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언제 마탑주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됐나?2021.10.03.
하지만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제가 이곳에 함께 온 것이 그저 당신이 수사하는 모습을 구경만 하러 온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오산이에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와 나는 꽤나 닮은 구석이 있지. 한 번 정한 고집은 꺾기 어렵다는 것 말이야.”
알렉산드로스는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대가 그렇게 정했다면 나도 이제 말릴 수 없다는 것 정돈 알고 있어. 그대는 나에게서 참으로 많은 예외를 만들어내곤 하는군.”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웃었다.
“참으로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래, 약 1년 반 정도 새삼스러운 말이지.”
*** 그렇게 해서 나는 일주일 정도 마탑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수라고 하기에 마탑주의 시중을 들고 청소 같은 잡일을 하는 일까지 각오하고 있었으나, 의외로 그녀가 시킨 일은 정말 별거 없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걸리는 서류 작업을 조금 하고 나머지 시간 동안은 마탑주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연구를 구경하거나, 그마저도 지루해지면 책을 읽었다. 이건 솔직히 조수라기보다는 마탑 구경이나 휴식에 가깝지 않을까? 의아해진 내가 이 부분에 대해 물었더니 그녀는 소탈한 얼굴로 웃었다.
“네? 아무리 그래도 황후 폐하와 같은 귀하신 분께 청소라니 말도 안 되죠! 아무렴 제가 이런 고운 손에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이라도 묻히겠어요?”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지나치게 서민적으로 생각한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일주일이나 마탑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해야 할 업무가 잔뜩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황궁에 머무르면서도 매일 마탑으로 찾아왔다.
“굳이 매일 오실 필요 있어요? 호위기사들과 시녀들도 있고, 또 마탑주도 말했다시피 마탑의 보안은 삼엄한데요.”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왕복 6시간은 걸리는 길을 매일 찾아온다고? 원체 속이 검은 남자라서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했지만 솔직히 알 것도 같았다. 이제까지 그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아왔으니까. 한때 입에 발린 말, 감언이설만을 늘어놓던 알렉산드로스는 요즘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업무를 처리해가면서 이 먼 거리를 매일 왕복하는 이유도…… 아마, 아니 분명 진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가슴 속이 울렁였다. 나는 남몰래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가 진심이든 아니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어차피 나는 곧 그를 떠날 것이고.’
편해서 그런지 시간은 순식간에 흐르고 어느덧 닷새째가 되었다.
“로벨리아, 마력 흔적의 주인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어요. 그가 현재 적을 두고 있다는 암살자 길드에 대해서도요.”
마탑주 안젤라가 그리 말하며 서류뭉치를 내밀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요? 아직 닷새밖에 안 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하지만, 당신이 계약날짜를 채우지 않고 도망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요.”
안젤라가 빙긋 웃었다.
“책상물림이라고만 생각하셨죠? 이래 봬도 마탑주는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자리랍니다.”
나는 서류를 뒤적여 살폈다.
“제레미 홀튼, 31세, 염동 마법사, 가족은 없고 여동생이 한 명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거취는 알 수 없음. 여러 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왔는데 그 모든 게 마법사 한 사람의 짓이라고요?”
“그는 부마탑주였고 저의 후임으로 가장 가능성 있게 지목되던 자였어요.”
“그런 대단한 사람이 갑자기 마탑에서 족적을 감추고 불법인 암살자 길드에 들어가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아마 뭔가 사정이 있었겠죠. 아니면 길드에서 마탑보다 훨씬 대단한 대가를 약속했거나.”
서류를 읽어보며 고민하던 나는 문득 물었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하셨죠. 이 사람을 볼 때는 어떤 느낌을 받으셨어요? 갑자기 범죄자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셨나요?”
내 질문에 안젤라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사람이 갑자기 실종된 터라 범죄자 길드에 들어갔다는 말에는 저도 많이 놀랐어요. 혹시 납치되어 협박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되었고 저를 공격했죠. 실제로 협박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안젤라의 사람 보는 눈을 신뢰할 수는 없겠네요.”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그럼 이런 건 어때요? 당신의 부군은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팔불출인 것 같아요. 반면 당신은 어떤 이유로 부군을 밀어내고 있고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정확한 말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나와 알렉산드로스가 대화 나누는 모습을 십 분만 봐도 알 법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황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요.”
“더 들어보세요. 당신의 부군은 굉장히 재수 없는 사람이에요. 오만하고, 자신이 잘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그걸 이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죠. 그런 와중에…… 아,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당사자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외교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아시죠?”
“재밌으니까 이런 걸 고자질하진 않을게요. 그래서요?”
“자신에 대한 굳건한 확신이 있었는데, 그 확신이 처음으로 부서졌어요. 그리고 그 계기는 바로 당신인 것 같군요.”
다른 사람의 입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험담을 듣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제가 보기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아니긴요. 누가 봐도 뻔히 보일걸요. 특히나 저는 마탑주로서 그 사람의 재수 없는 모습을 십여 년간 계속 봤거든요. 당신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엄청 고소했어요.”
마탑주가 키득거렸다. 그녀는 누가 봐도 어른이었으나 웃는 얼굴만큼은 꼭 장난기 많은 어린애 같아 보였다.
“그가 거래를 제안해올 때부터 궁금했어요. 그 계산적이고 빈틈없고 밥맛없는 남자가 이렇게 손실이 큰 거래를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저는 남자한테는 관심 없지만 제가 로벨리아였으면 기왕 이렇게 된 거 꽉 잡을 것 같기도 해요. 일단 부와 권력이 있으니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거 아니에요.”
“저는 별로…….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아서요.”
“아, 그러시겠죠. 혹여나 이혼 같은 걸 염두에 두고 계신다면 마탑으로 도피하시는 건 사양하겠어요. 저는 당신이 정말 좋지만 그런 감정보다 마탑을 지킬 의무가 우선이라서요. 제국과 전쟁을 치루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요.”
안젤라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해외 도피 계획에 대해 뭘 알고 한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건 아마 아닐 것이다. 해외 도피 계획은 나와 노먼만의 비밀이었고, 안젤라는 원래 실없는 농담을 잘 했으니까.
‘그리고 전쟁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알렉산드로스가 그 정도로 정신 나간 짓을 할까. 아직 즉위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아 황권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은 이 시기에 전쟁은 엄청난 악수일 텐데.’
뭐, 안젤라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에 일일이 고민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리라.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무튼 자료 정말 고마워요. 수사에 유용하게 쓸게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날 밤, 내가 묵고 있는 손님방으로 돌아온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자료는 알렉산드로스와 공유하는 편이 좋을까, 공유하지 않는 편이 좋을까?’
만일 내가 황궁에서 있을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주저 없이 자료를 알렉산드로스와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노먼으로부터 도피 계획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나는 상당히 고민했다.
‘수사가 완료되기 전에 도망쳐서 공작령에 숨는다면, 그때는 알렉산드로스의 도움 없이 나와 노먼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해. 하지만 이 자료를 알렉산드로스에게 주었을 경우, 수사 과정 중 발목이 잡힐 수 있어.’
오랜 시간 고민한 나는 결국 정보를 알렉산드로스와 공유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 기껏 도망쳤는데 이런 걸로 꼬리를 밟힐 수는 없지. 나와 노먼이 힘을 합쳐 수사를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어. 노먼 역시 암살범을 찾는 데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 계약대로 일주일을 채운 뒤 로벨리아는 안젤라와 작별인사를 하고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물론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맞이하러 마탑으로 찾아왔다.
“일이 어렵지는 않았나? 그 마탑주가 이상한 걸 시키지는 않았고?”
“아니라고 한 번만 더 대답하면 백 번째예요.”
언뜻 들으면 까칠한 듯한 대답이었으나 로벨리아 역시 사람인지라 알렉산드로스가 매일 찾아와준 정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음이 흡족했다. 하나 그의 흡족함은 로벨리아의 다음 말에 깨어졌다.
“이상한 걸 시키지는 않았냐니, 안젤라는 국가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너무 무례한 발언 아닌가요? 그녀가 좀 괴짜이긴 해도 그렇게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안젤라? 어느새 마탑주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마탑주 역시 저를 로벨리아라고 불러요.”
어떤 감정이 알렉산드로스의 가슴 속을 쿡쿡 찔렀다.
‘슈워츠코프 공작도 이름으로 부르더니, 이제는 마탑주까지 격의 없이 대하게 되었군.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한 10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것이 염치없는 감정임을 알면서도 알렉산드로스는 노먼이나 안젤라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다니! 이제까지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소인배 같은 행동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난생처음으로 소인배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빌미는 많았다.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외교 시에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라든가, ‘그대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듯한 마탑주를 조심해야 한다’라든가, 등등. 하지만 솔직히 그 모든 말이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로벨리아와 격의 없이 가까워진 마탑주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소인배적인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잔소리를 하는 대신 그는 화제를 돌렸다.
“그대가 없었던 지난 일주일간 많은 이들이 그대를 그리워했어. 예정 없이 갑작스레 일주일이나 부재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랬나요.”
그 말을 들으니 로벨리아는 갑작스레 황궁에 두고 온 자신의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당일로 끝날 방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시녀도 두 명밖에 데리고 오지 않았으며, 케일럽 역시 데려오지 않았다. 그러니 일주일이나 그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