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이 여우 키우실 거지요? (77/151)

77. 이 여우 키우실 거지요?2021.09.26.

내가 요양을 끝냈다는 발표를 한 바로 다음 날부터 선물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전국 각지의 귀족들이었다. 즉 나와 친분이 있긴커녕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16549688054255.jpg“폐하, 이 크리스페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를 보세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16549688054255.jpg“이 가방도 봐주세요! 정말 독창적인 색상과 디자인이네요.”

16549688054255.jpg“이 사파이어 목걸이는 어떻고요! 어떤 각도에서도 찬란하게 반짝이네요.”

시녀들은 선물을 뜯어보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생각이 복잡했다.

16549688054268.jpg‘내 영향력과 명망이 높아지긴 한 모양이구나. 퇴원 선물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새삼스럽게도 신물이 났다. 이전의 로벨리아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는데, 그저 신문에 얼굴을 몇 번 비췄다는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잘 보이려 애쓰다니. 사람들이 참 기회주의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6549688054255.jpg“어?”

선물을 뜯어보던 시녀 중 한 명이 놀란 얼굴을 했다.

16549688054255.jpg“이 선물은 만년필과 잉크 세트네요.”

시녀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여태까지 뜯어본 선물은 전부 옷 아니면 장신구였으니까. 같은 이유로 나 역시 관심이 동했다. 나는 펜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검게 옻칠된 바탕에 천연 자개와 은으로 만든 뱀이 펜대를 휘감은 모양으로 양각되어 있고, 뱀의 두 눈은 붉은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다. 굉장히 값비싼 물건임이 분명했다. 보석과 각종 유명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화려한 장신구를 계속해서 보던 와중이라 그런지 시녀들은 그 만년필에서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녀들은 곧 만년필에서 시선을 거두고 새로운 보석과 장신구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만년필의 오묘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홀린 듯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16549688054268.jpg‘이걸 내게 보낸 사람이 누구지?’

문득 궁금해진 나는 선물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선물을 내게 보낸 사람은 완전히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그때였다.

16549688054255.jpg“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16549688054268.jpg“들라고 하렴.”

평소 같았으면 귀찮아서 돌아가라고 했겠지만, 나는 오늘만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마침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내가 흔쾌히 들라고 하자, 시녀들이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 건너편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16549688054291.jpg“퇴원을 축하하지, 로벨리아. 그건 그렇고 그대가 나를 바로 들여보내 주다니, 아마 사과가 땅에서 하늘로 떨어지려는 모양이군.”

16549688054268.jpg“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한 게 있어서요.”

16549688054291.jpg“그게 뭐지?”

16549688054268.jpg“제게 이런 선물을 주신 이유가 뭔가요?”

나는 그에게 선물상자를 보여주었다. 선물상자의 안에는 만년필과 잉크병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이 펜의 발송인은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던 것이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제일 값비싸고 화려한 옷을 선물로 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비교적 눈에 덜 띄는 만년필과 잉크라니? 어쩐지 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16549688054255.jpg“세상에! 저것이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물건이었다고요?”

시녀들이 놀라서 서로에게 속닥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놀랄 만도 했다. 그녀들은 만년필과 잉크에 관심도 두지 않았으니, 왜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선물을 주었는지 궁금했으리라.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조금도 새삼스럽지 않은 얼굴을 했다. 그는 내가 내민 상자를 보고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16549688054291.jpg“그대는 지략가가 아닌가, 로벨리아. 지략가에게 문필용 물품을 주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나?”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내가 화려하고 값비싼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 퇴원 선물로 호화로운 보석과 장신구, 옷이 잔뜩 들어온 것은 그 때문이리라. 물론 내가 예쁘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쁜 것도 좋아하지만 공부와 책 역시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그런 면모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저 내가 예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의 나머지 부분까지 판단해버리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달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황궁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고 있는데 젊은 관리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16549688054255.jpg“황후 폐하께서는 이런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16549688054268.jpg“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왔지 무슨 일로 왔겠나.”

16549688054255.jpg“그렇군요. 황후 폐하께서 의복과 화장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말은 익히 들어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아, 그런데 설마 읽으러 오셨다는 책이 화장법에 대한 책은 아니겠지요?”

  당시는 아직 나의 성깔이 충분히 소문나지 않은 때였기에 내 앞에서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하는 인간이 가끔 있었다. 나는 내 성질을 돋운 관리의 머리에 들고 있던 아주 두꺼운 제국 역사책을 던졌다. 역사책의 모서리와 관리의 머리가 부딪치면서 의외로 맑고 청명한 소리가 났다. 통~. 마치 잘 익은 수박을 두들길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어쨌든 대놓고 헛소리를 하는 놈들을 몇 놈 조져주고 나니 이제 내 눈앞에서 성질을 돋우는 말을 하는 놈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뒤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지. 보나 마나 보석이나 드레스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내 지능이나 업무능력까지 평가절하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이런 와중에 내가 드레스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책과 공부도 좋아한다는 걸 잊지 않고 꾸준히 챙겨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알렉산드로스였고.

16549688054268.jpg‘……이게 뭐라고 두근거린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였단 말인가? 나는 딴청을 피우는 척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혔다.

16549688054268.jpg“그럼 뭐하나요. 어차피 이혼하면 이건 제 것이 아니게 될 텐데.”

16549688054291.jpg“그게 무슨 말인가, 로벨리아. 그래서 일부러 주문제작을 한 거야. 은과 루비로 만든 것이니 결국 이것도 보석이지.”

어이가 없었다. 황제가 되어서 이런 식으로 법의 빈틈을 멋대로 가지고 놀아도 된단 말인가? 나는 피식 웃곤 시녀들에게 말했다.

16549688054268.jpg“챙겨두렴.”

16549688054255.jpg“네, 폐하!”

시녀들이 기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던 알렉산드로스가 문득 말했다.

16549688054291.jpg“내가 이곳에 온 것은, 마탑주로부터 진술 날짜를 받았기 때문이야. 지금으로부터 4일 후인 7월 24일에 마탑에 다녀올 예정인데, 그대도 함께 갈 텐가?”

16549688054268.jpg“물론이죠.”

나는 수사를 그에게만 맡길 생각이 없었다. 나 역시 나를 죽이려고 한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앞으로의 인생계획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16549688054291.jpg“그럼 함께 다녀오는 거로 하지.”

알렉산드로스는 흡족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저녁.

16549688054255.jpg“저…… 이 만년필이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알아보았는데요.”

시녀 이레네가 헐레벌떡 뛰어와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16549688054255.jpg“알고 보니 피사나 반도의 장인이 만든 귀한 작품이더라고요. 그 장인의 작품들 중에서도 특별히 귀중한 역작이라고 해요. 여기 그 사람이 만든 다른 작품들의 가격표를 가져왔어요.”

16549688054268.jpg“그랬니? 어디 줘보렴.”

알렉산드로스가 준 거니까 보석이나 옷에 비해 눈에 덜 띈다고는 해도 비싼 물건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해서 나는 이레네가 준 카탈로그를 받아들어 살펴보았다.

16549688054268.jpg“…….”

나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카탈로그를 시녀들에게 넘겼다. 나 다음으로 카탈로그를 살펴본 시녀들의 얼굴 역시 창백해졌다.

16549688054255.jpg“세상에…… 뒤에 0 몇 개가 실수로 더 붙은 거 아니죠?”

16549688054255.jpg“저는 만년필이 저렇게 비쌀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16549688054268.jpg“그 펜을 잘 포장해서 장식장 깊은 곳에 넣어두렴. 도둑맞지 않게 자물쇠도 걸어놓고.”

16549688054255.jpg“네? 안 쓰시는 건가요?”

16549688054255.jpg“그걸 쓰는 모습을 황제 폐하께서 보시면 정말 좋아하실 텐데요.”

시녀들이 아쉬운 듯 말했으나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저걸 쓰다가 망가뜨리거나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6549688054268.jpg‘역시 나는 아직 내 안의 서민을 버리지 못했어. 하지만 아무리 부자라도 저런 걸 직접 쓰려면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안 될 거야.’

시녀들이 자물쇠를 채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6549688098941.jpg

  *** 한편, 나와 알렉산드로스가 마탑으로 떠나기 전. 좋은 소식이 있었다. 그건 바로…….

16549688054255.jpg“어머, 귀여워라!”

시녀들은 별이라도 박아 넣은 듯 반짝거리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됐다. ‘그건’……. 정말로 귀여웠으니까. 궁의의 방 한복판에서 붉은색 털 덩어리가 발발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끊임없이 헥헥헥 소리를 낸다는 건 개와 비슷했지만, 자기 몸통만 한 그 커다랗고 폭신폭신한 꼬리는 다른 어떠한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그렇다. 토파즈 궁에서 구조해온 여우가 드디어 다 나은 것이었다.

16549688054255.jpg“정말 예쁘네요. 꼬리는 또 얼마나 살랑살랑 움직이는지!”

16549688054255.jpg“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처음 봐요!”

그녀들의 탄성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여우의 흰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우는 기쁜 듯이 낑낑 소리를 냈다. 생명의 은인을 알아보는지 여우는 나를 무척 잘 따랐다. 이 귀여운 동물의 존재는 아직 긴장감이 다 가시지 않은 지금의 내게 작은 위안이 됐다.

16549688115594.jpg

16549688054291.jpg“이상한 일이군. 이 짐승을 구해준 건 난데 왜 그대만 따르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알렉산드로스가 여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16549688115605.jpg“카아악!”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여우는 그의 손을 질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심지어 입을 쩍 벌리며 위협적인 행동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알렉산드로스가 손을 거두자 여우는 홀라당 달려왔다. 바로 내 발밑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껏 귀여운 척을 하며 애교를 피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모습을 보더니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16549688054291.jpg“그대를 따르는 녀석의 의도가 의심되는데. 그 녀석이 그대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어.”

16549688054268.jpg“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흑심이라니요. 이렇게 귀여운 애한테.”

나는 피식 웃으며 여우의 두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조금 들어 올렸다.

16549688054268.jpg“그치, 여우야? 아유, 예뻐라.”

16549688054255.jpg“폐하, 이 여우 키우실 거지요?”

16549688054255.jpg“이름은 뭐로 지을까요?”

시녀들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16549688054268.jpg“무슨 말이니. 다친 다리를 완전히 회복하는 데에 재활훈련이 필요하다고 수의사가 말했으니, 그것만 끝나면 바로 원래 있던 숲으로 돌려보낼 거야. 그러니 이름도 필요 없어.”

16549688054255.jpg“하지만 이렇게 예쁘고 폐하를 잘 따르는데요?”

16549688054268.jpg“그래도 야생동물이니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단 숲을 마음껏 뛰노는 편이 행복할 거야.”

시녀들은 시무룩해진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16549688054291.jpg“역시 나의 황후다운 현명한 판단이로군.”

16549688054268.jpg“웃기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