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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황후를 폐하고 그 자리에 성녀님을 세우겠습니다 (61/151)

61. 황후를 폐하고 그 자리에 성녀님을 세우겠습니다2021.08.01.

능하다고 생각하는 표정 관리도 그 순간에는 소용이 없었다. 아주 일순간이지만 케일럽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1654968498674.jpg‘그 음흉한 황제가 폐하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염탐할까? 아니면 소동을 일으켜서 방해를…….’

그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안쪽에서 커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로벨리아의 안정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려던 참이었다.

16549684986744.jpg“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로벨리아를 향해 다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그는 고개를 돌려 문밖을 보았다. 그때였다. 두 남자의 눈빛이 서로 맞부딪친 것은. 벨벳처럼 부드러웠던 알렉산드로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케일럽을 마주하는 순간, 황실 기사단이라 해도 얼어붙을 정도의 냉기가 그의 눈에 감돌았다. 순간 움찔하기는 했지만 케일럽 역시 그에 뒤지지 않았다.

1654968498674.jpg“지지 않는 태양을 뵙습니다.”

노예로서 황제에게 갖추는 예를 표하면서도, 그의 갈색 눈에는 도전적인 적개심이 실렸다. 눈빛을 겨루는 순간 두 사람은 노예와 황제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였다.

16549684986744.jpg“…….”

알렉산드로스는 예를 갖추는 케일럽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관에게 말했다.

16549684986744.jpg“황후를 만났으니 이곳에 더 이상 볼 일은 없다. 가지.”

노골적인 무시의 표현이었다. 시녀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그런 태도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지만, 케일럽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이를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었다.

1654968498674.jpg‘그래, 지금 실컷 여유 부려 두라지. 결국 황후 폐하께서 선택하시는 것은 내가 될 테니 말이야.’

알렉산드로스는 비서관 로버트와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속내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16549684986744.jpg‘역시 신경이 쓰이는군. 로벨리아와 공작이 나눈 대화가 말이지.’

로벨리아가 다쳤을까 경황이 없어 잠시 잊어버렸지만, 원래 그가 그녀에게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16549684986744.jpg‘로벨리아는 공작에게 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 생각만 하면 가슴 속이 콱 하고 틀어막히는 듯했다. 무거운 돌덩이를 삼킨 듯한 기분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슈워츠코프 공작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전략적으로 뒤처져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닌, 정말로 뒤처지고 있는 듯한 느낌. 그자가 가진 로벨리아의 호의를 자신만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에 뱃속이 뒤틀렸다.

16549684986744.jpg‘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침묵을 깼다.

16549684986744.jpg“비서관,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의 동태에 대해 조사하도록. 특히, 황후와의 접점을 위주로.”

16549685015024.jpg“알겠습니다, 폐하.”

비서관이 대답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16549684986744.jpg‘역시 로벨리아를 포기할 수는 없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기필코 그녀가 나를 선택하게 만들고 말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계획이 필요했다. 그의 머릿속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계략들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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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685015039.jpg“황비 전하의 상태는 좀 어떠셔?”

시녀의 말에 다른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16549685015039.jpg“도무지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으셔. 식사도 아주 조금만 드시고…….”

16549685015039.jpg“지난번의 일로 정말 많이 상심하셨나 봐.”

시녀들은 걱정 어린 말을 주고받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문을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방문. 그것은 아이샤의 최측근인 시녀들에게도 거의 열리는 법이 없었다. 하루 세끼, 시녀들이 준비해주는 식사만이 출입이 허용되었다. 지난번, 아이샤가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한 피아노 연주회는 누군가의 술책으로 인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이샤에 대한 진실인지 유언비어인지도 확실치 않은 험담들이 신문에 실렸다. 요즘 호사가들은 만나기만 하면 아이샤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 와중에 케일럽이나 알렉산드로스와의 대화도 제대로 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자숙이라는 벌을 내리긴 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아이샤는 궁 밖으로는커녕 방 밖으로도 나오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것만 같았다. 시녀들은 슬픈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16549685015039.jpg“상심이 크시겠지만, 그래도 어서 방에서 나오셔야 할 텐데.”

16549685015039.jpg“황비 전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걸. 나도 그렇고.”

16549685015039.jpg“나도 마찬가지야.”

한편 시녀들의 대화는 문 너머로 고스란히 들리고 있었다.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아이샤는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16549685015068.jpg‘이런 망신을 당했는데 나더러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불 시트를 부여잡은 그녀의 하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 아래로 시트에 커다란 주름이 졌다.

16549685015068.jpg‘날 그리워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다들 나를 욕하고, 비웃고 있는데!’

아이샤가 처음부터 방에 틀어박힌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케일럽이나 알렉산드로스와 대화를 시도하려 방에서 나갔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샤는 궁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야 말았다.  

16549685015039.jpg‘이번에 황비 전하가 황후 폐하에 대한 여론을 조작하려 했다는 소문 들었어?’

16549685015039.jpg‘나도 그 얘기 하려고 했는데. 황비 전하, 정말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가식이었나 봐.’

16549685015039.jpg‘하긴 난 원래부터 좀 수상했어.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16549685015039.jpg‘하긴 그런 여자들이 좀 있지. 남자들 앞에서는 엄청 착한 척하다가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는…….’

  그 대화를 듣고 당당하게 화를 내거나 벌을 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샤는 그들이 자신에 비하면 한참이나 별 볼 일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사람의 앞에 나서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16549685015068.jpg‘모든 사람은 다 황후의 편이야. 그 여자한테 전부 놀아난 거야. 이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따위는 없다고.’

아이샤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미 너무 깨물어 피로 얼룩덜룩해져 남아나지 않는 손톱을 다시 한번 깨물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16549685040352.jpg《성녀님, 들립니까?》

16549685015068.jpg“누, 누구야?”

아이샤는 침대 위에서 거의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했다. 이 갑작스러운 목소리는 다름 아닌 그녀의 가슴팍에서 들려왔다. 그제서야 이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챈 그녀는 옷 속에 들어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아주 작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진주와 닮은 새하얀 구슬 형태의 펜던트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신령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16549685040352.jpg《성녀님, 저입니다.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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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5015068.jpg“대, 대…… 대신관님. 저, 저 여기 있어요.”

아이샤의 목소리가 떨렸다. 며칠 동안 방 안에서 숨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기고 쉰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16549685015068.jpg“무, 무슨 일이신가요? 이렇게 갑작스레 연락을…….”

16549685040352.jpg《다행입니다. 좀처럼 연락을 받지 않으시기에 성신석이 고장이 난 줄 알았지요. 목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군요. 마치 부렌산 대륙에서만 산다는 극락조의 노랫소리 같습니다.》

16549685015068.jpg“아, 저…… 그, 그게. 크흠! 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대신관님. 걱정시켜드린 듯해서 죄송해요.”

목걸이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아이샤의 얼굴은 누가 봐도 겁에 질리고 불안정해 보였다. 하지만 목걸이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상대는 그녀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16549685040352.jpg《잘 지내고 계시다고요? 정말입니까?》

16549685015068.jpg“네, 정말이요! 화,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정말 아껴주세요. 다들 저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요. 어쩌면 제가 곧 황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대요. 그 여자를 밀어내고서요.”

16549685040352.jpg《…….》

대신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아이샤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16549685040352.jpg《성녀가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은 지고의 죄입니다, 성녀님.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믿을 수 없도록 차가운 그 목소리. 너무 두려운 나머지 이가 딱딱 부딪쳤다. 아이샤는 울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16549685015068.jpg“대, 대신관님……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저,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 저는 그저 대신관님의 명대로…….”

16549685040352.jpg《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대신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16549685040352.jpg《사실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연락했습니다. 제가 지금 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16549685015068.jpg“네? 뭐라고요?!”

16549685040352.jpg《제국에서의 성녀님의 행적은 대강 파악하고 있습니다.》

대신관의 말에 순간 아이샤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그러나, 대신관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6549685040352.jpg《저는 성녀님의 연고자로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황궁에서 머무를 것입니다. 그리고 성녀님을 성심성의껏 조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여자를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올바른 사람을 세울 것입니다. 바로 성녀님이시지요.》

16549685015068.jpg“정말…… 정말 그게 가능한가요? 정말이요?”

16549685040352.jpg《물론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니까요.》

대신관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아이샤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16549685015068.jpg“대신관님, 저 정말로 대신관님을 믿을게요. 대신관님의 말씀이라면 뭐든지 따를게요. 정말로 뭐든 할게요.”

그녀가 목걸이에 대고 절박하게 속삭였다. 아이샤가 절망에 빠진 이후, 그녀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이샤는 그 동아줄을 붙잡을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샤의 열정적이고 절박한 말투와 대조적으로, 대신관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49685040352.jpg《그것이 거짓 없는 진실이어야 할 겁니다. 아무리 저의 업무가 신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지만, 성녀님께서 노력하지 않으시면 별수 없으니까요.》

16549685015068.jpg“물론이죠! 제발 마지막으로 믿어주세요, 대신관님.”

16549685040352.jpg《뭐, 좋습니다. 한데, 뭐든 하겠다고 했지요? 당신이 망쳐놓은 일들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16549685015068.jpg“대가…… 라고요?”

아이샤가 되물었다. 목걸이의 펜던트에서는 지극히 사악하며 뱀과 같은 간교한 말이 흘러나왔다.

16549685040352.jpg《저와 계약을 하나 더 해야겠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을 증명해보시지요.》

  *** 그날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시녀들, 케일럽의 강한 주장으로 안정을 취하기 위해 푹 쉬었다.

16549685107429.jpg‘하긴 짐들이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내일 정리해도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휴식을 취한, 그다음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 식사를 하려는데 시녀들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16549685015039.jpg“황후 폐하, 큰일이 났습니다!”

16549685015039.jpg“신문에 황후 폐하에 대한 기사가 났어요!”

16549685107429.jpg“뭐라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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