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2021.09.05.
숲이라고는 하지만, 산책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었다.
‘하긴 황궁 바로 뒤에 있는 숲이니까 당연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침엽수림이 뿜어내는 시원한 향을 들이마셨다. 어딜 봐도 청록빛의 나무가 가득했고, 새와 곤충의 소리가 들렸으며, 단정하게 닦인 산책로는 걷기에 편했다. 오밀조밀한 야생화가 길을 따라 피어나 있는 것이 무척이나 소담스러웠다. 특별히 숲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황궁과 사람들의 등쌀에 은근히 피로함을 느끼고 있던 나는 그 평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연에서 힐링을 찾는 거구나.’
나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 로벨리아의 말대로, 알렉산드로스는 되도록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 얻은 단둘이 있을 기회인데, 허망하게 빼앗겨 버릴 수는 없지.’
하지만 산책로를 걷는 로벨리아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귀엽기 짝이 없었다. 길을 걷던 로벨리아는 몇 번이나 발을 멈추고 무언가에 감탄하는 것을 반복했다. 뭘 그리 좋아하는가 유심히 봤더니, 주로 길가를 따라 돋아난 꽃이나 지저귀는 새, 지나가던 다람쥐 등이었다. 토파즈궁도 황궁이니만큼 그 규모가 대단했으나 본궁의 정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후궁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익숙할 그녀가 작고 하찮은 야생화나 다람쥐 따위에 감동하는 모습은 의외이면서도 알렉산드로스의 가슴 한구석을 간질거리게 했다.
‘본궁 정원의 인위적인 모습보다 토파즈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좀 더 취향인가 보군.’
그는 내심 생각했다.
‘본궁에서 가까운 곳에 로벨리아를 위한 정원을 하나 더 조성해야겠어. 인위적인 걸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숲의 느낌을 살려서 말이지.’
새 정원을 선물 받은 로벨리아는 과연 기뻐해줄까? 대놓고 기뻐하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아도, 적어도 한 번 미소 지어주기라도 하면 알렉산드로스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되도록 로벨리아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비어 있는 것이 무척 신경 쓰였다. 그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고, 이마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가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그때였다.
“카아악!”
별안간 짐승 소리가 분위기를 깨었다. 그 소리를 로벨리아 역시 들었는지, 버섯 군락을 구경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짐승이 우는 소리 같은데.”
“한 번 가봐요.”
그렇게 말한 로벨리아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산책로를 넘어 숲의 조금 깊은 곳까지 들어간 그들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카아아악! 카아악!”
중형견 정도 크기의 그것은 여기저기 다친 데다 비쩍 마르고 털은 푸석푸석해서 볼품이 없어 알아보기 쉽지 않았으나, 주의 깊게 살펴보자 곧 붉은색의 털을 가진 여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가 다가가는 것을 막아 세웠다. 그녀 역시 일정 거리에서 더 다가가려 하지는 않았다.
“발목에 뭔가가 감겨 있어요.”
“올가미인 듯한데. 이 숲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은 금지인데 누가 불법으로 설치한 모양이군.”
“카아악!”
여우는 그들을 경계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올가미는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점점 여우의 발목을 조일 뿐이었다. 올가미의 쇠줄이 파고들어 붉은 피가 비쳐 보이자 로벨리아가 괴로운 듯 이마를 찌푸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다가 말했다.
“구해주고 싶나?”
“음……. 네.”
로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산드로스는 멀리서 따라오고 있던 사용인들을 불렀다. 그는 시종들로 하여금 올가미를 잘라 여우를 구하고, 치료하고 씻기고 밥을 먹이도록 지시했다.
“이제 그 녀석은 무사할 거야.”
시종들이 여우를 포획해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마음 여리기는.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래 굶주렸을 뿐, 심하게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로벨리아의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여우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피곤해 보이는데.”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산책을 마무리하고 궁으로 돌아갔다. *** 저녁의 일정은 바로 야외 무도회였다. 야외 무도회는 토파즈궁 전면에 조성된 아기자기한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수백 개의 바비큐 그릴과 수천 명의 요리사, 웨이터, 연주자, 기타 잡부들이 동원되었다. 오로지 한 번의 파티를 위하여 수백 마리의 거위와 수십 마리의 소, 돼지가 도축되었다. 가든 파티라는 콘셉트에 맞추어 무도회의 참가자들은 도시에서 열리는 무도회보다 훨씬 편안한 옷을 입었다. 여성들은 발목 정도까지 오는 칵테일 드레스, 남성들은 세미 정장을 입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원 한쪽에서는 요리사들이 바비큐를 굽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연주자들이 가든 파티에 어울리는 경쾌한 음악을 연주했다. 정원의 한가운데, 눈에 잘 띄는 곳에는 댄스 플로어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몇 쌍의 커플들이 춤을 추는 중이었다. 모두가 흥이 오른 것이 보였다. 술을 한두 잔 할만한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웃음이 많아졌으며 과장스러운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아올랐다. 그런 와중에, 나는 그냥 구석에 서 있을 생각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꼭 참가해달라기에 오기는 했지만, 무도회는 익숙하지도 않고, 어떻게 놀아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사실 나에게는 이번이 첫 무도회였다. 제국에 온 뒤로 대부분의 사교 행사를 회피했으니까 말이다.
‘춤을 출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참석한 것만으로도 내 할 일은 다 한 거지 뭐. 그냥 먹을 거나 좀 먹다가 돌아가자.’
그것이 무도회장에 들어서기 직전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하나 예상치 못하게도,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오전에 만난 그 소녀들이었다.
“황후 폐하! 즐거운 저녁 보내고 계신지요?”
“정말 아름다운 칵테일 드레스예요, 폐하! 황후 폐하의 안목에는 늘 감탄하게 돼요.”
“오후의 조정 경기에는 왜 오지 않으셨나요? 황후 폐하께서 안 계시니 즐겁지 않았어요.”
“맞아요. 내일은 참석해주실 거지요?”
눈을 반짝이며 재잘대는 소녀들은 귀여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그녀들의 혼삿길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도회에서 나에게만 말을 거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영애들. 무도회에 참석했으니 가서 춤을 추고 놀도록 해. 사교활동은 귀족의 중요한 덕목이니까.”
하지만 소녀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단호했다.
“세상에 황후 폐하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요, 황후 폐하!”
“하지만 폐하께서도 춤을 추지 않고 계시지 않은가요?”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상에! 저 남자분은 누구지?”
“정말 아름다운 미모네요!”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폭신폭신해 보이는 갈색 고수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피부가 희고 고왔고 둥근 눈매가 순하고 청순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무척 잘 어울리는 암녹색의 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두 손에는 꽃다발을 소중히 안고 있었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빼어나게 차려입었기에 그가 케일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케일럽은 이쪽을 향해 똑바로 오고 있었다.
“황후 폐하.”
그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고 애교살은 폭신하게 부풀어 오르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불렀다.
“케일럽, 무슨 일이니? 오늘은 이만 퇴근하라고 말했을 텐데.”
“예, 그래서 오늘은 업무가 아니라 사적인 일로 폐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붉은 샐비어와 장미로 만든 꽃다발이었다. 케일럽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 손등을 끌어당겨 입 맞추곤, 그가 말했다.
“황후 폐하, 저에게 폐하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워낙 잘생긴 데다가 그동안 키가 많이 컸고, 근사하게 차려입었기에 그는 상당히 멋진 남성으로 보였다. 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래봤자 나에게는 귀여운 아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춤이라니? 게다가 이 꽃다발은 또 뭐고?”
“황후 폐하께서는 저의 스승님과 같은 분이시죠. 늘 저의 성장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보여드리면 어떨까 하여 이렇게 무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어린 영애들이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황후와 호위기사의 로맨스라니! 너무 아름다워요!”
“그야말로 한 편의 소설이네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뭔가 오해를 산 모양이네.’
영애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고, 케일럽 역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춤을 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어쩐다…….’
그때였다.
“어머나! 저기 좀 봐요!”
또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돌아보자, 키가 훤칠한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바로 노먼이었다. 그는 은발과 무척 잘 어울리는 흰색 예복으로 성장했는데, 가슴팍에 붉은 꽃 코르사주 하나를 포인트로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그는 무도회의 조명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는 내 앞까지 다가왔다.
“존경하는 황후 폐하. 저와 함께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그는 그윽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곤, 내 손을 잡아당겨 손등 위에 천천히 입 맞추었다.
“네, 갑자기 춤이요?”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와 함께 춤을 출 수만 있다면, 폐하께서 부탁하신 ‘그 일’을 준비하는 데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춤을 추는 것과 해외 도피 계획을 세우는 일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케일럽이 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주목을 받았는데, 노먼까지 다가와 내게 춤을 신청하니 이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느낌상 정원에 있는 사람의 거의 전부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곤란한데. 내가 기대했던 무도회와는 다르다고. 나는 조용히 바비큐나 먹다 갈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심지어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