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의 기록을 깰 수 있을까요?2021.09.02.
내 말에 허스트 백작부인의 주름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러시는 폐하께서는 저런 어린 영애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즐거우시다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즐거우면 안 될 이유는 또 어디 있지? 그래, 이 영애들과 어울려서 나는 지금 몹시 즐거워. 그대같이 남의 뒷말이나 즐기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낫지.”
“황후 폐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폐하를 위하는 충정에서 우러난 간언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이런 모욕을 하시다니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을 나는 나의 옛 가족들에게서 보았으니까.
‘그들도 늘 나를 위해서라고,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했지. 그리고 나는 늘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갔었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알아. 그들이 말하는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건 날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함이라는 걸.’
내가 처음으로 그들의 ‘나를 위한 말’을 거역했을 때 그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의 허스트 백작부인 역시 그랬다. 정말 나를 위해 한 말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반응. 내 옛 가족들도, 백작부인도, 결국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껴 화를 내는 것일 뿐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신 속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황후 폐하께서 성정이 바뀌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폐하의 영애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저로서는 소문을 들어도 그럴 리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정말 이제 폐하의 언행에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군요. 더없이 정숙하며 어질고 음전하셨던 그때의 모습 말입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대가 말하는 ‘정숙하고 어질다’는 건 남의 말에 잘 휘둘린다는 뜻이었겠지?”
허스트 백작부인이 과거에 얼마나 로벨리아를 위하는 선생이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공작가의 팔아먹기 좋은 재산 취급을 받았던 로벨리아의 과거 시절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니.
‘하긴, 그 블란쳇 공작가에서 붙여준 예법교사였는데 어련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말문이 막힌 거로 보이는 상대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만 비키는 것이 좋을 거야. 그대 때문에 폴로 경기가 잘 안 보이거든.”
그제서야 허스트 백작부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좋지 않게 보았던 시선들은 어느샌가 그녀에게 백안을 뜨고 있었다.
“듣고 보니 폐하의 말씀이 맞아.”
“얼마나 못났으면 과거의 제자에게 저런 취급을 받을까.”
한껏 숨죽인 듯했지만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들려왔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답게, 부인들의 시선을 등에 안고 기세등등했던 허스트 백작부인의 기세는 오간 데 없어졌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로 숨기며 작별의 예법을 취했다.
“이제 보니 간언을 드릴만 한 그릇조차 아니었군요. 실례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저와 황후 폐하의 사제로서의 연은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그대가 한 말 중 처음으로 반가운 소리인걸.”
백작부인은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한껏 세우며 꽁무니를 뺐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가 방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자각이 없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서 허스트 백작부인을 약 올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애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후 폐하! 정말 멋있으셨어요!”
“신문에서 볼 때보다 훨씬 멋있으셨어요!”
“정말 황홀했어요!”
놀라서 돌아봤더니 영애들이 아까보다 백배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폐만 끼쳤다고 생각했는데, 저희와 어울리시는 일이 즐거우시다니……. 저는 정말 행복해요. 이 이상 행복해질 수는 없을 거예요.”
심지어 어떤 영애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코까지 풀고 있었다.
“아니, 잠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아까 한 말은 영애들을 위해 한 말이 아니라…….”
내가 변명을 하려던 찰나였다.
“와아아!”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와 나는 정면을 보았다. 인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수십 개의 조로 나누어져 각자 경기를 하고 있었다. 하나 그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받는 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참가하고 있는 조였다. 보아하니 알렉산드로스가 골을 넣은 것 같았다.
“이번 게임 동안 황제 폐하께서 엄청난 활약을 하셔서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됐어요. 시간관계상 이번이 마지막 득점일 거예요.”
폴로 경기를 가장 열심히 보고 있던 영애가 귀띔해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게임은 곧바로 끝났고, 알렉산드로스는 말에서 내려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대가 무척이나 즐기고 있는 듯하여 기쁘군.”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돗자리는 네 개를 연이어 붙여놓고 수십 명의 영애들 사이에서 온갖 간식을 늘어놓고 먹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듯, 오로지 나만을 자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열심히 했는데, 내 활약이 그대의 마음에 들었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군.”
그러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다정할 뿐더러 기대감마저 담고 있어서, 내가 아무리 악녀라고 해도 그 기대감을 짓밟는 건 조금 꺼려졌다. 그래도 어쩔 수는 없었다. 안 본 걸 봤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죄송하지만 전 못 봤어요. 여기 계신 숙녀들과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거든요.”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실망한 것 같았다.
“뭐? 내가 7분 30초 동안 13번의 골을 넣었는데, 그중 한 번도 못 봤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말만 들어도 인상적인 활약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이 황제이니까 상대 팀이 좀 봐준 게 아니었을까요?”
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주변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 제일 주목을 받는 조는 바로 노먼이 참가한 조였다.
“지금 5분 지났는데, 슈워츠코프 공작님께서 10번의 골을 넣으셨어요.”
“그건 그렇고 공작님께서 이런 친선 행사에 참가하시는 건 처음 봐요. 사교활동은 전혀 관심 없어 하시는 줄 알았는데.”
영애들이 부연설명을 해주었고 나는 폴로를 하는 노먼을 보았다. 그의 새하얀 피부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꼭 말과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시네요. 정말 멋있으시다.”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의 기록을 깰 수 있을까요?”
영애들이 흥미로워하자, 나까지 같이 노먼의 경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옆얼굴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고 느낌과 동시에, 내 얼굴이 부드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어느샌가 내 옆에 앉은 채, 내 옆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내 경기도 안 봤다는데, 다른 남자에게 그 시선을 뺏길 순 없지.”
“뭐예요? 유치하게.”
“그대의 시선을 독점할 수만 있다면 난 백 번이라도 유치해질 수 있어.”
그렇게 속삭인 그는 내 눈앞에서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고는……. 쪽. 작고 다정한 온기가 내 입술 위에서 퍼져나갔다.
“……!”
그가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 정돈 금방 알 수 있었다.
“우와!”
“어머나, 세상에!”
영애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시녀들 역시 얼굴이 새빨개져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모두가 좋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 많은 귀족들은 이게 뭔 남사스러운 짓이냐는 듯 혀를 차며 자기들끼리 수군댔으니까.
‘이 인간이 진짜.’
알렉산드로스라면, 그런 주변의 반응 정도는 분명 예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날 민망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그래도 딥키스는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약간은 낫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건 간에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가줄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그의 팔뚝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나름대로 아프라고 때린 건데, 부끄러워서 힘이 별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알렉산드로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이 쿡쿡 웃는 그의 얼굴이 얄미워서, 나는 홱 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한편, 로벨리아와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오전 시간. 아이샤와 대신관은 사람들로부터 약간 동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황비 전하.”
대신관이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하, 평정을 유지하세요.”
그의 말처럼 아이샤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은 애써 정돈했으나, 안색은 창백했고, 무엇보다 치마폭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두 손은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어떻게 평정을 유지하죠?”
아이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대신관은 그녀를 위로하거나 진정시키기는커녕, 그녀에게 시선을 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평정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쪽을 보지 마세요.”
“…….”
“본 것을 못 본 척하고 들은 것을 못 들은 척하고.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눈과 귀를 가려버리고. 그것이 바로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덕목입니다.”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태연한 그의 말투. 그런 그의 태도에 아이샤는 신물이 날 것 같았다.
“……알았어요, 대신관님.”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이 말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대신관의 말대로, 차라리 눈을 뽑고 고막을 찢어버릴 수 있다면 평온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오후의 일정은 조정 대회였다.
“오전에도 운동을 했는데 오후에도 운동이라고요? 참 대단들 하네요.”
“분명 재미있을 거야. 조정은 수도 사교계의 인기 스포츠라서 귀족 남성이라면 다들 어릴 적부터 교양으로 배우거든.”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그런데 그대는 정말로 보러 가지 않을 생각인가?”
“네. 저는 오전에 이미 기력이 쏙 빠져서……. 젊은 영애들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나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분명 싫지는 않았지만, 아니 솔직히 조금 즐거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기에, 그런 일을 하루에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그대는 지금부터 무엇을 할 생각인가?”
“다들 보트를 타러 호수에 갔을 테니, 저는 반대로 숲에 가볼까 하고요. 혼자 산책이나 할래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숲이 있는 토파즈궁의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당신은 왜 따라와요? 조정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그는 씩 웃으며 내 모자를 고쳐 씌워주었다.
“내 활약을 봐줄 그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나.”
“정말.”
“내가 따라가도 괜찮겠나?”
나는 잠깐 고민했다. 혼자 숲길을 거니는 여유를 즐기고 싶었던 것이기에 쫓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 여기 온 것도 빚을 갚으러 온 것이었으니까.’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귀찮게 하면 돌아가게 할 거예요.”
“말씀 받들어 모시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