런 험한 여행을 이렇게나 잘 견딜 줄이야.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대단하군.’

쉬지 않고 13시간을 이동한 뒤, 마부를 교대할 겸 잠깐의 휴식시간을 갖기로 했다. 도망치는 상황에서 황궁에서처럼 호화로운 욕조 목욕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벨리아는 마차에 싣고 온 식수와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그마저 마차에 실을 수 있는 물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물을 마음껏 쓸 수도 없었다.

16549689411196.jpg“저 다 씻었어요.”

로벨리아가 마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노먼이 마차에 들어오며 말했다.

16549689495432.jpg“여행길이 많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숙녀분께서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16549689411196.jpg“뭘요. 처음부터 이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는걸요.”

로벨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16549689411196.jpg“오히려 저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시는 공작님이야말로 정말 수고가 많으신걸요.”

16549689495432.jpg“저도 제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저하던 노먼이 입을 열었다.

16549689495432.jpg“비록 여행길은 고생스러울지라도, 공작가의 영지에 도착하면 그 뒤로는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황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에는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불편함은 없으시게끔……. 그리고 기대하시던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시게끔 끝까지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의 솔직한 호의에 로벨리아 역시 얼굴을 붉혔다.

16549689411196.jpg“정말 고마워요. 노먼을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어요.”

한편 마차에는 그들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케일럽도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견디느라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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