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사교 시즌2021.08.22.
아이샤가 무언가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대신관이 말했다.
“제가 아무리 조력한다 해도, 도움받는 사람이 정도 이상으로 무능하다면 그 의미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계약을 하나 더 하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대신관의 말에 아이샤의 얼굴에서 핏기가 또 한 번 가셨다.
“계약이라면…… 대가는 뭐죠?”
그녀의 목소리가 주체 없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챈 건지, 대신관은 만면에 비릿한 미소를 띠웠다.
“영혼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 분’께서는 언제나 배가 고프시거든요.”
“…….”
아이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대신관은 여유로운 얼굴로 빙긋 웃었다.
“고민이 되시나 보군요. 이해합니다.”
그는 마치 유혹하듯 아이샤의 귓가에 바짝 다가왔다. 그의 고운 입술이 달싹이며 뱀과 같은 말을 속삭였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살아 있을 때 그대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대로 황후에게 밀려 신의 곁으로 가게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대신관의 독사와 같은 말이 아이샤의 마음을 흔들었고,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대신…… 저를 반드시 황후로 만들어주셔야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두 사람은 계약을 행했다. 그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약을 마친 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이샤에게 대신관이 말했다.
“그 황후가 다른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셨죠. 수상스럽기 짝이 없군요.”
“하, 하지만. 제가 정말 철저하게 조사해보았는데, 로벨리아가 다른 세계에 대해 알게 된 원인으로 보이는 일이 전혀 없었어요. 제 생각에는, 역시 로벨리아가 다른 세계의 요리를 만들어낸 건 우연이 아닐까 싶어요.”
아이샤는 행여 다시 맞기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변명했다. 하지만 대신관은 가벼운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제 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제 생각에는……. 황후 역시 다른 세계에서 온 차원이동자일지도 모르겠군요.”
“네? 하지만……. 로벨리아는 틀림없이 이곳에서 태어난걸요?”
“하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차원이동자가 존재한다면?”
대신관은 이 모든 일이 꽤 흥미로운 듯했다. 눈은 흥미로 반짝였으며,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몸은 그대로이지만 정신만 다른 세계의 인물과 뒤바뀐 차원이동자. 즉 ‘빙의자’가 바로 그녀의 정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성격과 취향이 바뀐 것도 어렵지 않게 설명이 되죠.”
“하지만……! 대신관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역사상 한 번도 기록된 적도 없고, 차원이동자가 생긴다면 분명 신탁이 내려왔을 텐데…….”
“물론 지금껏 역사상 ‘빙의자’가 기록된 적은 없었지만, 그것이 뭐가 이상한가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관의 눈은 기묘할 정도의 이채를 띠어서…….
“저와 그대와 같은 존재도 이 세계에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을.”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 악마와 같은 속삭임을 듣는 순간, 아이샤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사교 시즌 역시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영지에 내려가 있던 귀족들이 속속들이 수도로 모여들었다.
‘벌써 일 년이라니.’
창밖의 초여름 풍경을 구경하던 로벨리아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오게 된 것도 작년 여름이었지. 처음 이혼을 하려고 했을 때는, 길어봤자 삼 개월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일 년 동안이나 이혼을 못 할 줄이야.’
그냥 이혼을 못 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사교 시즌이 가까워지니 수도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다. 은행, 박물관, 경마장 등의 각종 개관식, 단체 출범식, 유망인들의 무도회, 자선 바자회……. 그 리스트는 끝도 없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알렉산드로스가 자꾸만 그런 곳에 로벨리아를 끌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황제이니 온갖 행사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굳이 날 데리고 다닐 건 뭐람?’
지금껏 로벨리아는 이혼을 한다는 이유로 황후가 참석해야 하는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진 마음의 빚이 있었으니까.
‘빨리 이 빚만 다 갚고 그때부터는 진짜로 다 던지고 놀아야지. 외국어 공부도 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할 일이 많단 말이야.’
그러던 와중이었다. 로벨리아가 모든 빚을 이자까지 쳐서 한꺼번에 지불할 기회가 생긴 것은.
“그대도 알다시피, 사교 시즌의 시작은 황실이 끊는 것이 관례지.”
사교 시즌의 공식적인 시작을 앞두고,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에게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했다.
“행사의 준비를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니야. 다만, 함께 행사에 참석해주었으면 좋겠군. 틀림없이 그대에게도 즐거운 행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네.”
듣자 하니, 상당히 규모가 크고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행사인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이번 행사까지만 참석해주고 지난번 위로받은 빚을 갚는 건 종료하는 거로 할까.’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은 바로……. *** 카스티야 제국에서,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의 테마는 매년 바뀐다. 올해의 경우, 옆 도시의 ‘토파즈 궁’이라는 이름의 별궁에서 2박 3일동안 이어지는 파티가 메인 테마였다. 호수가 딸린 별궁인 토파즈 궁을 중심으로 뱃놀이, 스포츠대회, 피크닉, 사냥, 낚시, 바베큐파티 등의 레저를 즐기는 것이다. 황실 사교 시즌의 시작 행사는 언제나 뜨거운 인기를 자랑했고, 올해 역시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 중 무려 삼 분의 일에 가까운 숫자가 참석 의사를 알려왔다. 수천 명에 달하는 귀족들이 옆 도시로 향하는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크고 작은 마차, 그들을 따르는 시종과 시녀, 하녀와 기사들, 인력거와 가마로 이루어진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져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들이 마차를 타고 토파즈 궁까지 가는 데에만 만 하루의 긴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행렬의 대부분이 토파즈 궁에 도착하자……. 토파즈 궁 근처의 마을은 전에 없이 북적거리게 되었다.
“신선한 샌드위치, 도시락, 냄비 요리 팔아요!”
“토레스 여관은 이쪽입니다! 귀하신 손님들을 위한 특실 구비!”
상대적으로 유망한 귀족들은 토파즈 궁의 객실에서 묵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귀족들은 마을에서 묵기 때문이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귀족들은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나와서 서로를 탐색하며 사교활동에 애썼지만……. 로벨리아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공식 일정은 내일부터니까. 오늘은 여독을 풀기 위해 푹 쉬어야겠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폐하.”
시녀의 말에 로벨리아는 내심 알렉산드로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손님의 정체는 바로 노먼이었다.
“어서 와요, 노먼.”
로벨리아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고, 노먼은 예를 갖춰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간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전에 부탁하셨던 일로 다난해서 연락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고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벨리아는 해외 도피라는 큰일을 맡기게 되어 노먼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로벨리아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쩐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왠지 그를 배신한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알렉산드로스에게 위로를 받았기 때문인가? 하지만 노먼이 내 연인도 아닌데.’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서 그녀는 일부러 더 부산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손님을 위해 다과를 내오렴. 아, 그래. 안티안 왕국산 초콜릿이 좋을 것 같구나.”
“마음은 무척 감사합니다만, 저는 황후 폐하와 함께 방 안에서 다과를 즐기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일인가요?”
무심코 물은 로벨리아는 깜짝 놀랐다. 노먼이 약간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함께 토파즈 궁의 호수를 구경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함께 토파즈 궁에 딸린 호수가를 산책하게 되었다. 토파즈 궁이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여름 하늘처럼 새파란 궁전.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와, 궁전의 뒤로 이어진 침엽수림…….
‘정말이지 바캉스를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구나.’
아무래도 그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벌써 호수에 배를 띄워놓고 뱃놀이를 하거나, 낚시를 하는 귀족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산책하던 발을 멈추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로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젊구나…….”
노먼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봐줘야 십 대 후반으로 보입니다. 좋을 나이로군요.”
그녀의 혼잣말을 쓸데없이 진지하게 받는 노먼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로벨리아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토파즈 궁의 물그림자가 어린 호숫가를 거닐며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랑은 만나자마자 사생아니, 해외 도피니 하는 무거운 이야기만 나누느라 이런 가벼운 잡담은 처음 해보는구나.’
그리고 노먼과 처음으로 사소한 대화를 나눠본 결과 로벨리아가 깨달은 것은, 그가 참 말주변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성을 기를 기회가 없었던 그의 성장 배경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제껏 그의 친구가 아이샤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로벨리아로서는 그가 그러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의 지루한 대화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로벨리아 역시 사회 경험이 많아 노먼과의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대화를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은 다른 이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니까. 하지만 로벨리아는 금방 자신의 그런 생각에 흠칫 놀랐다.
‘미쳤나 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편, 로벨리아의 시녀들과 케일럽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의외로 두 분도 잘 어울리시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선남선녀라서 그런가, 의외로 잘 어울리시는걸.”
“그래도 황후 폐하의 진정한 사랑은 황제 폐하이시지만.”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케일럽은 두 사람의 등을 빤히 보았다. 일견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자…… 그의 뱃속이 불쾌하게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