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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즉석 팬미팅 (69/151)

69. 즉석 팬미팅2021.08.29.

그것은 알렉산드로스로서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일견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계산된 것이기에 언제나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이 빈틈없어 보인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그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로벨리아가 무릎에 식기를 올려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토록 빈틈 그 자체인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16549686547808.jpg‘대체 얼마나 피곤했던 건지, 알 만하군.’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자는 얼굴을 빤히 보다가, 접시에 빠질락 말락 하고 있는 로벨리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리고 식기를 치운 뒤,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러고도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어서, 그는 한참이나 로벨리아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았다. 대화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아도 다디단 시간이었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때는 왔다.

16549686547808.jpg“좋은 꿈 꾸기를.”

나직하게 중얼거리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이마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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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날 오전.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하늘은 청량하게 맑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의 가장 좋은 부분만 모아놓은 것 같은 날씨였다. 행사의 주최자인 알렉산드로스가 행사의 시작을 축하하는 짧은 연설을 하는 순서가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알렉산드로스가 다 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 역시 얼굴은 비추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귀족들의 앞에 나선 그 순간이었다.

16549686547823.jpg“꺄아악!”

어디선가 새된 환성이 들려와 나는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십 대의 어린 영애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모습이 보였다.

1654968654783.jpg‘알렉산드로스가 인기가 많구나. 하긴, 누가 봐도 잘생기긴 했지.’

그 정도로 생각한 나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연설을 한 뒤 첫 순서인 폴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마구간지기들이 마구간에서 근육이 우람한 말들을 이끌고 왔는데, 그 수만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았다. 남자들은 말을 타고 폴로 경기를 하고, 여자들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다과를 즐기며 구경하는 것이 이번 순서의 내용이었다.

1654968654783.jpg“대회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목 도모가 목적이니 무리하면 안 되네. 숙녀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알렉산드로스의 농담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잔디밭을 보았을 때는 이미 여성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었다.

1654968654783.jpg‘나는 친한 사람이 없으니까 시녀들하고만 앉게 되겠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내가 아니었다. 애당초 남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사람이었다면 악녀 콘셉트 따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돗자리를 깔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16549686547884.jpg“황후 폐하, 강녕하셨는지요? 혹시 제가 황후 폐하와 같은 돗자리에 앉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

16549686547884.jpg“안녕하세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도 곁에 앉아도 될까요?”

처음 보는 영애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게 이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이제 보니 아까의 그 십 대 어린애들이었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4968654783.jpg‘내가 대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진 거지? 그것도 이런 어린애들에게?’

1654968654783.jpg“음, 그 이전에, 그대들은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16549686547884.jpg“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오를레옹 자작가의 차녀 마릴린입니다.”

16549686547884.jpg“저는 해리스 준남작의 장녀 안나입니다. 황후 폐하에 대해서는 늘 신문에서 뵈었습니다.”

이름을 들어도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사교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던 나에게 이런 어린아이들과의 접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면 염치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티는 안 나도 낯선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편이다. 시녀들이랑 편하게 앉아 있을 생각이었던 나로선 모르는 사람들을 자리에 끼우는 건 약간 꺼려졌다.

1654968654783.jpg“그대들은 날 보았는지 몰라도, 나는 그대들을 오늘 처음 보는걸.”

16549686547884.jpg“아아…….”

16549686547884.jpg“여, 역시 곤란하시겠죠……. 실례가 많았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똘망똘망 기대로 가득 찬 눈을 빛내던 아이들이었는데, 내 거절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내가 못 할 짓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느낀 건 나뿐이 아니었는지 시녀들이 내게 와서 속삭였다.

16549686547884.jpg“폐하, 돗자리가 많이 넓은데 몇 명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16549686547884.jpg“맞아요. 굉장히 기대하고 온 것 같은데 너무 불쌍해요.”

1654968654783.jpg“으음…….”

결국 마음이 약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8654783.jpg“그래, 그럼 이번만 함께 앉는 걸 허락하도록 하지.”

16549686547884.jpg“네! 정말이신가요?”

16549686547884.jpg“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순식간에 그녀들의 눈에 반짝거림이 돌아왔다. 행여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이라도 됐는지 소녀들은 허겁지겁 내 돗자리 위에 짐을 풀었다.

16549686547884.jpg“이 바구니 제 거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16549686547884.jpg“어머, 얘. 거긴 내 자리야!”

16549686547884.jpg“아무리 그래도 새치기를 하면 안 되죠!”

몰려든 영애들로 인해 내 돗자리는 순식간에 가득 찼다. 시녀들이 자리를 비켜줘도 모자랄 정도였다.

16549686547884.jpg“아무래도 돗자리를 이어붙이는 편이 좋겠어요. 한 장은 이쪽에, 또 한 장은 저쪽에…….”

시녀 이레네의 조언에 영애들은 내 돗자리에 돗자리를 이어붙였고, 그렇게 나는 삽시간에 스무 명 정도의 어린 소녀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1654968654783.jpg‘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학교 선생님이라도 된 것 같네.’

상황 파악이 덜 된 내게 영애들이 수줍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16549686547884.jpg“황후 폐하, 제가 폐하를 생각하며 손수 만든 오이 샌드위치예요. 드시고 조언해주시겠어요?”

16549686547884.jpg“저는 까눌레를 좀 구워봤어요. 여태까지 만든 것 중에 제일 잘 된 것 같아요.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나는 영애들이 주는 간식을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이 뭘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맛이 있기도 했고.

16549686547884.jpg“늘 신문에서만 뵙다가 이렇게 실제로 만나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날아갈 것처럼 황홀해요.”

16549686547884.jpg“저도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16549686547884.jpg“저는 오늘을 달력에 기록해놓고 기념일로 만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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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들 이러는지 영문을 몰라 정말 당혹스러웠지만, 그녀들의 호의와 관심은 분명 진심인 것 같았다.

1654968654783.jpg“그러니까…… 영애들은 나에 대한 기사를 읽었단 말이지?”

16549686547884.jpg“네! 황후 폐하의 활약에 대한 기사는 전부 다 읽었어요! 노예 상인들에게 벌을 주신 일이나, 부정한 짓을 하던 후작을 물리친 일이나, 살롱을 성공으로 이끄신 일이나 익명의 후원에 재단 설립까지……. 전부 다요!”

16549686547884.jpg“저는 황후 폐하에 대한 기사는 전부 다 스크랩 했어요. 사건에 대한 기사와 패션에 대한 기사는 따로 모으고 있어요. 제 소중한 보물이에요.”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됐다. 내가 이혼당하기 위해 했던 온갖 막 나가는 일들을 이 영애들은…… 뭐랄까…… 아주 멋있고 당당한 황후가 할 법한,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1654968654783.jpg‘그런데 난 별로 좋은 의도로 그런 일들을 한 게 아닌데. 게다가 알렉산드로스가 한 일이나 과장도 좀 섞여 있는 것 같고.’

어쨌든 날 좋게 봐주는 것이니 싫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영애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 민망해졌다.

1654968654783.jpg“음, 영애들이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영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특히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황후와는 거리가 멀지.”

16549686547884.jpg“그럴 리가요! 황후 폐하는 저희의 우상이세요.”

16549686547884.jpg“전 정말로 황후 폐하를 닮고 싶어요.”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졌다. 이런 대화를 분명 다른 사람들과도 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시녀들이라든가, 노예들이라든가…….

1654968654783.jpg‘이미 콩깍지가 씌어서 내가 뭐라고 말해봤자 역효과겠지?’

그때였다.

16549686547884.jpg“제국의 하나뿐인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까 영애들이 했던 약식 예법과는 달리 깍듯한 정식 예법으로 인사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50대 정도의 귀부인이었는데, 해를 등지고 내 앞에 서서 나의 눈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1654968654783.jpg“그대는 누구지?”

16549686547884.jpg“허스트 백작가의 릴리아나입니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아직 어린 영애이셨던 시절, 두 해 정도 예법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로벨리아의 예법 교사를 했다는 주장대로 그녀는 무척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깡마르고 키가 컸는데 자세가 하도 곧아서 더 커 보였고, 광대는 툭 불거졌으며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16549686547884.jpg“이런 말씀 드리기 황공하오나, 과거의 인연을 보아 간언을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1654968654783.jpg“이 좋은 날에 간언이라? 어디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들어나 보지.”

16549686547884.jpg“다름이 아니고, 뭇 제국인들의 어머니이신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어린 영애들과 자리를 함께하시는 모습이 심히 보기 좋지 않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귀부인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곁눈질로 훑었다. 허스트 백작부인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귀부인들, 특히 나이가 많은 귀부인들이 이쪽을 보면서 좋지 않은 얼굴로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영애들 역시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들은 불안 어린 눈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치를 살폈다. 그녀들은 자기들 때문에 내가 안 좋은 시선을 받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는 걸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절로 비틀려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1654968654783.jpg“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내가 어린 영애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품위와 격이 떨어진다?”

16549686547884.jpg“예, 그렇습니다. 영애들과 함께 있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셔서 저희 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시지요. 그것이 황후 폐하의 명예와, 더 나아가 황실의 명예를 위한 길입니다.”

백작부인이 엄격하게 말하자 영애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16549686547884.jpg“폐, 폐하. 정말 죄송해요. 저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16549686547884.jpg“폐하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녀들은 황급히 짐을 챙겨 들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앉은 채로 한 팔을 들어 올려 그녀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1654968654783.jpg‘어차피 이젠 악녀가 되어 이혼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은데 괜히 깽판 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내 캐릭터가 망나니라서 참 다행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스트 백작부인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키가 꽤 큰 편이었다.

1654968654783.jpg“황실의 명예란 게 내가 어린 영애들이랑 좀 어울린다고 망가질 정도로 연약하다면 그냥 망가뜨려도 상관없지 않나?”

16549686547884.jpg“폐하!”

1654968654783.jpg“부인들이나 영애들이나 다 똑같은 내 국민이야. 그런데 다가오는 영애들을 외면하라니, 그게 그 잘난 황후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할 일인가?”

16549686547884.jpg“폐하,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1654968654783.jpg“그대야말로 내 앞에서 말조심해, 허스트 백작부인. 어린 영애건 귀부인이건 누구건 간에 내가 누구와 어울릴지는 내가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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