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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혹시 다친 데는 없나? (59/151)

59. 혹시 다친 데는 없나?2021.07.25.

로벨리아가 다른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도 자신하던 냉철한 이성은 열기에 끓어 사라졌다.

16549684692441.jpg‘황명으로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까? 공작을 내쫓고 자리를 파투 놓아버리면 될까?’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실낱같은 두려움은 있었다. 다름 아닌 로벨리아의 마음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가 자신의 의지에 간섭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가 이성을 잃고 심한 말을 한 탓에 그녀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직후였다. 다시 한번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녀와의 관계가 신조차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틀어지리라는 사실을 알렉산드로스는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당장 두 사람의 만남을 방해하는 대신, 두 사람의 만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공작이 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로벨리아를 찾아갔다.

16549684692441.jpg“슈워츠코프 공작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보군.”

노먼을 환송하던 로벨리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가벼운 미소를 걸치고 있었으며,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로벨리아는 알 수 있었다. 미소를 가장한 가면 아래에서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16549684692457.jpg“그렇습니다. 제법 즐거운 대화상대더군요. 예의도 있고 말입니다.”

우회적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예의가 없다고 욕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그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16549684692441.jpg“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는 황비의 최측근이지. 그대와 저자의 만남이 그대에게 어느 정도의 효용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군.”

16549684692457.jpg“오로지 효용 때문에 사람을 곁에 두시는 폐하께서는 알지 못하시겠지만,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에는 효율과 이해득실만이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건 그저 로벨리아의 지론일 뿐, 노먼이 그런 상대라는 뜻은 아니었다. 로벨리아가 노먼을 부른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효용에 가까운 이유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로서는 로벨리아의 그런 상대가 노먼이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16549684692441.jpg‘나는 그 어떠한 도움을 준다고 해도 내치더니, 공작은 어떠한 이해득실이 없어도 곁에 두고 싶다는 말인가!’

그 안의 어떠한 비열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꺾어놓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라도 쓰고 싶었다.

16549684692441.jpg“하지만 로벨리아, 지략가인 그대라면 이해하겠지. 나는 제국의 역사 속에서 은혜와 신의를 저버린 배반자를 서른 명도 넘게 댈 수 있어. 알다시피 그자는 오랜 시간 그대의 경쟁자에게 충심을 품고, 그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했던 이가 아닌가.”

이번만큼은, 그는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것은, 걱정이 아니다. 이것은 비겁함이며 비열함이다. 이제껏 그가 역사서를 보며 몇 번이고 비웃고 혀를 찼던 그런 한심한 모략. 이런 이간질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으면 좋겠다는 하찮기 짝이 없는 마음. 그런 유치한 감정에 비단처럼 매끄러운 혀로 금칠을 해가며 알렉산드로스는 말했다.

16549684692441.jpg“그대는 지략가이지만 따스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 그대의 호의가 어떻게 돌아올지, 그리고 그로 인해 그대가 어떤 상처를 받게 될지 생각하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로벨리아가 원작을 읽었으며, 노먼 슈워츠코프의 행적과 인성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그녀가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로벨리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16549684692457.jpg“저와 공작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바라시는군요.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제가 그를 정부로 삼아 황실에 추문을 끌어들일까 봐 그러시는 거죠?”

안 그래도 최근 그녀로 인해 다양한 추문이 불거졌던 황실이었다. 지금껏 알렉산드로스는 그에 꽤 잘 대처해서 대부분의 추문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돌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리라.

16549684692457.jpg“하지만 안심하셔도 좋아요. 전 그와 연애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알렉산드로스가 그녀의 말에 뭔가 반응을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노먼과 나누었던 대화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참이었다.  

16549684707555.jpg‘성공적인 도주를 위해서라면, 황제의 시선을 피해 공작령에 숨어계시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아까 전 응접실에서의 대화 중, 노먼은 이렇게 말했다.  

16549684707555.jpg‘공작령의 영지는 아주 험난한 산악지대인데다가 마물이 들끓기 때문에 황실 기사단도 좀처럼 접근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 있기에 이만큼 적합한 곳은 제국 내에 더 없을 겁니다.’

16549684692457.jpg‘하지만, 공작령으로 가는 길은 어떻게 하죠?’

16549684707555.jpg‘그에 대해서는 제가 계획을 수립해보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령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공작령에 숨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해외로 도피해야 할지, 만일 그렇다면 어느 국가로 가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로벨리아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가야 할 길에 관한 가닥이 잡힌 것만으로도 이미 한시름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16549684692457.jpg‘그래, 대한민국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제국에 떨어졌을 때도 어떻게든 적응했는데 다른 왕국에 간다고 적응을 못 하겠어. 나한테는 어마어마한 양의 재화와 보석도 있는데 말이야.’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했다.

16549684692457.jpg‘분명 난 어딜 가든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한적한 소도시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겠지. 힘내자.’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설득하려 하고, 로벨리아는 딴생각을 하며 대충 흘려넘기는 동안 두 사람은 황비궁의 실내로 들어섰다. 로벨리아에게는 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다. 아직 황후궁의 짐을 다 풀지 못한 탓이었다. 황비궁에서 지낼 때부터 어마어마하게 쇼핑을 해댔기 때문에 그 모든 짐을 제 자리에 놓으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로벨리아는 창고로 쓰는 방에 들어가 시녀가 건네는 물류 목록을 받아들었다.

16549684692457.jpg“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에메랄드 방에 놓고,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루비 방으로 옮겨놔.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전부 폐기하고.”

16549684707589.jpg“알겠습니다, 폐하.”

16549684692441.jpg“황제의 말을 배경음악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보는군. 아니면 노동요인가? 일하는 도중에 듣고 있으니 말이야.”

16549684692457.jpg“그러니까 누가 일하는 데까지 따라오라고 했습니까. 적당한 때에 눈치껏 돌아가셨으면 좋았을 것을.”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16549684692457.jpg“아 참, 이레네. 지난주 수요일에 샀던 옷과 보석들도 아직 여기 있지? 그건 별전(別殿)으로 옮길 예정이야. 사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려서 당분간 입을 일이 없을 것 같거든.”

16549684707589.jpg“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16549684692457.jpg“그래. 그리고 이 장식장은…… 아무래도 옆으로 치우는 게 좋겠어. 하인들이 지나다니는 동선을 막고 있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거대한 장식장의 문을 매만졌다.

16549684692457.jpg“심지어 장식장 위에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놨잖아. 불안해 보여.”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삐그덕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장식장 위에 끝도 없이 쌓여 있던 기물들이 쏟아졌다.

16549684707589.jpg“폐하!”

시녀 이레네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채 어찌하는 것보다 기물들이 로벨리아의 머리 위를 덮치는 것이 더 빨랐다. 와르르! 고철과 책이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허공에 먼지가 날려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

16549684707589.jpg“폐하! 괜찮으신가요? 이걸 어쩜 좋아. 폐하!”

이레네는 울먹이며 어찌할 줄 몰랐다. 주변을 부산히 오가던 하인들 역시 발을 멈추고 수군거렸다. 장식장 위에 고철, 책 등 무거운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으니, 그걸 온몸으로 받았다면 결코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먼지가 걷히고 눈에 들어온 모습은……. 로벨리아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알렉산드로스가 몸으로 그녀의 몸을 감싼 채 팔로 떨어지는 물건을 막아내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몹시 놀랐다. 아마 제국에 온 뒤로 제일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반쯤 입을 벌리고 상대를 보았다. 어느샌가 자신의 두 손은 그의 가슴팍 위에 올라가 있었다. 상대 역시 오로지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누운 채로,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먼지 냄새가 났고 두 손 아래에서 단단하고 뜨거운 살결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단단했으며 늘 그렇듯 진심 없는 얼굴만 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맥동했다. 쿵 쿵 쿵 쿵 하는 그 빠른 심장의 박동을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로벨리아는 자신의 심장 역시 그렇게 뛰는 것만 같았다. 알렉산드로스는 한숨을 쉬곤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샅샅이 살폈다.

16549684692441.jpg“다친 데가 있나? 감각이 없는 곳은?”

그제서야 로벨리아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발가락과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꼬물꼬물 사지를 움직였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16549684692457.jpg“어…… 없어요. 그, 고마워요.”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굳히고 있었으나, 로벨리아는 놀랍게도, 그가 안심한 것 같다고 순간 생각했다. 로벨리아는 이 상황이 상당히 민망했다. 수많은 사용인들이 둘러싸고 지켜보는 가운데 이런 꼴을 보였으니.

16549684692457.jpg“그, 그럼 다친 데도 없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것이…….”

그녀가 조심스레 상대의 어깨를 밀어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16549684692457.jpg“꺄악!”

어 하는 사이에, 몸이 둥실 떠올랐다.

16549684692441.jpg“다친 곳이 있는지, 없는지는 진료를 받아봐야 알겠지.”

귓가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벨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의 눈 바로 앞에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이 있었다. 그제서야 로벨리아는, 자신의 몸이 그의 양팔에 안아 들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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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4692457.jpg“내, 내려주세요!”

16549684692441.jpg“그건 곤란해, 로벨리아. 그대가 다친 곳이 없다는 확신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며 알렉산드로스는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로벨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이레네와 시녀들은 물론, 사용인들이 기겁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수의 시선들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로벨리아는 얼굴이 불타 없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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