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그대가 또 내 발을 밟으면 안 되잖나2021.09.09.
“로벨리아.”
낮게 울리는 근사한 목소리. 이 친근한 태도. 허리에 휘감기는 단단한 팔. 채 돌아보기도 전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
돌아본 내 시야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은색 예복으로 성장하고, 앞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빗어낸 그에게선 평소보다 더욱 진한 남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그는 한 팔로는 내 허리를 단단히 감고, 다른 손으로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가 말했다.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성인 그대와 함께 춤을 출 영광을 나에게 허락해주겠나?”
“아니, 당신까지…….”
“‘당신까지’가 아니야. 나이니까, 그리고 그대이니까 이 무도회에서 춤을 춰야 하는 거야.”
그는 다정히 눈꼬리를 접으며 내 손등을 자신의 입가에서 떼려 하지 않았다.
“이 무도회의 주최자는 그대와 나, 두 사람이야. 그리고 무도회에서 주최자 부부는 제일 먼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관례지.”
“하지만 당신이 분명…….”
“그래, 귀찮은 일은 시키지 않겠다고 했지. 기억하고 있어.”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내 허리에 감았던 팔 역시 풀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 그대에게 명령이 아니라 부탁하고 있는 거야. 나를 선택해달라고 말이지.”
“이거 참…….”
나는 당황해서 세 명의 남자를 보았다. 그들은 어느샌가 서로를 노려보며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꼬마 노예, 슈워츠코프. 이렇게 또 만나서 무척 반갑게 됐군.”
알렉산드로스가 반어적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이렇게 나오실 것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닙니다만……. 호위기사는 조금 의외로군요.”
노먼은 두 사람에게 노골적인 경계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배시시 웃던 케일럽 역시 말했다.
“네, 두 분 모두 무척 반갑네요. 하지만 황후 폐하께 제일 먼저 춤을 청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저라는 사실을 두 분께 상기해드리고 싶어요. 설마 이 좋은 날에 권력이나 지위로 저를 억누르는 그런 졸렬한 행동은 하지 않으시겠죠?”
“하하, 그럴 리가. 나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아니야.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황궁에는 관례가 있어. 내 의지와 관계없이 관례가 이런 것을 어쩌겠나?”
“물론 황궁의 관례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알고 있지만, 아시잖아요. 황후 폐하는 관례 같은 거로 묶어둘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안 그래요, 공작님?”
“그렇습니다. 관례 같은 걸 핑계로 황후 폐하와 춤을 추고자 하는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시는 건 비겁한 일입니다.”
셋 모두 태연한 척 말하고 있었으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불꽃이 서려 있으며, 목소리 아래에는 가시가 돋쳐 있다는 걸.
‘알렉산드로스는 그렇다 쳐도 다른 둘까지 왜 저러는 거야? 단체로 미쳤나?’
하나 이 사태를 곤란하게 여기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우리를 에워싼 무수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후 폐하를 에워싼 사각 관계라니…….”
“과연 황후 폐하께서는 어느 분을 선택하시게 될까요?”
그런 소리마저 바람결에 실려 들려올 정도였다. 게다가, 영애들 역시 로맨스 연극을 보듯이 눈을 빛내며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법적으로 이혼할 생각도 없어진 마당에 이런 식으로 관심의 중심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몰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편, 기 싸움을 하던 남자들은 결국 하나의 합의점을 찾아낸 듯했다.
“우리끼리 가타부타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대들의 말대로, 결국 중요한 건 로벨리아의 의사니까.”
“맞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말한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쪽을 보았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되었겠지? 이만 선택해주었으면 좋겠군.”
“황후 폐하의 현명한 선택을 고대합니다.”
“폐하께 저의 성장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으악, 부담스러워!’
남자들의 시선과 함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나는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면 결코 납득하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네. 저들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 명은 선택하는 것이 좋겠어.’
결국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데. 셋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
몇 초 만에 결정을 내린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내 손끝에 모였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겠어요.”
그 말과 함께 내가 손을 뻗어 붙잡은 것은…….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손이었다. 순간 남자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노먼과 케일럽의 얼굴에는 충격과 낙담의 기색이 어렸고,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는 선명한 기쁨이 새겨졌다.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현명한 선택, 진심으로 고맙군.”
“고마워하실 필요는 결코 없어요.”
무슨 뜻이냐는 듯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곧 알게 되실걸요?”
*** 그렇게 우리는 댄스 플로어에 섰다. 그렇게 시선을 끈데다가, 황제와 황후의 춤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어머, 세상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이게 대체 얼마만의 일인가요?”
기대 어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알렉산드로스는 능숙하게 내 허리와 손을 잡고 속삭였다.
“솔직히 예상 못 했어. 그대가 날 선택할 줄 말이야.”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그를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평소에 그보다는 케일럽이나 노먼을 더 가까이했고.
“그런데 이렇게 함께 춤을 출 기회를 얻다니 나는 다 가진 것만 같군. 결코 후회하는 일 없도록 노력하지.”
그가 예상보다 훨씬 더 기뻐해서 나는 좀 민망해졌다. 내가 그를 안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걸 여태까지 숨긴 적도 없고. 그러니 이번에 케일럽이나 노먼 대신 그를 선택한 것도 그가 좋아서라든가 그를 위해서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양심이 콕콕 아파지는데.’
그렇게 생각한 난 연주곡이 시작되기 직전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할 말이 있어요. 사실 전 춤을 잘 못 춰요.”
“그런 건 문제 될 거 없어. 내가 잘 추니까.”
그가 자신감을 드러냈다.
‘음, 그래도 그가 예상하는 범위가 있을 텐데……. 그거보다 훨씬 아래일걸.’
사교댄스는 모든 귀족의 교양이니까 말이다. 로벨리아 역시 배운 적이 있겠지만,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었던 나는 그런 걸 배운 적이 전혀 없었다. 책에서 이론 정도는 읽었지만, 지식과 숙련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 말이다.
“그러시다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춤곡이 시작됐다. 초여름의 가든파티라는 콘셉트에 맞추어 연주곡은 약간 빠르고 경쾌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책에서 보았던 동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그것을 따라 하려던 찰나였다.
콰직! 끔찍한 소리가 났다. 비유하자면 마치 단단한 나무가 으깨지는 소리 같았다. 평화로운 무도회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소리였기에, 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잠시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던 나는 곧 깨달았다. 이 소리는, 내 발에서 나는 소리였다. 내가 알렉산드로스의 발등을 밟았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높고 뾰족한 하이힐 굽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기겁했다. 나는 재빨리 댄스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도 한 줄기의 금이 가 있었다. 그의 뺨이 이를 악문 듯 경직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그가 로판 남주인공이고 강하다고 해도 내 15cm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킬힐에 발등을 찍혔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온 사방에서 경악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춤을 추다 황제의 발을 밟는 여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알렉산드로스가 여태껏 춤을 췄던 여성들은 사교계 최고의 여인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제국 최고의 춤꾼일 것이다. 황제의 발등을 밟는 정신 나간 여자가 이제껏 있었을 턱이 없었다. 즉 내가 그의 발등을 밟은 최초의 여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알렉산드로스의 얼굴 경직은 금방 풀렸다.
“확실히 그대는 춤꾼은 아니로군. 하지만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음……. 뭐, 그러시다면야.”
내가 용기를 내어 다음 스텝을 밟는 그 순간이었다. 콰득! 예의 그 끔찍한 소리였다. 그렇다. 내가 또 그의 발등을 밟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 다시금 커다란 금이 갔다. 찍은 데를 또 찍어서 그런가, 미미한 차이였으나 이번에는 그가 표정을 정돈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춤을 신청한 건 나였으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춤을 무지막지하게 못 출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노먼이나 케일럽을 망신 주지 않으려고 알렉산드로스를 선택한 것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못 출 줄은 몰랐다. 설마 스텝 한 번에 한 번씩 상대의 발을 밟을 줄이야.
‘책으로 볼 땐 이렇게까지 어려워 보이진 않았는데.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르구나.’
그렇다 해도, 고작 두 스텝 만에 내려올 수는 없었다. 나는 좀 더 집중하여 춤에 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콰직! 와직! 와드드득!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나의 15cm 킬힐은 어김없이 그의 발등을 찍어댔다. 그때마다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이 굳었고, 우리를 지켜보는 주변의 반응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갔다. 평소 알렉산드로스를 무척 얄밉게 생각하던 나였으나, 이쯤 되니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낮은 굽을 신고 오는 건데.’
하지만 지금 생각해봤자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결국 나는 원 스텝 원 밟기의 페이스로 춤을 췄고,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조금씩 적응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면, 아마도…… ‘저걸 참아주는 황제 폐하도, 계속 밟는 황후 폐하도 대단하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여 의도치 않은 알렉산드로스 고문 시간은 연주곡과 함께 끝났다. 연주곡이 끝나자마자 내가 속삭였다.
“미안해요. 이렇게까지 밟을 생각은 없었는데.”
“밟을 생각이 있긴 있었다는 것이군?”
“네. 뭐…… 다섯 번에 한 번 정도라면?”
알렉산드로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민망해져서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운동과 거의 담을 쌓고 살다가 갑자기 격렬한 춤을 춘 나는 약간 지쳐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으니, 약간 비틀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엇!”
나는 아주 순간적으로 휘청하고 무게중심을 잃었다. 아픔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였다.
“……!”
몇 초가 지나도 아프지 않자 나는 눈을 떴다. 놀랍게도 난 넘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구름 위에 누운 듯 전신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날 안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가 또 내 발을 밟으면 안 되잖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