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황후 시해 시도 사건2021.09.12.
“미쳤어요? 빨리 내려줘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기겁한 내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나를 안은 채 걸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걷기 힘들어 보이던걸.”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지쳤다. 높은 굽의 힐을 신고 춤을 추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이전의 나는 미처 몰랐다. 발과 종아리까지 욱신욱신 쑤셔서, 마음 같아서는 굽 높은 구두 따위 벗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 심정을 읽어낸 듯 알렉산드로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을 밟힌 건 난데 그대가 아파하는 건 어찌 된 일인가?”
“…….”
“이만 방에 돌아가 쉬는 게 좋을 것 같군. 내가 바래다주도록 하지.”
“벌써 들어가도 상관없나요? 무도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물론이지. 그대가 얼굴 비춰준 것만으로도 난 만족하고 감사해.”
그 말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인지, 그는 무도회장을 빠져나가 토파즈궁 건물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 방에는 금방 도착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 손수 구두를 벗겨주었다.
“휴식을 더 편안히 취할 수 있도록 마사지사를 불러줄까?”
“아니요, 지금은 그것보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네요.”
“그래, 지금쯤 그대의 시녀들이 오고 있을 거야. 시녀들이 도착하면 목욕 시중을 받도록 해.”
“무도회가 이렇게 정신없을 줄은 몰랐어요. 저는 그저 한가하게 구경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한가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되리라 예상했지만, 예상외로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한 것 같았다. 내 말에 알렉산드로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즐겁지 않았나? 난 이번 행사가 그대에게 즐거운 추억이 되었길 바라.”
그의 말에 나는 찬찬히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방금 있었던 무도회는 물론, 숲을 산책한 일이나, 폴로를 구경하고, 호숫가를 거닐었던 일까지.
“솔직히…… 그건 그래요. 생각보다는 즐거웠어요.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긴 시간인 줄 알았는데, 벌써 오늘이 마지막 밤이고 내일 낮에 돌아간다니 아쉽네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내가 느낀 걸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내 말을 들은 상대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눈은 깜짝 놀란 듯 드물게 커져 있었다.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있더니, 진심으로 기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대가 그 정도로 즐거웠다니 정말 기쁘군. 이번 행사를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는걸. 그렇게 말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로벨리아.”
늘 계산적인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그 행복해 보이는 얼굴, 들뜬 듯한 목소리는 계산이나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속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토록 순수하게 기뻐하는 건, 의외로 밉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하길 잘한 것 같아.’
하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내일 돌아가는 것이 아쉽다면, 지금이라도 행사를 6박 7일로 연장하는 것은 어떻겠나?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 당장 연장할 기간의 기획에 들어가면 충분히-.”
“됐어요.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 시녀들이 돌아오자 알렉산드로스는 푹 쉬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입욕을 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 눈은 말똥말똥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네.’
그것이 내가 잠에 못 들게 하는 원인이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데, 내가 올 수 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나는 조만간 해외 도피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해외 도피를 한 뒤 이곳에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라. 뒤척이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 폐하, 잠이 잘 오지 않으시나요?”
“아무래도 아쉬워서 호숫가를 마지막으로 산책하려고. 호위를 데려갈 거니까 너희는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된단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따라가야죠.”
나는 잠옷 위에 가볍게 겉옷만 걸치고 호수로 향했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무도회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지 호숫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밤호수의 풍경은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달빛이 쏟아지는 호수는 얼음처럼 시리게 빛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군락으로 피어난 달맞이꽃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어머나, 밤호수는 낮과 전혀 다른 매력이 있네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시녀들도 즐거운 듯 재잘댔다. 나는 달그림자가 떠오른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에는 희게 빛나는 달과 푸른 토파즈궁의 그림자가 비쳐 보였고, 호수 너머로는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같은 작은 마을이 보였다.
“호수 반대편에서 보면 토파즈궁의 전경이 보여서 더 아름다울 것 같아요.”
“폐하, 춥지는 않으신가요? 숄을 한 장 더 두르시는 것이 어떠세요?”
나는 시녀가 들고 온 숄을 손을 들어 거절하곤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호숫물에 손을 담갔다. 달빛을 받은 물속에서 내 손은 유령처럼 창백하고 투명해 보였다.
‘나오길 잘했어.’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수 반대편으로 가볼까. 호수와 토파즈궁을 한눈에 보면 그것도 꽤 멋질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폐하, 위험합니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나는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긴 막대기 같은 무언가가 호위기사 중 한 사람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었다.
“컥, 커헉!”
피를 토하며 느리게 쓰러지는 기사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해서, 방금 전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풍경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꺄아악!”
시녀들의 비명이 내 현실감각을 되찾아주었다.
‘위험한 상황일수록 정신 차려야 해. 이게 대체 어디서 날아왔지?’
나는 기사의 식어가는 몸을 살폈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건 화살이었는데, 어떤 종류의 화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폐하, 위험해요!”
“저희의 뒤에 서세요!”
시녀들은 공포에 질렸음에도 나를 지키려는 듯 내 주변을 둘러쌌다. 기사들 역시 경계의 태세를 취하고 전열을 갖추었다.
“다시 옵니다!”
“조심하세요!”
예상대로, 화살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 또 하나. 몇 초 정도의 간격을 두고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이 계속 달라지는 것을 보아하니 적이 한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속도와 힘을 보니 평범한 화살이 아닙니다. 마법으로 강화한 화살인 듯합니다!”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지만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것이 보였다. 깡! 깡! 거세게 날아오는 화살이 그들의 검에 부딪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를 남기며 튕겨 여기저기에 박혔다. 땅, 나무, 잔디밭……. 사실 저렇게 튕겨 나온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와 박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어서 실내로 대피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멀어요! 게다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이 계속 달라지고 있다면서요? 저희가 도망친 방향에서 날아오면 어떻게 해요?”
시녀의 말이 맞았다. 기사의 숫자는 부족했고, 공격은 매서웠다.
“차라리 여기서 지원을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하지만 모두 무도회장에 있을 것이니 부를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저희도 힘에 부쳐서 언제까지나 막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끄아악!”
그때였다. 기사 한 명이 힘에 부쳤는지 팔에 화살을 맞고 비틀거렸다.
“역시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셋을 세면 달려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낫겠어. 언제까지나 여기에 서 있을 수는 없어. 너희들 모두 달릴 수 있겠니?”
시녀들은 몹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앞만 보고 달리는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뒤를 보지 말고 실내에 들어서기 전엔 안심하지 않도록 해.”
“제가 지금부터 셋을 세겠습니다! 셋…… 둘……!”
기사가 신호를 주던 그때였다. 우리의 앞에 선명한 초록색의 장막이 펼쳐졌다. 밤하늘 아래에서 선명히 빛나는 그것은 우리 모두를 감쌀 정도로 거대했으며, 또한 마법에 걸린 화살을 막아낼 정도로 튼튼했다. 나는 이 마법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런 마법에 대한 묘사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이건 틀림없이 원작에 나왔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외쳤다.
“케일럽!”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직 무도회 예복 차림을 한 케일럽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윽…… 으윽, 폐하!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케일럽. 그런데 너 이게 대체……?”
“서, 설명하자면 길어요. 일단 모두 빨리 대피하세요. 어서요! 지금 저도…… 생각보다 힘들어서……. 크윽!”
케일럽의 독촉에 나와 시녀들은 보호막의 뒤편으로 대피했다. 기사들 역시 다친 사람을 업고 대피했다.
“케일럽, 너도 가야지!”
“무, 물론이죠. 저, 저도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폐하, 얼른 가셔야 해요!”
시녀들이 등을 떠밀어 나는 어쩔 수 없이 토파즈궁으로 향했다. 케일럽 역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조심스레 옮기며 우리를 감싸도록 보호막의 위치를 조정했다. 일행들이 거의 다 실내에 도착했을 때였다.
“케일럽, 어서 들어와!”
“네, 자, 잠깐만요……!”
케일럽이 불편한 한쪽 다리를 애써 움직이던 그때였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우리의 귀청을 찢었다. 결국 그의 보호막이 쏟아지는 공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아악!”
“케일럽!”
내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기사 한 명이 뛰어나가 케일럽을 업어왔다. 그의 어깨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고, 예복 위로 검붉은 피가 번졌다. *** 알렉산드로스가 이 일을 알게된 것은 한 발 늦은 이후였다. 무도회를 감독하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그는 불과 같이 분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해서 이번 일의 주모자를 알아내도록 해라! 놈에게 감히 목숨 부지하고 있는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겠다!”
로벨리아가 무사함을 확인한 그는 모든 병력과 인력을 모아 화살이 날아온 숲을 뒤지고, 화살을 조사하고, 이번 행사에 참가한 모든 이들을 심문하고 소지품 검사를 했다. 조사 결과, 숲에서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마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다친 어깨를 치료받은 케일럽 역시 이번 수사에 협력했다.
“화살은 사람이 활로 쏜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발사한 것이었습니다. 마법사마다 마력의 운용방식이 지문처럼 조금씩 달라서 마력의 흔적을 조사하면 누가 화살을 쐈는지 알아낼 수 있어요. 저의 모든 마법적 지식과 힘을 걸고 장담합니다.”
그 역시 로벨리아가 위험할 뻔했다는 사실에 대단히 분노하고 있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