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암살이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2021.09.19.
감격에 젖어 있던 케일럽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폐하,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니?”
“다름이 아니고, 폐하께서 저를 보호해주려 하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험한 황궁에서 제 신상의 안전이 걱정됩니다. 그러므로 제가 6서클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그 일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노예의 몸으로 황궁에 적을 두게 된 케일럽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럼 이 사실은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하자꾸나.”
“이해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읍합니다.”
케일럽이 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웃었다. 그 순수한 웃음을 보고 있자니, 이 정도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케일럽은 정말 믿음직하고 좋은 아이야. 이번에 나와 시녀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그렇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하지만 케일럽이 6서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의 마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번 토파즈 궁에서 있었던 사건의 조사 결과 보고서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로버트가 내미는 두꺼운 서류뭉치를 받아 들어 살폈다. 지난번의 보고서와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지만, 사건 목격자들의 증언 부분에 추가된 내용이 있었다.
“여기 쓰여 있는 것이 사실인가? 황후의 노예가 사용한 마법이 6서클에 상응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황궁 마법사들은 물론 마탑 출신 마도학자의 검증까지 받았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껏 그 노예 녀석의 마법 능력은 3서클에 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
그 어린 나이에 3서클이라고 해도 이미 이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6서클이라니……. 그것은 연륜 있는 황궁 마법사 중에서도 드물 정도의 경지였다. 그 마법이 눈속임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 노예 녀석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경계할만한 자였다.
‘이름이 분명…… 케일럽이라고 했던가?’
알렉산드로스는 서류 위에 적혀 있는 케일럽의 인적사항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일전에 이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 감히 로벨리아에 대한 연심을 드러낸 적도 있었지.’
여러모로 로벨리아의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로벨리아가 아껴서 함부로 떼어놓을 수 없다면, 사고를 위장해서라도…….’
머릿속으로 그런 음흉한 계획을 수립해가던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케일럽이 마법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마법 능력이 뛰어나기에 쓸모 있는 자이기도 했다. 이번만 해도 그가 없었으면 로벨리아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으니까.
‘그 녀석이 로벨리아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면 만일의 경우, 이번처럼 제 몸을 바쳐 로벨리아를 지키려고 할 테지. 그때 그 뛰어난 능력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의 경우, 이번에 10배로 증원한 병력보다 그 건방진 노예 녀석 한 명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지금은 로벨리아를 노리고 있는 누군가, 혹은 세력이 있으며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상황이 아닌가. 고민 끝에,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 노예 녀석을 처리하는 문제는 이번 사건의 범인과 관계자를 완전히 찾아내고 처벌을 내린 이후로 보류하도록 하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로벨리아에게 연심을 느끼는 남자가 그녀의 지척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질투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이 소유욕뿐이었더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케일럽을 치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로벨리아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자신의 질투심, 소유욕, 그런 건 결국 로벨리아의 안전이 보장된 이후에 나올 문제였다.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알렉산드로스는 심란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그 녀석 대신 내가 로벨리아의 곁에서 그녀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군.’
사실 능력으로 따져도 그편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질투가 나는 일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로벨리아가 그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가 그 노예에게 허락하는 만큼의 반만이라도 내게 곁을 허락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
“황비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난번 있었던 황후의 암살 시도 말입니다.”
아이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놀라 멍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미,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얘기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해요!”
아이샤가 목소리를 낮추곤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대신관은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황후 시해’ 같은 위험한 일이 아니라 오늘 먹은 점심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온화한 얼굴로 체스 말을 탁 소리 나게 옮겼다.
“잊어버리셨군요, 황비 전하. 제가 누구인지.”
“아…….”
아이샤는 그제서야 자신들의 주변에 둘러쳐진 반짝이는 투명한 장막의 존재를 눈치챘다.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반구의 형태로 대신관과 아이샤의 주변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저것이 있다면 우리들의 대화를 남들이 엿들을 염려는 없답니다. 설령 이곳이 황비궁의 정원이라고 해도 말이죠.”
“하지만 도청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도청, 통신 마도구는 전부 무력화됩니다. 전부 가르쳐드렸을 텐데요.”
아이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전에 도청 마도구에 된통 당해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대신관이 곁에 있었더라면, 그런 수치스러운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던 아이샤가 주저하다가 내뱉었다.
“물론…… 너무 아쉬워요. 그냥 그때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해져 그녀는 손톱을 입으로 가져갔다. 로벨리아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속이 무언가로 턱 하고 틀어막히는 듯했던 그 기분. 그리고 이어지는 불안감. 죄악감. 두려움.
“그날 이후로 로벨리아를 호위하는 병력이 10배로 늘었대요. 이제 다시는 기회가 없으면 어떻게 하죠? 그리고, 만일 우리가 한 일이라는 걸 들키면 어떻게 해요?”
불안감을 드러내는 아이샤를 지켜보던 대신관은 다정하게 웃었다.
“변함없이 어리석은 말만을 하시는 군요, 황비 전하.”
“네……?!”
“그때 황후가 죽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지 그것만으로 로벨리아에게 푹 빠져 있던 황제가 황비 전하를 황후로 책봉하였을까요? 천만에요. 일단 황후를 암살한 자를 발본색원하겠죠. 설령 그때 들키지 않았다 해도 분노와 복수심에 이성을 잃고 황비 전하를 더더욱 냉대하는 일은 있어도 황비 전하를 황후로 책봉하고 귀히 여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기대하시다니, 황비 전하는 답지 않게 순진하신 구석이 있으시군요.”
대신관의 말에 아이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그럼…… 어째서 로벨리아를 암살하려 하셨던 거죠?”
“하나를 알려줘도 열을 알긴커녕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은 황비 전하를 위해 특별히 설명해드리지요. 첫 번째, 황후 주변의 호위와 위험 대처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황후가 데리고 다니는 사용인들의 능력, 충성심, 황후 본인의 대처 능력. 이 모든 것들은 계획을 짤 때 아주 중요한 변수이니까요.”
아이샤는 채 반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입을 헤 벌리고 상대방을 보았다. 대신관은 그런 아이샤를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황후 주변에서 무척 강한 마력을 감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황궁 마법사 수준의 강력한 마력이었지만 본인이 숨기고 있는 듯 그 위치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요. 그리고 이번 일의 결과로 그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황후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이더군요.”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케일럽이라는 노예예요.”
“동방의 격언 중에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지요. 상대의 인선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대신관이 한숨을 쉬고는 덧붙였다.
“세 번째, 황제의 대응 방식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대응이요? 그건 이미 정해져 있는 거 아니었나요?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로벨리아에게 완전히 홀려 있다면서요?”
아이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대신관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으로 의심 가는 것이 있어서였는데……. 뭐, 이건 저도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대신관님의 말씀은……. 이번 시도는 진짜로 로벨리아를 죽일 것을 기대하고 하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극해서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도였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지요. 역시 아무리 황비 전하라도 이 정도로 떠먹여 드리면 이해하시는군요.”
아이샤는 손톱을 깨물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만약에…… 이번 일을 저지른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하지요? 그때는 정말 두 번째 기회는커녕, 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신관은 피식 웃었다.
“황비 전하께서는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체스 말을 제대로 쓸 줄을 모르십니다. 그렇기에 매번 저에게 패배하시는 거지요.”
“네?”
“체크메이트라는 뜻입니다.”
그가 나이트를 움직였다. 나이트의 다음 행동반경에는 아이샤의 킹이 놓여 있었다. 더 이상 나이트의 경로를 막을만한 말은 없었다. 또한 어디로 도망쳐도 대신관의 다른 말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고 했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완전히 파악한다면 그런 불안감도 들지 않지요.”
“…….”
“룩은 직선, 비숍은 대각선, 나이트는 사방으로 한 칸, 대각선으로 한 칸입니다. 또한 ‘그들’은 의뢰자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지요.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목숨이 제일 소중한 거잖아요. 결국 배신할 가능성도…….”
“룩은 직선, 비숍은 대각선, 나이트는 사방으로 한 칸, 대각선으로 한 칸. 체스에서 이 규칙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지요.”
대신관은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그러자 그들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장막 역시 사라졌다. 대신관은 시종들을 불러 체스판과 말을 치우게 했다.
“황비 전하는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체스로 저를 이기시려면 앞으로 300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 살아야겠습니다.”
그가 농담인 듯 말하며 아이샤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종들은 사이좋은 친구나 친척끼리 주고받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이샤는 그 말 아래에 숨어 있는 의미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노력할게요.”
그녀가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