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나도 좀 귀여워해 주지 그래2021.10.07.
‘잠깐 다녀온다고 해놓고서 갑자기 일주일이나 돌아가지 않았으니 다들 얼마나 놀랐을까? 마음 약한 아이들이 울지는 않았으려나 모르겠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한편 그녀의 그런 감상적인 얼굴을 알렉산드로스가 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황궁에 도착했을 때, 로벨리아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황후의 귀환을 수백여 명의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황후 폐하께 경례!”
시종장의 지휘에 따라 궁인들은 일사불란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랜드 홀을 가득 채운 궁인들이 한꺼번에 인사를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할 만했다. 공식적인 환영이 끝난 뒤에는 사적인 시간이 이어졌다.
“황후 폐하!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시중을 들어드릴 사람이 적어서 많이 피곤하셨죠?”
“다음에 그렇게 오래 어딘가에 머무실 때는 꼭 저희를 데려가 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찍어내는 이도 있었다.
“많이 걱정했니? 미안하게 됐구나.”
“아니에요, 어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역시 우리 폐하만큼 다정한 분이 또 없으시다니까.”
시녀들이 앞다투어 아우성치는 와중, 누군가가 로벨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렉산드로스였다.
“감동적인 상봉의 순간에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작은 환영 선물이 있거든.”
“마탑에서는 겨우 일주일 있었을 뿐이고, 그것도 매일 봤는데 환영 선물이라고요?”
로벨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조금도 기가 죽거나 하지 않고, 씩 웃을 뿐이었다. 그는 로벨리아를 가장 가까운 드레스룸으로 데려가더니, 화장대 앞에 앉혔다.
“뒤를 돌아보면 안 돼, 알겠지?”
그가 로벨리아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로벨리아는 거울을 통해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자신을 더 궁금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 거라고 그녀는 어림짐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품에서 자주색 벨벳으로 감싸인 상자를 꺼냈다. 그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어머나!”
시녀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목걸이였다. 60개의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체인 중앙에 입이 떡 벌어지게 큰 다이아몬드가 걸려 있는, 극도로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목걸이는 샹들리에의 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
알렉산드로스가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목걸이는 로벨리아의 취향에 맞았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름답네요.”
“룬티아 왕국에서 제일 가치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인 애거서 광산의 1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역작이라고 하더군. 보는 순간 그대의 목만큼 어울리는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목걸이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내가 이제껏 사들인 어떠한 보석보다도 진귀해 보여서, 나의 장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예상됐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그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만년필을 선물로 받을 때와도 달랐다. 다이아몬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목걸이의 무게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웠다.
“이 목걸이가 환영 선물인가요?”
“아니야. 이 정도로는 그대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지.”
시녀들은 이 어마어마한 선물에 거의 울 정도로 감탄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말에 하나같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로벨리아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거울을 통해 알렉산드로스를 보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거울에 비친 상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 목걸이는 덤 같은 거고, 진짜 선물은 따로 있지.”
그가 비서관에게 눈짓하자, 비서관이 흑단 상자를 가져왔다. 로벨리아는 당연히 그 안에 이 목걸이보다 대단한 보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 아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흑단 상자 안에서 나타난 건 종이 한 장이었다.
“아가사 광산의 소유증명서야. 이게 오늘의 진짜 선물이지.”
시녀들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로벨리아 역시 놀라서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이건 너무 과해요. 오늘이 제 생일도 아니잖아요.”
다이아몬드 생산으로 가장 유명한 지역인 룬티아 왕국, 그곳에서도 제일 가치 있다는 광산의 소유권은 목걸이나 만년필 하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너무나 여상한 듯 말했다.
“생일은 아니어도 그대를 위한 날이지. 하루하루가 모두 그대를 위한 날이야.”
“저에게 그런 궤변을…….”
“로벨리아, 그냥 받아줄 수는 없겠나? 나를 위해서라도, 부디.”
거울에 비치는 그의 시선이 한층 더 깊고 뜨거워졌다. 로벨리아는 다시 한 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의 눈을 직접 보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거울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이렇게 울렁이는데, 저 눈빛을 직접 보았다면 어땠을까? 저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직접 받았을 때, 과연 자신은 태연한 척 행동할 수 있었을까? 거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보는 그들의 시선에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였다.
“끼이잉! 끼이잉! 끼이잉!”
“어머! 세상에!”
드레스룸 입구에서 갑작스레 동물 소리와 함께 작은 발이 토도도독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동물을 쫓아 달리는 사람의 발소리도. 그 붉은 동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로벨리아의 치마폭에 달려들었다.
“끄으응! 끄으응! 끼이잉!”
“저,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잠시 뒤에 보여드리려고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어요.”
여우는 몹시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치마폭에서 뒹굴었고, 시녀 이레네가 따라와 창백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로벨리아는 몸을 숙여 여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등을 핥다가, 쓰다듬어달라는 듯 손바닥에 머리를 박다가, 또 애처롭게 끙끙대기 시작했다. 이레네는 너무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어찌할 줄을 몰라 했지만, 로벨리아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아까의 그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아니, 괜찮아. 여우가 일주일 동안 나를 그리워했니?”
로벨리아가 한숨 돌리기 위해 일부러 물었다. 이레네는 알렉산드로스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로벨리아가 대답을 재촉하자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그리워한 정도가 아니에요. 폐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식사를 거부해서 억지로 조금씩 떠먹여야 했어요.”
“저런!”
로벨리아는 두 손으로 여우의 털가죽을 매만졌다. 듣고 보니 그간 통통하게 오르던 살이 다시 빠져서 갈비뼈가 만져지는 것 같기도 했다.
“가엾어라. 내가 없으면 식사도 안 하는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니 오늘은 특식을 준비해주렴.”
“네.”
알렉산드로스의 눈빛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던 이레네는 여우를 끌어안고 허둥지둥 방에서 나가려 했다. 여우가 로벨리아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톱을 세우고 버텼지만, 시종 몇 명이 도와주자 여우도 어쩔 수 없이 붙잡혀 나와야 했다. 로벨리아는 일부러 알렉산드로스를 보지 않고, 이레네가 떠난 방향을 보았다. 그때였다.
“로벨리아.”
알렉산드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그 목소리는 늘 그러했듯 로벨리아의 머리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로벨리아는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세상에나!”
시녀들, 시종들, 비서관까지 모두가 경악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지고의 존재인 그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로스가 무릎을 꿇다니! 하나 그는 조금도 부끄럽거나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눈꼬리를 휘며 살살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로벨리아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대었다.
“너무 그쪽만 귀여워해 주니 서운한데.”
그는 로벨리아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볍게 문지르며 웃었다.
“이쪽도 좀 귀여워해 주지 그래.”
로벨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혹시 그대의 취향이 이런 쪽인가 싶어서.”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로벨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함하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해도 이건 역시 아니다. 자신만 얽혀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로벨리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그러는 걸 본 알렉산드로스도 일어났다.
“로벨리아, 이런 게 염치없는 부탁인 건 나도 알아.”
알렉산드로스는 드물게도 괴로운 듯한 얼굴을 했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도 컸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만 마음을 열어줄 수는 없겠나? 정말 한 번만이라도 좋아. 나는 그대가 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는 사실은 그 자리의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그가 하는 말의 한 마디, 한 마리가 로벨리아의 가슴 속에 비수처럼 박혔다. 차라리 모든 게 그녀를 속이기 위한 감언이설이었으면 기분이 나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지나쳐요. 오늘의 선물은 안 받은 걸로 하겠어요.”
그녀는 최대한 냉정하게 말한 뒤, 자기 손으로 직접 목걸이를 풀어내어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 나서 로벨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도망치듯 황후궁으로 향하며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역시 내가 너무 심했던 건가?’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를 속이고, 선물을 받아 챙길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진심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로벨리아는 오늘 아침에 노먼으로부터 받았던 전보의 내용을 떠올렸다. 「부탁하신 일이 완료되었음. 이번 주 주말 실행 가능.」
‘그래, 이제 곧 나는 황궁을 떠나 도망칠 거야. 드디어 알렉산드로스와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거라고.’
자신의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어느샌가 숨이 가빠서 그녀는 헉헉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귀한 선물도 받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웃으면서 대하라니, 어떻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