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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그의 과거 (60/151)

60. 그의 과거2021.07.29.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를 공주님 안기로 데려간 곳은 침실이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힌 뒤 궁의를 불러 진찰하도록 했다.

16549684840678.jpg“다행히도 다친 곳은 전혀 없으십니다. 그저 조금 놀라셨을 뿐입니다.”

궁의의 진단에 알렉산드로스의 굳어 있던 미간이 안심한 듯 풀어졌다.

16549684840683.jpg“그럴 줄 알았어요. 거봐요, 이렇게까지 소란 피울 일이 아니라고 제가 그랬잖아요.”

로벨리아는 침대에 앉은 채로 타박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16549684840692.jpg“아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지. 이번엔 다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만일 다친 것이었으면 최대한 빨리 치료받아야 했을 게 아닌가?”

로벨리아는 그를 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알렉산드로스는 언제나 가면과 같은 여유를 휘감고 사는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그런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진지해 보였다. 그녀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16549684840683.jpg‘내가 왜 이러지, 가슴이 또 뛰잖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던 심장박동이 다시 한번 빨라졌다.

16549684840683.jpg‘아무리 남의 걱정을 받아본 적 없다지만 이 정도로 동요해서야……. 그것도 상대는 알렉산드로스인데.’

로벨리아는 자신이 동요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저 속이 검은 남자에게는 더더욱.

16549684840683.jpg“어쨌든 이번에는 다치지 않았죠. 그러니 더 이상 폐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더 매몰찬 말투로 내뱉었다. 차라리 그가 화를 내거나 방에서 나가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나가기는커녕,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16549684840692.jpg“앞으로도 그대가 다치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견디기가 어려운데 그게 실제라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에 닿았다.

16549684840692.jpg“그런데 어떻게 그대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금빛 눈동자에 묻어있는 것은 여유도, 호인인 척하는 가장된 웃음도 아니었다.

16549684840683.jpg‘저건 절박함이야.’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16549684840683.jpg‘무언가를 잃어본 사람이……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절박함.’

그것이 그의 가면 아래의 본모습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계략가, 뱀과 같은 혀로 사람을 손바닥 안처럼 가지고 노는 그가. 단 한 번도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 없던 그가……. 어쩐지 오늘만큼은, 소중한 걸 잃고 싶지 않은 애처로운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로벨리아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16549684840683.jpg‘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그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로벨리아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원작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력의 정점에 있는 남자, 대륙의 주인으로 불리는 그이지만, 처음부터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17번째 황비의 아들이었다. 17번째 황비는 아무런 권력도, 영향력도 없는 뒷방의 후궁이었다. 그런 후궁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역시 이름뿐인 황자에 불과했다. 황비는 언제나 알렉산드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16549684840678.jpg“네 재능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말렴. 능력은 철저하게 숨기고, 그 어느 때도 눈에 띄거나 돋보이지 않도록 해야 해.”

16549684840692.jpg“그건 왜입니까? 어머니.”

어린 알렉산드로스에게 황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16549684840678.jpg“아무런 권력도 없는 사람이 능력을 드러내봤자 정쟁의 희생양이 될 뿐이니까.”

실제로 선황은 노쇠했으며, 종교에 빠져들어 국정을 제대로 돌보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황좌를 놓고 많은 수의 황자와 황녀들이 다투었다. 후궁은 스무 명에 달했고 황자와 황녀는 마흔 명이 넘었다. 마흔 명의 권력다툼에 휘말리면 17번째 황비와 이름뿐인 황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모친의 가르침에 철저히 따르며 살았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자꾸만 튀어나오려 하는 재능과 야망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그저 숨죽인 채,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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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친모는 결국 제 명을 다 채우지 못했다.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종교에 심취한 그녀의 남편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그렇게 17번째 황비는 고독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 종교에 빠진 선황의 광기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국정은 방탕해져만 갔다.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한 황자와 황녀들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경계심이 적은 자, 마음이 조금이라도 무른 자부터 한 명 한 명 쓰러져 갔다. 곧 차기 황제 후보자들은 몇 명 남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들조차도 많은 타격을 입고 상처와 손실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경계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황자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모친의 사후에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나가던 그는, 절호의 때에 맞춰 정쟁의 상흔이 낫지 않은 황궁을 급습했다. 방심한 데다 극심한 타격을 입기까지 한 형제자매들은 그의 검에 단칼에 베여 쓰러졌다. 마침내 알렉산드로스는 친부인 선황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로벨리아로서는 이제껏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던 이야기였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이 아닌, 책으로 읽은 소설의 내용에 불과했으니까. 더군다나 이런 이야기를 실감하기에, 이제껏 그녀가 마주했던 그의 모습은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이었다. 하지만 바로 오늘, 그의 가면 속 눈을 마주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이야기가 가슴 저릴 만큼 실감이 났다.

16549684840683.jpg‘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잖아. 어차피 옛날 일이고, 이제 알렉산드로스와 나는 곧 남남이 될 예정인걸. 그런 그의 어린 시절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로벨리아는 냉정해지기 위해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16549684840683.jpg‘비록 비극적인 어린 시절이었다고 해도 그가 그저 불쌍한 황자이기만 했던 건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황위에 오르기 위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데. 그리고 로벨리아와 나한테 했던 일들을 봐. 저 남자가 얼마나 속이 검은 놈인지 몰라서 지금 이러는 거야?’

하지만, 뇌리에 새기기 위해 몇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한 번 현실처럼 느끼고 나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눈에 봐도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본 알렉산드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로벨리아의 뺨 위에 입을 맞추었다. 로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위기상 그가 키스를 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의 그런 얼뜨기 같은 표정을 본 알렉산드로스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16549684840692.jpg“그대가 싫어하는 일은 더는 하고 싶지 않군.”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6549684840692.jpg“이미 미운털이 잔뜩 박혔는데, 이 이상 더 밉보여서야 되겠나.”

그 말에 로벨리아는 다시 한번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중 그 어느 때보다도, 심지어 그가 키스했을 때보다도 더 가슴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다.

16549684840683.jpg‘정신 차려. 이건 흔들다리 효과야. 아까 위험한 일이 있었고 그가 막아주었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노력도 무색하게 오히려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로벨리아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두 사람 모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때 중 가장 평온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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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노먼이 처음으로 로벨리아를 찾아왔던 그 날.  

16549684840683.jpg“모두 나가 있으렴.”

  듣는 귀를 물려달라는 노먼의 요청에 로벨리아가 자신의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낼 때.  

16549684840683.jpg“너희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케일럽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대로 밖으로 나가는 척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그가 아니었다.  

16549684894366.jpg‘어쩔 수 없지. 황후 폐하께서 싫어하실만한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이건 폐하를 지키기 위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응접실에 도청용 벌레를 숨겨둔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의 사생아와 그가 갑자기 로벨리아에게 접근하는 이유. 게다가 로벨리아의 이혼을 위한 해외 도피 계획까지.

16549684894366.jpg‘솔직히 폐하께서 이혼을 위해 도망가시는 것은, 좋아. 그 재수 없는 황제만 떼어놓을 수 있다면 난 얼마든지 환영이지. 황궁이든 어디든 간에 폐하를 독점할 수만 있다면야.’

하지만 새로운 방해꾼, 슈워츠코프 공작의 존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16549684894366.jpg‘혹시 폐하께서 공작의 도움을 받으면서 마음이 흔들리시면 어떻게 하지? 젠장, 그렇다고 그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막을 순 없어. 그자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는 폐하를 해외로 도피시킬 수 없으니까.’

케일럽의 마법 재능은 분명 천재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와 그의 어마어마한 군사들을 피해 해외까지 달아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혼자라면 모를까, 로벨리아와 함께 달아나는 것은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일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노먼 슈워츠코프의 영지와 지위, 군사력은 분명 로벨리아를 빼돌리기에 크나큰 도움이 될 터.

16549684894366.jpg‘젠장! 왜 난 공작으로 태어나지 못한 거야? 태어나도 하필이면 노예로 태어날 건 또 뭐람!’

초조한 듯 자신의 곱슬머리를 쥐어뜯던 케일럽은 마음을 굳혔다.

16549684894366.jpg‘역시 어쩔 수 없겠어. 공작을 이용하는 수밖에.’

언제나 강아지처럼 순하게 쳐져 있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16549684894366.jpg‘일단 공작의 계획대로 그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나가는 거야. 그리고 공작령에 입성하기 직전, 내가 폐하를 빼돌리는 거지. 내 능력으로 황궁에서 바로 도망치는 것은 어렵겠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빼돌리는 것 정도는 할만해. 공작은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무해하고 멍청한 어린애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정보의 우위에 있는 내가 훨씬 유리해.’

그의 갈색 눈동자가 계략을 품고 번득였다. 항상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는 로벨리아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표정이었다.

16549684894366.jpg‘앞서나가고 있는 듯한 기쁨을 지금 실컷 즐겨두라고, 공작. 어차피 최후에 폐하를 손에 넣는 것은 내가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쓸데없는 마법 수업을 듣고 황후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쩐지 궁 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함을 감지한 케일럽은 궁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16549684840678.jpg“황후 폐하께서 떨어지는 물건을 맞을 뻔하셨다. 지금 침실에서 궁의에게 치료를 받고 계신다.”

그 말에 깜짝 놀란 그는 허겁지겁 침실 앞으로 달려왔다. 침실 앞에는 로벨리아의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시녀들은 그렇게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닌가.

16549684840678.jpg“폐하께서 다친 데가 없으시대요. 지금 황제 폐하와 단둘이 계세요.”

시녀 이레네가 설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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