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혼인한 지 4년인데 후손이 생기지 않다니2021.08.26.
가뜩이나 두 사람 사이의 계획을 알고 있는 케일럽이니, 더더욱 그랬다. 로벨리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케일럽으로서는 알 수 없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영락없이 두 사람이 사이가 좋고 대화가 잘 통하는 것으로 보였다. 질투에 눈이 먼 그는 두 사람의 사이좋은 대화를 조금이라도 방해하고 싶었다. 그는 시녀들의 눈을 피해 몰래 호숫가의 개구리에게 마법을 걸었다. 남자 손바닥만큼이나 크고 칙칙한 초록빛을 띈 그 녀석은 케일럽의 명령에 따라 폴짝폴짝 뛰더니 노먼의 구두에 찰싹 달라붙었다.
“꺄악! 공작님, 개구리가!”
시녀들이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노먼은 구두를 바닥에 탁탁 털어 개구리를 떼어내려 했지만, 마법에 걸린 개구리는 힘이 어찌나 센지 잘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휙! 어디선가 새하얀 빛이 날아들더니 개구리를 꿰뚫었다. 개구리는 그만 개굴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빛이 날아든 방향을 보니, 대신관과 아이샤가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공작님, 개구리 하나 못 떼어내실 줄은 상상도 못 한걸요.”
황비궁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양 아이샤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한참을 황비궁에서 두문불출하던 아이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로벨리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알렉산드로스에게 건 조건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황비도 반드시 함께 참가하는 거로 해주세요.’
‘그거면 되겠나? 더 어려운 걸 부탁해도 좋은데.’
‘저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지나치게 귀찮게 하면 그에게 아이샤를 붙여주고 도망치는 것이 로벨리아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이샤가 행사에 참석하니 대신관 역시 따라왔다. 아이샤의 보호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후 폐하,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말씀 나누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인연이 닿다니, 아무래도 신의 안배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대신관 역시 살가운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로벨리아는 약간 떨떠름했다. 그녀는 대신관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왜일까? 그는 친절하고, 싹싹하며, 신앙심이 강했으며, 심지어 대단히 잘생기기까지 한데 말이다.
‘아마 아이샤의 연고자이기 때문에 그렇겠지.’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한 로벨리아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했다.
‘평소의 캐릭터대로 막말을 해서 쫓아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러기에 적합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악녀짓을 해서 이혼당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그는 국빈이기에 황후인 그녀가 그를 막 대하면 외교 문제가 일어날 수 있으며, 또 노먼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노먼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 그에게 괜히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로벨리아는 그냥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아, 네. 그러셨어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신의 뜻일지언대,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그러죠.”
결국 로벨리아와 노먼, 대신관과 아이샤는 함께 호숫가를 거닐게 되었다.
“황후 폐하의 명성은 높고도 높지만, 그중 제가 제일 감명 깊었던 것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행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 같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신의 길이기도 하지요.”
원래 수다스러운 편인지, 아니면 이번에 유난히 들뜬 건지 대신관이 대부분의 대화를 주도했다. 하다못해 아이샤가 귀찮게 하지 않으려나 했는데, 그녀 역시 웬일인지 이번에는 조용했다. 아마 대신관이나 노먼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의 행보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바로 일 년 전이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네. 뭐, 그동안 세상 풍파를 많이 겪었거든요. 사람이란 원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잖아요?”
로벨리아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그러셨군요. 일 년 전부터 황후 폐하의 성격, 취향, 가치관,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들었지요. 마치 황후 폐하께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소문마저 들었습니다.”
기분 탓이었을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라는 말을 은근히 강조하는 듯한 것은. 로벨리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차원 이동 현상은 성국이 관할하는 거로 알려져 있지. 그렇다면, 나 같은 빙의자에 대해서도 대신관이라면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방법 역시,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 그녀가 대답하지 않고 상대를 빤히 보자, 대신관은 소탈한 얼굴로 웃었다.
“이런, 객쩍은 소문을 가져와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실 일이 많으실 텐데……. 다름이 아니고, 딱 신의 뜻을 그대로 행하신 행적을 보아하니, 종교적 깨달음이라도 얻으셨던 게 아닌가 하고요.”
이건 또 뭔 소리람. 로벨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나 로벨리아는 보지 못했다. 그녀의 등 뒤로 대신관과 아이샤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그 순간, 이 자리에 또 한 명의 손님이 나타났다.
“로벨리아, 여기에 있었군.”
그는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짐만 풀고 바로 로벨리아를 찾아가려 했으나, 수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전부 물리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로벨리아의 방에 도착하니 그녀는 이미 노먼과 산책을 간 후였고, 그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가 황급히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보고 싶었어요!”
주변인들이 예를 갖추고, 아이샤가 반갑게 인사하는 동안 로벨리아 역시 가벼운 묵례를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황후 폐하.”
“그래요, 저도 즐거웠어요.”
알렉산드로스가 나타나자 적개심을 감추지 못하던 노먼은 결국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보고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에게 말했다.
“내가 없어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했군. 나 없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야.”
약간의 질투가 섞인 투정에, 로벨리아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황제 폐하, 안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대신관이 끼어들었다.
“아시겠지만 제가 짧은 시간 동안 제국어를 주로 가르쳐드리느라 황비 님께 궁내부의 업무는 거의 가르쳐드리지 못해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신경 써서 일부러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로벨리아는 문득 대신관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아이샤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았다. 마치 친오빠나 가족처럼.
‘약간 부럽네. 다른 세계에 와도 저렇게 아껴주는 가족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건.’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역시 대신관은 아이샤를 진심으로 위하니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 그럼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려나.’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아이샤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돌아가는데 협조할지도 몰라.’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를 알렉산드로스가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후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이제 그만 객실로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어.”
“그래야겠어요.”
그 말을 하자마자 하품이 나와서 로벨리아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얼굴로 보며 쿡쿡 웃은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내가 데려다주도록 하지.”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저와 성녀님은 좀 더 산책을 할 생각입니다.”
좀 더 붙잡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대신관과 아이샤는 쿨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 두 사람은 함께 로벨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위한 저녁 식사를 방으로 내올 것을 지시했다.
“오늘 그대가 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말고 푹 쉬도록 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군.”
“그러시다면 사양 않고.”
로벨리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 누웠다. 발라당!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진짜로 편하게 누웠다. 예의범절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편히 쉬라고는 했지만 설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편히 쉴 줄은 몰랐던 알렉산드로스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런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는 나도 참 중증이군.’
알렉산드로스는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거 알고 있나?”
“뭘요?”
“비서관이 요즘 난리도 아니야. 혼인한 지 3년, 아니 이제 4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후손이 생기지 않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말이지. 심지어 나에게 씨가 건강한지 진찰까지 받게 하더군. 아,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진찰 결과 내 씨는 무척 건강하니까.”
“그 비서관이요?”
로벨리아는 항상 알렉산드로스의 곁에 있는 나이 든 비서관의 모습을 떠올렸다.
‘엄격하고 직업의식이 투철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바가지까지 긁을 줄이야. 하긴 황족의 자손 생산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테니까 당연한가.’
“그래, 로버트 말이지. ”
“근데요?”
로벨리아의 천장만 보던 시야 안에 그의 능글맞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냥, 그대가 그렇게 흐트러져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군.”
“으으!”
로벨리아는 질색하며 일어나 앉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저녁 식사가 나오고, 로벨리아가 식사를 하는 도중에 알렉산드로스는 또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 그대 사이의 아이, 참 예쁠 것 같지 않나?”
“큽!”
로벨리아는 먹던 스프를 반쯤 뿜을 뻔하고 황급히 물을 들이켰다.
“갑자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냥. 나는 아이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와 그대 사이의 아이라면 귀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로벨리아는 황급히 남은 식사를 끝마치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어휴, 됐네요. 꿈 깨세요.”
알렉산드로스는 턱을 괴고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문득 아까 본 풍경을 떠올렸다. 로벨리아와 노먼이 함께 있던 그 모습.
‘둘이 함께 호수를 거닐며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녀에게 직접 물어봤다가는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리라.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질투심을 삭힌 뒤 알렉산드로스가 문득 말했다.
“로벨리아.”
하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든 알렉산드로스의 시야 안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로벨리아의 모습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