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물론 빙의자에 대해 압니다2021.09.23.
이번 사건을 조사하느라 수사관들 역시 골머리를 썩고 있겠지만, 나 역시 고민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다.
‘날 죽이려고 시도한 게 대체 누구일까?’
‘나의 적’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아이샤였다.
‘아이샤가 전적이 많긴 하지. 자신의 영향력과 친분을 이용해 날 물 먹이려고 하거나, 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어. 아이샤의 인성이 소설책을 읽었을 때 느낀 만큼 좋지 않은 것은 확실해.’
거기까지 생각했으나 영 시원하지가 않았다. 여전히 무언가가 잔뜩 꼬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내가 아이샤를 대면할 때 느낀 것은, 인성은 배배 꼬여 있어도 누굴 죽일만한 배포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어.’
이것은 내가 아이샤를 고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없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적도 적 나름이지, 아이샤가 과연 날 암살하는 계략을 짜고 실천할만한 인물일까? 그건 별로 확신이 서지 않아.’
그럼 일단 아이샤는 넘기고, 그다음은…….
‘……대신관?’
아무래도 그는 아이샤와 친분이 있으니, 나보다는 아이샤가 잘 되는 것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 죽이려고 할 정도일까?’
나는 지나가던 시녀들을 불러 세워 물었다.
“너희들, 대신관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으면 다 말해보겠니?”
“대신관님이요? 정말 대단한 분이시죠! 옴즈카 대륙에 전염병이 돌 때 ‘세인트 패트릭 선교회’를 설립해서 구호 활동을 하시기도 했고요,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모든 환자를 치료해주는 ‘세인트 템플턴 선교의원동맹’ 역시 그분이 설립하신 거예요.”
“그분께서 받으신 각종 훈장, 상, 명예기사 작위만 서른 개는 넘을걸요.”
“29세, 서른 살도 채 안 된 젊으신 나이에 이미 ‘세인트 아그네스의 현신’, ‘캘커타의 성자’ 같은 이명으로 불리시기도 했지요.”
“그분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위인이에요!”
시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 대신관은 ‘테레사 수녀’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평화주의자 위인인 것 같았다.
‘테레사 수녀나 마하트마 간디가 나를 암살하려고 계획을 짰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
이성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어쩐지 찝찝했다. 그냥 직감적으로 대신관이라는 사람에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대신관에게 신뢰가 안 가는 건 그저 그 사람이 아이샤와 친하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그때였다.
“황후 폐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떤 분이시니?”
“대신관님이십니다. 황비는 대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타이밍 좋게도 바로 이럴 때 당사자가 찾아와버린 것이다. ‘마침 잘 됐어. 대신관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으니, 직접 부딪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손님을 응접실로 모시게 했다.
“황후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어서 오세요. 저야말로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네요. 부디 집처럼 편히 지내다 가시길 바라요.”
간만에 만난 대신관은 여전히 예의가 있고 친절했다. 하여간에 아이샤랑은 꽤나 딴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국에서의 생활은 좀 적응이 되셨는지요? 식생활, 언어, 사고방식까지 제국과 성국은 많이 다르다고 들었는데요.”
“여러 분들께서 신경 써주신 덕에 편히 적응하고 있습니다. 또 황비 전하도 있고요. 그분이 제게 제국 문화에 대해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황비 전하께 궁중의 예법을 알려드리고 있는데 황비 전하는 제국의 문화를 알려주시니 저와 전하는 서로의 스승인 셈입니다.”
대신관이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간만에 만난 친동생을 애틋해 하는 것 같았다.
“적응하는 데 문제가 없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역시 황후 폐하의 사려 깊으심은 제국 여인들의 귀감입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음,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서는 황비 전하를 그다지 편히 느끼지 않으시겠지요. 황비 전하와 막역한 사이인 저 역시 편치 않으실 거고요.”
늘 나긋나긋해 보였던 대신관의 입에서 의외로 직설적인 발언이 나왔다. 나는 동조도 부정도 하지 않고 더 말해보라는 듯 그를 보았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황비 전하께 많이 들었습니다. 황비 전하께서 부족함이 많으셔서 폐하께 많은 폐를 끼치셨다지요. 대신 깊이 사과드리고자 합니다.”
“흠, 이 이야기를 하고자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사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황비 전하를 친동생이나 조카처럼 느끼며 진심으로 아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분이 반목하시거나 경쟁하시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두 분께서 조화와 화합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조화와 화합, 그것은 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관은 진지해 보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면 꽤나 단련된 내 사람 보는 눈조차 속일 수 있을 정도로 표정 관리에 능숙하거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대신관. 저와 황비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황비를 동생처럼 어여삐 여긴다고 해도 그녀 역시 성인이에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나이죠. 그런 황비의 잘못을 당신이 대신 사과하는 것은 적절한 행동이 아닌 것 같군요.”
“그, 그건…….”
“또한, 당신도 알겠지만 제국의 오랜 역사상 수많은 황후와 황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가 좋았던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한 명의 남편을 두고, 혹은 자식들의 권력과 황위계승 서열을 두고 끊임없이 다투고는 했죠. 이런 상황인데, 황비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곳에 온 뒤로 제국역사책을 열심히 읽어둔 게 다행이었다. 내 말에 대신관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곤란한 듯 웃었다.
“당사자들의 안녕을 일 순위로 고려한 제도는 아니라는 것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는 이미 존재하고 황후 폐하와 황비 전하는 어쩔 수 없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야 할 관계가 아니십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관계를 개선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뭐, 그 말에 부정은 하지 않겠어요. 먼저 무례를 저지른 황비 쪽에서 진지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한다면 저도 고려해보도록 하죠.”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저렇게 말한 건 어차피 내가 곧 황후가 아니게 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차피 곧 도망칠 건데 아이샤가 반성을 하든 말든 사과를 하든 말든 알 게 뭐란 말인가? 그러나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대신관은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밝아진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폐하의 의향이 그러시다면 제가 황비 전하를 설득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어디까지나 사과를 받아들일지 고려해보겠다는 거지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황비 전하께서 저지른 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역시 좋은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흔쾌하며 선량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지.’
나는 문득 생각했다.
‘대신관이라면 빙의자에 대해 알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는 것도.’
마침 분위기가 좋은 김에 조금 떠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제가 얼마 전에 아주 흥미로운 책을 읽었는데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성녀와는 조금 다른 것이, 다른 세계 사람의 정신만이 전이되어 옮겨온 사람들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이런 사람들에 대해 대신관은 알고 있나요?”
“아아, ‘빙의자’들 말씀이시군요. 물론입니다.”
대신관의 여상한 대답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사람들을 빙의자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왜 성녀와 달리 빙의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건가요?”
“다른 세계에서 강림한 이들은 영혼과 몸이 동시에 전이된 것이기에 돌려보낼 방법이 없어 성녀님으로 모시고 있지만, 빙의자는 영혼만이 전이된 것이기에 발견하는 족족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와 달리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고요.”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상대의 귀에도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있구나, 나 같은 빙의자들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게다가 돌아갈 방법도 있었어!’
이건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만약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해외 도피니 뭐니 하는 번거로운 일들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대신관에게 사실을 밝힐까? 나도 빙의자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건 역시 여전히 대신관을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대신관과 잡담을 조금 더 나눈 뒤 그를 돌려보냈다. *** 궁중마법사들과 케일럽은 화살을 쏘아 보낸 마법의 흔적에 대해 조사한 끝에, 해당 마력이 어떤 ‘기관’의 마법사들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이 마력 운용 방식은 마탑 출신의 마법사임이 분명합니다. 정확히 누구인지까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마탑 출신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단서 하나를 찾아낸 것은 좋았으나 그 단서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다. 왜냐하면 마탑은 제국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무국적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황실의 수사에 협조할 의무가 없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를 위해 현 마탑주와 어떠한 ‘거래’를 체결했다. 대륙 제일의 마법사 양성소로 자긍심이 높은 마탑의 주인이 어떤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로스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로벨리아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 토파즈 궁에서의 사건 뒤, 나는 한동안 대외적으로 환자였다. 암살 시도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 앓아누웠고 요양 중이라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나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당분간 황궁에 머물기 위해서. 두 번째는 내가 실제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니 안정을 취하라는 알렉산드로스의 강권으로.
‘뭐, 충격을 안 받은 것은 아니긴 하지.’
나는 황궁에서 애플망고 포멜로 푸딩을 퍼먹으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밖에 못 나가고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하긴 하네.’
그러던 와중에 수사에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이제는 박차를 가해, 직접 돌아다니며 수사를 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요양을 끝냈다는 발표를 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