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제발 도망칠 때 저를 데려가 주세요2021.10.10.
이제 정말로 황궁을 도망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거겠지?’
황궁을 도망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간사한 아이샤와 폭군이 있는 황궁에서 평생 살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대신관에게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달라고 하기에는 그에게 믿음이 안 가. 게다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역시 해답은 도망뿐이지.’
혼자의 몸이 된다면, 그때는 아주 기쁘고 해방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막상 도망을 앞둔 내가 느낀 감정은 답답함이었다.
‘나를 그렇게나 잘 따르던 케일럽과 시녀들은 어떻게 하지? 또 나를 지지해주던 국민들이나, 토파즈 궁에서 만났던 어린 영애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분명 나만 생각하기로 했는데. 내 인생만을 우선하기로 했는데. 그런데도 공연히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방금 전 보았던 그의 절박하고 간절한 얼굴이 생각났다. 거짓과 가식으로 둘둘 싸여 있던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드러내 보였던 진심도. 그때의 그 웃는 얼굴도.
‘나 지금 알렉산드로스를 걱정하는 거야? 살다 보니 진짜 별일이 다 있네.’
내가 그에게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첫인상이 워낙 안 좋아서 그랬나?
‘틀림없이 그를 정말 싫어하고, 조금도 믿지 못했던 때도 있었어. 하지만…….’
하지만 일 년 넘게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탓에 나도 그에게 알게 모르게 정이 붙어버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정 하나만 보고 그의 곁에 있기에는 나는 아직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어쩌면 원작대로 그가 다시 아이샤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나는 예정대로, 황궁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예정일인 주말이 올 때까지 나는 주변을 정리했다. 먼저, 이제 완전히 나은 여우를 풀어주려고 했다. 수도의 숲에도 풀어줘 보고, 심지어 원래 있던 토파즈 궁 근처의 숲에도 풀어주려 해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왜 자꾸 돌아오는 거니? 어서 친구들이 있는 숲으로 가지 않고.”
“끼이잉, 끼이잉.”
“너도 갇혀 사는 것보다는 숲에서 사는 쪽이 훨씬 행복할 거야.”
“끄으응, 끄으응.”
내 걱정스러운 말에도 여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내가 저를 버리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구슬피 울면서 내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닌가?
“여우가 폐하를 정말로 사모하나 봐요.”
“이건 어쩔 수 없겠어요. 역시 폐하께서 키우시는 쪽이 이롭지 않을까요?”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양옆에서 바람을 넣었다.
‘어쩔 수 없네. 게다가 내가 없으면 밥도 먹지 않으려고 한다니……. 나중에 다른 곳에서 풀어준다고 해도, 이번 도망에는 여우를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어.’
결국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구나.”
“야호!”
시녀들이 팔짝 뛰어오르며 서로의 손을 맞부딪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하면 내 입만 아프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녀들. 나는 그녀들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인망이 없을 때부터 꾸준히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준 착한 아이들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이번 주까지가 마지막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이 아이들의 믿음을 배신하게 되겠지만, 최소한의 고마움의 표현이라도 하고 싶었던 나는 가진 보석을 조금 떼어다가 그녀들에게 나눠주었다.
“폐, 폐하! 어떻게 이렇게 귀한 것을…….”
갑작스러운 선물에 시녀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너희라고 평생 내 시중만 들면서 살 수는 없지 않겠니. 그만하면 지참금으로 충분할 거야. 내 나름의 너희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니,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도록 하렴.”
“폐하께서 내리신 선물을 어떻게 팔겠어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정말 감사해요. 저도 평생의 보물로 삼을게요!”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라고 했는데, 얘네들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언제나처럼 내 말을 자기 멋대로 알아듣는 시녀들 덕에 골머리가 아파왔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제 곧 이 아이들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진실되고 뜨거운 애정을 바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 여린 아이들이니, 내가 사라지면 분명 배신감을 느끼고 슬퍼하겠지만……. 하지만……. 결국 이 아이들도,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괴로운 얼굴을 숨기기 위해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케일럽이 나를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 오랜 세월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케일럽은 눈치가 꽤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그는 도청 마법으로 로벨리아와 노먼 사이의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우를 풀어주려 하고, 시녀들에게 보석을 나누어주고. 로벨리아의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황후 폐하.”
그는 로벨리아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로벨리아는 드레스 룸의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짙은 화장을 했으나 어쩐지 평소보다 수척하고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 케일럽.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줄 게 있어서야.”
케일럽을 보자 로벨리아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를 끌어당겼다. 호두나무로 섬세하게 짜인 상자는 자개와 진주,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는 상자를 케일럽에게 내밀며 미소 지었다.
“보석을 조금 넣었어. 늘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워서 주는 것이니, 부담은 갖지 말고.”
“…….”
“널 만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됐구나. 그간 정말 수고 많았어. 나는 네 노예 신분을 벗기고 제국인 신분을 만들어주려고 해. 넌 무척이나 총명하고 성실한 아이니 자유민이 되어도 번듯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케일럽은 조금도 기뻐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괴로워 보이는,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섞인 눈길로 상자를 보았다가 로벨리아를 보았다.
“왜 그래?”
“저를 독립시키려고 그러시는 거죠?”
“당장은 아니어도 너도 언젠가는 네 인생을 살아야지.”
로벨리아의 말에 케일럽은 더더욱 숨이 막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는 괴로운 듯 숨을 내뱉더니 말했다.
“폐하, 이런 말은 주제에 맞지 않는다는 거 알지만……. 폐하께서는 저와 시녀들에게 숨기고 계신 것이 있지 않나요?”
“뭐?”
“제 눈을 속일 생각 하지 마세요, 폐하. 이미 다 알고 있어요. 부디 저에게만 알려주세요. 저와 제 아버지의 이름에 걸고 폐하의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할게요. 저도 저의 가장 큰 비밀을 폐하께 말씀드렸는걸요.”
만일 평소 같았으면 그가 아무리 간절하다고 해도 이렇게 중대한 비밀을 말할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로벨리아는 얼마 전에 케일럽에게 목숨을 구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그것을 계기로 그의 가장 중대한 비밀을 듣기까지 했다. 케일럽이 자신의 마법 능력을 숨긴 것은 노예인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으니, 그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비밀을 로벨리아에게 알려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케일럽과 로벨리아의 사이에는 높디높은 지위의 간극이 있으니 그녀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그를 찍어누르고 호통을 쳐도 케일럽으로서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로벨리아가 아니었다.
‘그래, 케일럽은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증명했지. 날 위해 목숨까지 걸어준 그를 말 한마디 없이 배신하는 건 인간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결국 자신과 노먼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계획 자체는 케일럽 역시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번 주 주말이라는 것은 새로운 정보였다.
‘늦지 않게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게 알게 되었으면 어땠을까?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면 그는 결코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벨리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케일럽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부디 가시는 길에 저를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몸은 좀 굼뜨지만 뛰어난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분명 폐하의 도피행에 도움이 될 거예요.”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은 무척 위험하고 험난한 길이란다, 케일럽. 만일 황제 폐하께 발각당하면 나는 죽는 것까진 아니어도, 노예인 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야. 게다가 계획이 성공한다고 해도 낯선 외국의 땅으로 가게 될 텐데 그런 게 좋니? 네가 여기 있으면 자유민의 신분을 얻는 데다가 황실 호위기사라는 경력도 있으니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텐데 그걸 전부 마다하고 굳이 날 따라오겠다는 거니?”
“가시는 길이 외국이든, 지옥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그저 폐하의 곁에 있고 싶어요. 폐하께서 안 계시면 자유도, 일자리도 제겐 의미가 없어요!”
숨 가쁘게 쏟아낸 케일럽은 창백한 얼굴로 헐떡이며 로벨리아를 보았다. 그는 비틀비틀 로벨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로벨리아의 치맛자락을 쥐고 애끓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폐하, 부디 폐하를 따르게 해주세요. 낯선 외국 땅에서 폐하를 지키고 시중을 들면서 평생을 살고 싶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로벨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케일럽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데려갈게. 그러니 이제 일어나렴.”
“정말이요!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의 은덕은 제가 죽어 한 줌의 먼지가 되더라도 잊지 못할 거예요.”
로벨리아의 손을 잡고 일어난 케일럽은 어찌나 기뻐하는지,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소매로 훔칠 정도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로벨리아는 심란해졌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케일럽은 아직 어린앤데.’
*** 마침내 계획 당일. 로벨리아는 쇼핑을 가는 척하며 마차를 타고 수도 외곽으로 향했다. 케일럽과 여우는 함께였지만, 시킬 업무가 있다는 핑계로 시녀들은 대동하지 않았다. 짐은 극히 최소한만 챙겼다. 사실상 부피가 작은 보석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간 계획을 들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외곽 지역에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다. 물론 노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해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