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든 것을 걸고 도주를 돕겠습니다2021.09.16.
그러나 케일럽의 협력과 궁정 마법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쉽지 않았다. 숲에서 발견된 마법의 흔적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지웠기에 무척 흐릿했고, 그 때문에 흔적에서 어떤 마법사가 쓴 마법인지 읽어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편, 화살을 조사한 결과 그것을 제작한 대장장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화살을 구매한 자에 대한 정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느냐?”
“네, 그렇습니다. 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목소리도 중성적이라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저는 그 손님이 누구인지,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건지는 몰랐습니다.”
“네 이놈! 무기는 신원이 보장된 자에게만 판매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법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냐?”
“저, 정말 죄송합니다. 가격을 하도 후하게 쳐주기에 그에 눈이 멀어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장장이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황후 시해 시도 사건으로 인해 사교시즌 시작 행사는 흐지부지되었으며, 참가자 전원에 대한 심문과 조사가 끝난 뒤에는 모두가 수도로 돌아왔다. *** 이번 일로 인해 알렉산드로스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하마터면 그녀를 잃을 뻔했다.’
이제까지 생각했던 로벨리아를 잃는 일이라곤 이혼 정도까지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그것 이상으로 두려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있었다. 그런 것 이상으로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 눈을 감을 때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떠올랐다. 그 가녀린 몸에 화살이 박히고, 붉은 머리카락이 더더욱 붉은 피에 젖어 들며, 팔다리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모습이.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피가 식고 가슴이 무너졌다.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정신 차려야 한다. 이성을 유지해야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알렉산드로스는 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깨달았다. 그가 어떠한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그에게는 약점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의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그였으니 숙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생긴 지금은, 그에게 너무나 명백한 약점이 생기고 말았다. 그의 철벽과도 같은 이성을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라는 인간 자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평생을 걸어온 숙원보다도 더욱 소중한……. 알렉산드로스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오른손을 떼고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 안에는 땀이 흥건했다.
‘우선 로벨리아를 보호하는 병력을 늘려야겠어. 2배, 아니면 5배? 아니, 10배 정도는 되어야 안심이 되겠군.’
알렉산드로스는 침잠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모자의 정체와 이유를 알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의 가능성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다시는, 그 누구라도, 이 비슷한 일을 일으키기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겠다.’
*** 나를 보호하는 병력을 늘리겠다는 알렉산드로스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호위병의 숫자는 황후라는 지위에 비하면 많이 적은 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데니슨 후작부인은 외출할 때마다 호위병만 80명은 데리고 다닐 정도였으니.
‘나도 이런 목숨이 위험한 일 같은 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고 말이지.’
하나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해외 도피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를 보호하는 병력이란 곧 나를 감시하는 인원이기도 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 도망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나도 이렇게나 불안한데, 이 일의 책임을 맡고 있는 노먼은 어떨까.’
나는 눈앞의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에게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우리는 이번 일로 상의를 하기 위해 황후궁 응접실에 모인 상태였다. 솔직히 걱정이었다. 이 일의 위험성이 이렇게나 늘어난 상황이니, 그가 발을 빼도 나로선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의 불안함을 읽어낸 것일까, 노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봅니다.”
“그렇기야 하죠. 저로서도 호위 병력이 10배나 느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한숨을 쉬고 덧붙였다.
“공작도 알겠지만 위험성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커졌어요. 만약 부담감을 느끼신다면 얼마든지 일에서 빠져도 괜찮아요. 그대의 지금까지의 헌신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내가 이혼할 가능성은 멀어져 버렸지만, 그렇다 해도 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찻잔을 들어 올리던 노먼은 내 말에 손을 멈추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게는 폐하의 말씀이 ‘부디 이 일에서 손을 떼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
그의 말에 나는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일에는 내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포기해버리기에 나는 이 일에 너무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읽어낸 것일까, 노먼은 찻잔을 달그락 소리도 없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폐하께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정도의 일로 손을 뗄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노먼…….”
“오히려 이번 일로 저야말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폐하께서 앉아계시는 그 자리는 너무나 위험하고 엄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원치도 않으시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도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먼의 말은 내게 상상 이상으로 위안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제국에 떨어진 뒤로 계속 의지할 곳 없이 지내왔는데, 의지해도 괜찮다, 반드시 도와주겠다고 장담하는 누군가의 말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는지.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노먼.”
“천만의 말씀입니다.”
노먼은 공손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는 수줍었으나 무척 기뻐 보였다. *** 케일럽이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케일럽의 마법 수업은 잠시 미뤄지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케일럽의 마법 선생과 대화를 하다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믿을 수가 없군요. 황후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케일럽은 3서클 마법사가 아닙니다.”
마법 선생은 단춧구멍 같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외알 안경을 닦고 다시 착용했다.
“그게 정말인가? 케일럽이 3서클 마법사가 아니면 뭐지?”
“그 정도의 규모, 강도의 마법 방어막이라면……. 5서클, 아니, 6서클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나이를 감안하지 않아도, 제 연배의 마법사 중에서도 드물 정도의 마력입니다.”
마법 선생은 내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 황후씩이나 되는 사람이 빈 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믿기 어려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 선생과의 상담이 끝난 뒤, 나는 케일럽을 불렀다.
“부르셨나요, 폐하?”
케일럽은 어깨에 붕대를 두껍게 두르고 있었다. 마법에 걸린 화살이기에 치료에는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지만, 다행히 신경이 다치거나 하지는 않아서 후유증이 남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래, 케일럽. 다름이 아니고 지난번 일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네, 어떤 것이 궁금하신가요?”
“우선 지난번에 나와 시녀들, 기사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 역시 같은 마음이니, 나와 폐하는 너에게 큰 포상을 내리기로 결정했단다.”
“황후 폐하의 호위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케일럽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수줍음과 기쁨에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은 그를 더더욱 어린아이 같아 보이게 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방금 너의 마법 선생과 이야기를 한 참인데, 혹시 네가 너의 마법적 능력에 대해 숨기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 싶은 의문이 들었어.”
“숨기고 있는 것이요?”
“그래.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내게 할 말 없니?”
이 화제를 꺼내자 기뻐하던 케일럽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각오한 듯 결연한 눈을 했다.
“네, 그때 그 마법을 쓰면서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저는 폐하와 스승님께 제 마법의 힘을 숨겼어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선생의 말로는 네가 적어도 6서클은 될 거라고 하던데 사실이니?”
“네.”
“그 정도의 마법적 재능을 대체 어째서 숨겼던 거니?”
“그게……. 아시다시피 노예인 제가 궁에서 일하고, 황후 폐하의 호위기사가 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기에 만약의 경우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저의 능력을 숨겼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숨겨도 나에게는 알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노하신대도 할 말이 없지만……. 처음 황후 폐하께서 저를 궁에 데려오실 때 저는 황후 폐하를 존경하면서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었어요. 그때 제가 믿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케일럽은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지금 저는 황후 폐하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폐하의 고귀한 인품을 존경하며 온 마음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제 완전한 마법능력을 보여드린 것 역시 그 때문이었고요. 제가 지금 저의 진심을 온전히 보여드리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에요. 저의 과거의 진심은 의심하시더라도, 부디 지금의 진심은 의심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당황했다. 그 간절한 눈빛은 도저히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겠으니 일어나렴. 너에게 화낼 생각도 없으니까.”
그가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던 심경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내 말에 케일럽은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제게 노하지 않으신 건가요? 제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모셔야 할 폐하께 거짓을 고했는데도요?”
“누구에게나 숨기고픈 비밀은 있으니까. 그리고 굳이 내게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할 필요는 없단다. 상사는 직장에서나 상사인거지, 직장 밖의 너의 삶 역시 중요한 거 아니겠니?”
내 말에 케일럽의 갈색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폐하, 제 육신, 마음, 영혼,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따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마음이 들게 만드신 분은 폐하께서 처음이에요.”
“너 내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