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친정 가족들과의 재회2021.08.08.
“뭐? 나를 보호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시녀들은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그녀들은 내가 사랑받는 황후가 되기를 원하는 모양이니까.
“황궁 앞 광장에 600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축제가 아닐 때 이렇게 많은 수가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게 황후 폐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러했다고 하니, 비록 천것이지만 정말 대견하지 않나요?”
“천것이라니,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내가 저번에 말했지?”
“앗, 정말 죄송합니다.”
시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 이런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들이 가져온 소식에 나는 골머리를 싸맸다.
‘일반 백성들의 지지라니, 귀족들의 반대를 살 것을 기대하느라 그쪽을 잊고 있었네. 하긴 빈민 구제에 힘쓰면 백성들에게 지지받을 수밖에 없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나를 황후로서 지지하는 건 곤란했다.
‘어차피 이제는 내 여론을 나쁘게 해서 이혼당하는 건 포기했고, 노먼이 계획을 다 짜는 즉시 몰래 도망칠 생각이긴 하지만…….’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몰래 도망쳐버리면 실망하고 슬퍼할 사람들이 늘어난 셈이니까. 나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나로서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일이 이렇게 되니, 그동안 일부러 미뤄두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도 없이 도망치면, 처음부터 나를 잘 따랐던 이 아이들까지 실망시키게 되는 거겠지.’
나는 시녀들과 케일럽을 물끄러미 보았다. 다정하고 믿음직한 아이들. 언제나 나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던 이 아이들에게 나는 정이 꽤 들어버렸다.
‘그렇다고 미리 언질을 주기에는 위험해. 나와 노먼 외에 이 계획을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위험해지니까.’
내 인생이 걸린 계획이니만큼 위험 가능성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도 인생을 걸고 나를 도와주었는데 완전히 모른 체 하기에는……. 역시 너무 큰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깊어지는 내 눈빛을 눈치챈 것인지 시녀들 중 하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폐하, 왜 그러세요?”
“음,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업무에 관한 고민을 하느라. 하던 일 계속하도록 하렴.”
“네.”
시녀들은 다시 바삐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한 명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생각을 바꾸셨다니 기뻐요. 일부러 여론을 악화시켜서 이혼당하려고 하셨던 계획 말이에요. 이제 그 마음은 정말로 바뀌신 거 맞죠, 그렇죠?”
“으음…… 그, 그렇단다.”
‘이혼당할 생각은 바꾸었지. 대신 내가 도망칠 생각이지만…….’ 다른 시녀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저도 많은 사람들이 황후 폐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저도요! 사실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신데요.”
“너흰 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는 전혀 다정하거나 따뜻하지 않고, 굉장히 이기적이고 내 인생만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단다. 그러니 너희도 내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너희 자신을 최우선으로 챙기도록 하렴.”
“네~ 네.”
빙긋빙긋 웃으면서 대답하는 태도는 아무리 봐도 ‘에이, 폐하 또 그러신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여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희 지금 내 말 진지하게 안 듣고 있지?”
“에이, 설마요.”
“저희는 언제나 폐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어요.”
한편,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케일럽의 기색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날카롭고 또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케일럽, 무슨 문제 있니?”
“아니요,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폐하, 저는 그 어느 때에도 폐하의 편이며, 오로지 폐하만을 따를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곁에 있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세요.”
케일럽은 다소 갑작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꼭 그가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내 심장이 순간 덜컥이기까지 했다.
‘에이, 케일럽이 나와 노먼의 계획을 어떻게 알겠어. 기분 탓이겠지. 케일럽은 늘 조심스러운 성격이니까…….’
하지만 내가 어떠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시녀들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폐하, 저도요! 한평생 폐하를 모시고 싶어요.”
“저도요! 폐하만큼 존경스럽고, 본보기가 되시는 분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폐하, 마음도 바꾸셨으니 이제 정말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시녀들이 까르륵 웃으며 끼어들어 내게 마구 애정표현을 해댔다. 진지하게 한 말이 시녀들의 말에 묻히자 케일럽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아니, 내가 말했잖니. 너무 그렇게 나를 따르지 말고 너희의 인생을 돌보라니까? 나보다 좋은 사람이 분명 많을 텐데…….”
“아니요! 그런 사람은 정말 없어요.”
“폐하, 존경하고 사모해요!”
“저도요!”
나는 그녀들의 쉴 새 없는 애정 공세 앞에서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
*** 황궁 앞 광장에서 시위가 일어난 뒤, 알렉산드로스는 내 이름을 딴 빈민 구제 기금을 만들었다. 말이야 백성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기리기 위해서라지만 나를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그 시커먼 속이 훤했다. 내가 항의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를 기리기 위한 기금인데, 이름을 바꿔서 세울 수는 없지. 하나만 선택하도록 해, 로벨리아. 기금을 세우고 그대의 이름을 붙이겠는가? 아니면 전부 없던 일로 하겠는가?”
그래서 결국 나는 그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빈민 구제 기금이란 건 어쨌든 있으면 좋은 거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난 도망칠 거니까. 이젠 나에 대한 여론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그리고 내게 부담감을 얹어주려고 했던 거면 당신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지난 생 이후로 오로지 내 인생만을 생각하기로 결심했다고.’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로열 로벨린 기금이 생겨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정말이지 의외의 손님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만나서 무척이나 기쁘군, 블란쳇 공작. 그리고 블란쳇 백작.”
알렉산드로스는 붉은 와인이 찰랑이는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3년 전의 국혼에 대한 논의 이후 블란쳇 공작령에서 노고를 다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연회장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일흔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길고 긴 테이블에는 단 네 명만이 앉아 있었다. 바로 나와 알렉산드로스, 그리고 블란쳇 공작과 백작이었다. 그리고 블란쳇은 로벨리아의 결혼 전 성씨였다. 즉 블란쳇 공작과 백작은, 로벨리아…… 그러니까 나의 친정아버지와 오빠였다!
“먼저, 약조도 없이 찾아왔음에도 저와 아들을 이리도 환대해주셔서 무척이나 감사드립니다, 폐하.”
블란쳇 공작은 개국 공신가의 수장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이례가 없을 정도의 환대이긴 하지. 약조도 없이 황제를 만난다니,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나는 조용히 식사를 하며 생각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 두 사람에게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는 이유는…… 역시 내 환심을 사기 위해서인가?’
“저와 아버지가 찾아온 까닭은 다름이 아니고 그저 황후 폐하를 뵙기 위해서입니다. 어릴 때부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귀히 여기던 막내였는데, 이제 안 계시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요.”
“내 그 마음 이해하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귀히 여기던 막내를 3년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그리웠겠나?”
알렉산드로스는 친절한 얼굴로 말했지만 내 생각에 저건 비꼬는 말이었다. 그렇게나 귀하게 여기는 막내를 왜 3년이나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걸 말한 사람이 알렉산드로스라는 게 좀 에러인걸…….’
하지만 그의 그런 우회적 화법을 못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건지. 공작과 백작은 그저 하하하 웃을 뿐이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아비가 간만에 딸을 만나 뵈니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오래 만나지 못한 가족들이 만나 해후를 푸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군. 그럼 이제 나 말고 황후와 직접 이야기를 하지 그러나.”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까도 인사드렸지만 이 아비가 다시 인사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사실 나는 그들을 대하는 것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들은 로벨리아의 가족이지 내 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더군다나 로벨리아를 거의 팔아넘기다시피 한 장본인들인걸. 실제의 사정이나 관계가 어떨지 나는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선 인상이 그리 썩 좋진 않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 뭐. 보시다시피요.”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3년 만에 만난 아버지이자 개국공신 가문의 주인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예의라곤 없는 태도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이러는 데 익숙해서 그렇다 쳐도 저 두 사람도 웃어 넘기는건 의외네. 당황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였다.
“폐하,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만, 중요한 전보입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비서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
별로 신경 쓰지 않던 나로서도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심각한 기색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곧 그는 능숙하게 표정을 갈음한 뒤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손님들을 맞이하는 와중에 미안하지만 잠시 실례하도록 하지. 급한 연락이 와서 말이야. 내 시종장에게는 귀빈 대접을 지시해놓았으니 그대들은 그동안 최고의 시간을 보내도록. 금방 돌아오겠네.”
“예,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리도 즐거운 시간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과 백작이 굽신거리며 말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곤 어디론가 향했다.
‘결국 우리 셋만 남았군.’
약간 긴장이 됐다. 나는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이곳에서 읽은 책이나 신문에는 개국공신 가문으로서 위세가 대단했던 몇 대 전의 정보뿐 이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와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의 앞에서 로벨리아인 척을 하는 건 쉽지 않겠지. 그나마 내 캐릭터가 제멋대로라 다행이야.’
게다가 3년이나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관계가 엄청 좋은 편도 아닌 듯하고 말이다. 만약 로벨리아가 친정 가족들이랑 각별한 사이였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상대들이 먼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얼마 안 되는 정보라도 얻기엔 그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의외로 상대들은 나에게 바로 말을 걸지 않았다. 서로 무언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듯싶더니,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백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황후 폐하, 이 못난 오라비가 간만에 인사 올립니다. 그간 연락 한 번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아, 네. 괜찮아요.”
이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상대들의 얼굴이 약간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흰 행여 저희가 연락드리지 못한 이유를 황후 폐하께서 오해하고 계실까 걱정했습니다.”
“오해라고요?”
“어어, 예. 그, 그것이…….”
“영지에 있는 저희에게도 소식이 많이 들려왔습니다. 마치 황후 폐하가 바로 곁에 있는 듯했지요.”
백작이 버벅거리자 공작이 화제를 틀었다.
“정말 하나같이 놀라운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기지와 재치로 외국과 내통하는 세작을 찾아내셨다거나…… 사교계의 유행을 주도하신다거나…….”
“그리고 황제 폐하와의 금슬이 놀라울 정도로 좋다는 소식도 들었지요. 그리고 오늘 직접 뵈니, 그것이 거짓 없는 진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어찌나 귀하게 여기시던지, 표정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