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대신관의 방문2021.08.19.
“헉!”
블란쳇 공작과 백작이 일으키는 소란으로부터 한참을 떨어진 곳, 황비궁. 그곳의 소란이 들릴 리도 없건만 아이샤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검은 앞머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오고 있어…….”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아이샤는 느낄 수 있었다. 막대한 힘이 황궁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 강대하며, 두려운 힘. 그녀는 이 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신관님…….”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꾸욱 하고 다물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불길한 소쩍새의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 다음날. 궁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귀한 손님이 방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황후 폐하의 집안 사람들이 오더니, 오늘은 황비 전하의 집안 사람이 오다니 별일이네.”
궁인들은 자기들끼리 그런 식으로 수군거렸다. 대신관 일행이 황궁에 도달한 것은 석찬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렇게 친히 나와 환대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리도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어찌 환대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대의 집처럼 편히 지냈으면 좋겠군.”
황제와 황후는 물론, 한동안 황비궁에서 두문불출하며 나오지 않았던 아이샤까지 나와서 국빈을 맞이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와 친근한 듯 인사를 나눈 대신관은 이번에는 로벨리아를 향해 인사했다.
“황후 폐하께도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요세프 카프카 리히트만입니다. 요세프라고 불러주십시오.”
알렉산드로스와 아이샤의 국혼 당시 로벨리아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이 대신관과 로벨리아의 첫 만남이었다. 로벨리아는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그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요세프. 편히 지내시길 바라요.”
“마침 딱 좋은 때에 오셨군. 정 없이 로비에서 서서 인사하는 것은 그만하도록 하고, 이만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기지. 귀빈들을 위한 만찬을 마련해놓았으니.”
“좋습니다. 마침 허기가 지던 참이었습니다.”
로벨리아의 생각에, 타국의 지도자가 친히 찾아왔으니 그 대접은 매주 있는 금요 만찬회보다 훨씬 호화로울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것은 과소평가였다. 금요 만찬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벽을 온통 금으로 칠한 것처럼 번쩍이는 실내 장식과, 천장 높은 줄 모르고 뾰족하게 쌓여 있는 요리들. 춤을 추는 무희들과 관현악곡을 연주하는 연주가들. 이미 테이블에는 꽃 한 송이 꽂아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빈자리가 없었지만, 궁인들은 계속해서 더더욱 기름진 산해진미를 날라왔다. 술잔에는 한 모금 마시기가 무섭게 달고 향기로운 술이 채워지고는 했다. 고작 대신관 한 명과 그를 수행하는 수행원 열댓 명을 대접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연회였다. 대체 하루 만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준비한 건지 로벨리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환영 만찬은 소박하게 단 사흘 동안 이어지니, 그 기간 동안에는 하루도 빠지지 말고 친히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좋겠군. 또한 궁 내에 국빈을 위한 숙소 역시 마련해두었으니 식사 후 비서관의 안내를 받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저희를 위해 이렇게나 은혜를 베푸시다니, 틀림없이 신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로벨리아는 식사를 하면서도 줄곧 대신관을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대신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원작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지. 그래서 그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일단 겉보기에 그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성국이라는 국가의 중역이면서도 겸손하고 친절했으며, 예의가 바르고 속이 깊어 보였다.
“황비 전하, 이 오르톨랑을 드셔보시지요. 멧새 고기와 브랜디 향의 조화가 무척이나 감미롭습니다.”
“아, 대신관님……. 그럴게요, 감사해요.”
그는 특히 아이샤를 꼼꼼히 챙겼는데, 우아한 미남인 그와 아이샤는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꼭 잘 어울렸다.
‘원작과 이곳에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차원이동자는 곧바로 성국으로 인계되고, 신관들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
그러니 대신관이 아이샤의 스승이나 보호자 정도 될 것이라고 로벨리아는 어림짐작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이제껏 국가 행사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제껏 로벨리아는 이혼당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행사에 빠졌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런 위로를 받은 것이 바로 어제였으니까 말이다. 자기가 진 빚은 결코 잊지 못하는 로벨리아로서는 바로 다음 날국빈 환영 행사 같은 중요한 일을 모른 체 하기가 쉽지 않았다.
‘뭐, 그래봤자 빚만 갚는 것뿐이야. 노먼이 계획을 짜면, 난 바로 도망칠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황비 전하께서 이 대륙에 강림하신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성국에 적응하시기도 전에 카스티야 제국으로 적을 옮기시게 되어 어찌 지내실지 무척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역시 황비 때문이었군. 그럼 이곳에서 어느 정도 있다가 돌아가실 계획인가?”
“황비 전하께서 제국과 황비로서의 직무에 적응하실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곁에서 보좌해드리다가 반 년 후에 성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럼 그때까지는 계속 황궁에서 지내시면 되겠군.”
알렉산드로스가 흔쾌히 동조의 뜻을 표했다. 대신관은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폐하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 한편, 로벨리아가 대신관을 관찰하듯 대신관 역시 황궁 내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는 틀림없이 아이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는데.’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얼굴 아래에서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군. 황비와 황후의 관계가 역전되었어.’
지금 알렉산드로스는 특별히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차별대우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신관은 알 수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아도, 황제의 주의와 관심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쏠려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상대는 바로 황후, 로벨리아였다. 아이샤가 황비가 될 때만 해도 황제에게 오랜 시간 냉대당했다는 그 여자. 대신관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만찬이 끝난 뒤, 대신관은 국빈을 위한 별궁으로 안내받았다.
“황비 전하, 저와 함께 응접실로 가시지요. 오랜 시간 뵙지 못했더니 그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쌓여서 병을 앓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머, 좋아요. 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대신관과 아이샤, 두 사람은 별궁의 응접실로 갔다. 회포를 풀고 싶다는 이유로 시종 한 명까지 빠짐없이 물렸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아무도 그 의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쿵, 응접실의 마지막 문이 닫히자마자……. 친오빠와 여동생처럼 화기애애하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쩌다 일을 이토록 그르치게 된 건지 말해보세요.”
아까의 그 예의 바르고 다정한 남자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얼굴을 한 대신관이 말했다. 아이샤 역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 알고 오신 거 아니었나요?”
그녀는 의연해보이려 애를 쓰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 노력도 부질없이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대신관의 시선이 떨리는 손 위에 머물자 아이샤는 숄을 움직여 손을 덮었다. 대신관의 눈이 비웃듯이 가늘게 휘어졌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제가 없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답니다.”
그제서야 아이샤는 긴 이야기를 할 마음이 생긴 듯 목을 골랐다.
“그게…… 원래 알렉산드로스는 저에게 호감이 있었어요. 그건 분명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갑자기 이혼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혼이라고요? 황후가?”
“네. 당연히 거절을 당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이혼 빼곤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말에 갑자기 숙소를 황비궁으로 옮기더군요.”
자기가 말하면서도 어이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이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드레스와 보석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하고. 금요 만찬회에서 귀족을 발로 차고…….”
“…….”
“갑자기 저한테…… 황비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하더니, 일을 아예 손에서 놔버리더라고요.”
“그때까지 당신은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요?”
“네, 하, 하지만…….”
아이샤가 채 변명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짜악! 강렬한 파열음이 응접실의 공기를 울렸다. 아이샤는 뺨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요?”
대신관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그래서…… 알렉산드로스가 어쩔 수 없이 제게 업무 공부를 시키고는. 자꾸 그와 그 여자의 접점이 생기는 게 신경 쓰여서 살롱을 열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됐죠?”
“그, 그게……. 그, 그 여자 때문에…… 별로 반응이 좋진 않았지만…….”
짜악! 이번에도 가차 없는 손찌검이 이어졌다. 뺨이 부어오르면서도 아이샤는 쉬지 못하고 이제껏 있었던 일을 전부 대신관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야기 중, 아이샤의 실책이 나올 때마다 대신관은 그녀의 뺨을 때렸다. 마침내 아이샤의 이야기가 다 끝날 때쯤, 어느샌가 그녀의 두 뺨은 원래의 두 배 정도의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얼굴은 그대의 몇 안 되는 무기인데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대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라면.”
아이샤의 새빨갛게 부어오른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대신관이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대신관의 강대한 신성력에 닿자마자, 아이샤의 뺨의 붓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반성하실 일이 많군요.”
그가 말했다.
“특히, ‘회귀 이전을 알 수 있는 권능’을 주었는데도 이렇게나 밀려났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관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아이샤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이샤의 얼굴은 어느샌가 응접실에 막 들어왔을 때의 어여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는 이런 한심한 당신이라도 도울 거니까.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