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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나는 정부를 들일 예정이 없어 (78/151)

78. 나는 정부를 들일 예정이 없어2021.09.30.

나와 알렉산드로스가 함께 마탑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마탑은 제국 밖, 다양한 국가들이 맞닿는 접경지역에 있기에 가는 데에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옆 도시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틀이 걸렸으니까. 하지만 출발 날짜는 마탑주와의 약속 날짜, 바로 당일이었다.

16549688193619.jpg‘대체 어떻게 시간을 맞추려는 것일까?’

알렉산드로스이니 틀림없이 도착 가능한 일정으로 약속했을 거라 생각해 걱정은 되지 않았으나, 역시 궁금하기는 했다. 해답은 바로 포탈이었다. 수도 외곽에 해외 몇몇 주요 지역으로 연결된 포탈이 있었다. 그중에는 마탑에 직통으로 도착하는 것도 있기에, 우리는 여행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16549688193619.jpg‘이게 바로 포탈이구나. 책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이용하는 건 처음이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 하는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는 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미 이곳에 온 뒤로 마법이라든가 성녀라든가 이상한 것들을 잔뜩 봤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놀라워서, 새삼스럽게 내가 소설 속 세계에 들어왔구나 하는 실감을 느끼게 했다. 무국적지대에 위치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자유분방하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알렉산드로스와 나의 직위 때문인지 우리는 무척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마탑주를 만났다.

16549688193631.jpg“어서 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반 톤 정도 높은 경쾌한 목소리. 희고 가는 손가락이 허공을 휘젓자 찻주전자가 저절로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16549688193631.jpg“여독을 풀어주는 약초차로 목을 축이세요. 저희 마탑의 27층 텃밭에서 직접 키운 약초이고, 유기농이랍니다.”

마탑주는 새하얀 피부와 깨물면 단물이 나올 것 같은 풍선껌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였다. 무척 젊어서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귀가 동화책 속의 요정처럼 뾰족했다. 마탑은 탑 하나일 뿐이지만, 그 자체로 국가 하나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마탑의 지도자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는 적당히 예의 있기는 했지만 대륙의 주인이라는 황제를 앞에 두고도 비굴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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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8193645.jpg“이번 안건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는 마탑 역시 알고 있겠지. 거두절미하고 우리가 한 거래에 걸맞은 적절한 협력을 보여준다면 좋겠군.”

16549688193631.jpg“물론이죠. 저희 마탑의 구성원이 황후 폐하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는 사실에 저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답니다. 그럼, 마력의 흔적을 읽어낼 만한 물건은 가져오셨는지요?”

알렉산드로스는 사건 현장에서 찾은 화살을 마탑주에게 내밀었다.

16549688193631.jpg“잠시 실례.”

마탑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공구상자 같은 것이 날아왔는데, 현미경이나 돋보기를 닮은 크고 작은 조사도구들이 차례차례 상자 밖으로 나왔다. 마탑주는 느긋한 태도로 수십여 개의 조사도구들로 하나하나 화살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보고 싶은 만큼 실컷 들여다본 뒤, 한 번의 손짓으로 조사도구들을 전부 물렸다.

16549688193631.jpg“확실히 마탑에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인 건 맞네요.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16549688193645.jpg“그 마법사는 지금도 마탑에 있나?”

16549688193631.jpg“아니요, 유감스럽지만 6년 전 자취를 감추어 어디 있는지 그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암살자 길드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있지요.”

그럴 줄 알았는지 알렉산드로스는 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49688193645.jpg“이번엔 암살자 길드를 조사해보아야 하는 건가. 난항이로군.”

16549688193631.jpg“음, 두 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이 수사에 협조하기로 한 것은 황제 폐하와의 거래 때문이지요.”

갑자기 마탑주가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16549688193631.jpg“하지만 그건 이런 미모의 소유자이실 줄 상상도 못했을 때의 이야기죠. 수사에 협조할 의욕이 나는걸요.”

알렉산드로스는 불쾌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자신의 미간을 문지르곤 말했다.

16549688193645.jpg“미안하지만 마탑주, 나는 정부를 들일 예정이 없다.”

16549688193631.jpg“네?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저는 폐하가 아니라 이쪽 분을 말한 건데요?”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응? 나는 멍한 얼굴로 마탑주를 보았다가 알렉산드로스를 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16549688193645.jpg“마탑주, 지금 뭐라고 했나?”

16549688193631.jpg“황후 폐하께서 너무 아름다우시다고요. 세상에! 이런 미모의 소유자가 죽어 땅 밑에 묻히는 것을 내버려 둘 순 없죠. 그건 전 세계의 손실이자 문명의 퇴보예요.”

나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16549688193619.jpg‘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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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작과 이곳에 온 뒤 읽은 책들에 따르면, 마탑은 온 세계의 법, 규범, 허례허식에서 벗어나 오로지 마법에 대한 탐구만을 위해 모인 무정부기관이었다. 어떠한 성문화된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는 곳이었기에 그 특색은 역대 마탑주들의 가치관에 따라 크게 달라지곤 했다. 그리고 현 마탑주인 안젤라 레인디어는…… 말하자면 예술가였다. 마법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마법을 연구하는 자. 그렇기에 그녀가 마탑의 지도자인 현재, 마탑의 주 연구는 마법의 예술성과 탐미성에 주력하고 있다.

16549688193619.jpg‘……그렇다고 책에서 읽기는 했지만, 그 미감이 이런 식으로 발현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요.’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흘끗거렸다. 어느샌가 마탑주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내 왼쪽엔 알렉산드로스, 오른쪽엔 마탑주로 둘러싸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6549688193631.jpg“폐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혹시 보드라운 뺨을 만져 봐도 될까요? 그 오뚝한 코는요? 노을처럼 붉은 머리카락은요?”

16549688193619.jpg‘이미 만지고 있으면서 물어보긴 왜 물어본담.’

나는 내심 생각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손을 들어 내 뺨을 콕콕 찌르던 마탑주의 손길을 멈추었다.

16549688193645.jpg“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암살자 길드에 들어갔다는 마탑 출신 마법사에 대해 대신 조사해주겠다는 것인가?”

16549688193631.jpg“네에.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마탑주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16549688193631.jpg“제가 지금 논문 준비로 바쁜데, 황후 폐하께서 제 연구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16549688193645.jpg“무슨 연구인가? 그리고 왜 하필 황후이지? 마법에 특화된 연구자는 마탑에 더 많을 텐데.”

16549688193631.jpg“하필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연구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본 일원론적 색채학에서의 마법의 효능’이라서요.”

16549688193619.jpg“뭐라고요?”

16549688193631.jpg“쉽게 말해서 마법의 색상에 대한 연구인데…… 음……. 어쨌든 이 연구를 완성하려는데 몇 달째 막혀 있었거든요. 그런데 황후 폐하를 보니 갑자기 영감이 퐁퐁 솟아오르는 거 있죠? 그러니 며칠만 더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제가 논문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알렉산드로스의 미간에 깊은 금이 갔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49688193645.jpg“그대가 수사에 더 협조해준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 마탑주가 얼마나 대단한 재원인지는 나도 알고 있으니. 하나 ‘황후를 조수로 쓰겠다’는 계약조건은 황실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야. 차라리 금전을 바란다면 백지수표를 써주고, 인력을 바란다면 황실의 인재를 얼마든지 제공하겠네. 하지만 황후는 안 돼.”

16549688193631.jpg“인재는 마탑에도 많고, 금전은 이전에 충분히 받아서 당장은 필요하지 않아요. 지금 제가 필요한 건 오로지 영감뿐인데 그건 황후 폐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요.”

16549688193645.jpg“그걸 어떻게 단언하나? 황후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내 황실의 이름을 걸고 최대한 지원해보도록 하지.”

16549688193631.jpg“저라고 안 해본 방법이 있을 것 같으세요? 이 연구 때문에 별의별 수를 다 써봤지만 어떠한 것도 통하지 않았다고요. 이런 저한테 빛과 같은 탈출구를 보여준 건 황후 폐하뿐이세요.”

내버려 뒀다간 두 사람의 대화가 어디까지고 평행선을 달릴 것 같았기에 나는 그들의 말을 끊었다.

16549688193619.jpg“잠깐만요, 제 의사는요? 이런 문제라면 제 의사야말로 제일 중요한 거 아닐까요? 마탑주가 바라는 계약조건도 저고, 애초에 암살당할 뻔했던 것도 저니까요.”

16549688193645.jpg“아아,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대 역시 이런 수상하고 속이 검은 여자의 연구 조수가 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닌가. 대륙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에게 조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대체 누가 누구더러 ‘수상하고’ ‘속이 검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마탑주 역시 전혀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16549688193619.jpg“고작 일주일인데 뭘 그러세요? 일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요. 일주일 동안 제 조수 노릇한다고 사람이 닳아 없어지나요? 이래서 권위주의에 찌든 제국 귀족들이란!”

이러다 다시 평행선 싸움이 시작될 것 같아서 나는 다시 헛기침으로 그들의 말을 끊었다.

16549688193619.jpg“그만. 저는 결정했어요. 저는 마탑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16549688193631.jpg“그거 정말이신가요? 꺄악! 어떡해, 너무 좋아!”

16549688193645.jpg“로벨리아! 고작 암살자 길드를 조사하는 일에 그대가 그런 수치를 당할 필요는 없어. 암살자 길드는 황실의 힘으로도 충분히 조사할 수 있다. 맹세하지.”

16549688193619.jpg“하지만 마탑주의 힘과 연줄을 빌리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겠죠. 그렇기에 아까 폐하께서도 솔깃해하셨던 거 아닌가요?”

알렉산드로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16549688193619.jpg“‘시간이 더 걸리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말하려고 하셨죠? 증거는 세월에 씻겨지고 용의자는 도망가요. 당연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알렉산드로스는 내 손에 입이 막힌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힘으로 내 손을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16549688193619.jpg“잘 들어요. 저는 황제 폐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범인을 잡고 싶어요. 그래야 제 신상의 위협이 사라지고, 저는 두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걸 위해서 며칠 정도 수상쩍고 괴짜인 데다 취향 이상한 마탑주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 정돈 각오하고 있어요.”

16549688193631.jpg“수상쩍고 괴짜인 데다 취향이 이상하다니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마탑주가 헛기침을 했다.

16549688193631.jpg“황후 폐하의 안전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마탑은 황궁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안전한 곳이니까요. 그리고 원하신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머무실 수 있게 해드리죠.”

16549688193619.jpg“그럴 필요는 없어요.”

16549688193645.jpg“아니, 필요 있어. 되도록 황후의 바로 옆방을 쓰고 싶군.”

내가 손에서 힘을 뺀 순간, 알렉산드로스가 내 손목을 붙잡고 대답했다. 마탑주의 얼굴에 복숭앗빛 화색이 돌았다.

16549688193631.jpg“좋아요, 그럼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거죠?”

알렉산드로스는 피곤한 듯 미간을 구겼다.

16549688193645.jpg“로벨리아의 뜻이 정 그렇다면. 다만 난 그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마법적 효력이 있는 계약서로 준비해주었으면 좋겠군. 추가해야 할 항목도 몇 가지 있고.”

16549688193631.jpg“암, 물론이죠. 제가 정말 편의를 잘 봐 드릴 테니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마탑주는 신이 나서 달려 나갔고, 알렉산드로스는 나를 보았다.

16549688193645.jpg“로벨리아, 정말로 괜찮겠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까지는 되돌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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