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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저를 마음껏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58/151)

58. 저를 마음껏 이용하셔도 좋습니다2021.07.22.

제국으로부터 뱃길로는 한 달, 육지로는 석 달이 족히 걸리는 거리. 도시국가에 불과하지만 그 문화적 영향력만큼은 제국을 능가한다는, 온 대륙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 성국. 성국의 명분적인 군주는 그들이 섬기는 유일신 바르커스지만, 실질적인 지배자는 따로 있었다.

16549684494095.jpg“대신관님, 성녀로부터의 전언입니다.”

바로 대신관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대신관’이라는 직분을 들으면 흰 수염이 성성한 노인을 상상하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젊은이였다. 그것도 이십 대 후반밖에 되지 않은 아주 젊은 남자. 곱상한 얼굴선과 살짝 내리깔리는 속눈썹은 지독히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치렁하게 떨어지는 남색의 머리카락은 턱 바로 아래에서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콧대 위에 얹어진 안경, 그리고 오른쪽 귀에만 달아 길게 흘러내리는 귀걸이가 인상적이었다. 외견은 물론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지적임, 성스러움, 심지어 처연함까지도 느껴지는 미남자였다. 그것은 그가 지금 있는 곳이 빈민가의 뒷골목이며, 피투성이의 시신을 앞에 둔 상태였음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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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4494095.jpg“으아아앙, 아빠!”

16549684494095.jpg“제발 살려주세요! 그저 쥐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 옆에는 여인이 울부짖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대신관은 그쪽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신관이 내미는 물그릇 같은 것을 받아들었다. 흰 도자기로 되어 있으며 넓적한 형태의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세숫대야처럼 보이기도 했다.

16549684494119.jpg“……천하의 성녀님께서 상당히 고전하고 계신 모양이로군요.”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16549684494095.jpg“어떻게 할까요?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대신관을 따르던 신관이 복종의 의미로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대신관은 가볍게 입꼬리를 휘어올릴 뿐이었다.

16549684494119.jpg“더 이상의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이번에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 곱상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고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한 말. 그는 여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16549684494119.jpg“그대의 지아비는 반년 동안이나 반성국단체의 세작을 숨겨주고, 식량까지 공급했지만 그가 세작인 줄은 몰랐다고 증언했죠. 그 결과 처자식의 눈앞에서 신의 곁으로 떠나고야 말았어요.”

대신관은 여인을 보며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 누구라도 진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한, 심지어 신성하기까지 한 미소.

16549684494119.jpg“이제 제게 올바른 대답을 해줄 사람은 그대뿐이로군요. 충직한 신관들과 그대의 지아비가 겪는 지난한 마찰을 다시 반복하는 시간 낭비는 되도록 피하도록 해요. 그것은 신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닐 테니까요.”

16549684494095.jpg“…….”

16549684494119.jpg“그대의 지아비는 정말로 그가 세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나요?”

여인의 떨리는 눈동자가 대신관의 얼굴에 닿았다가, 이번에는 품 안에 있는 아이에게 닿았다. 그녀는 부르튼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16549684494095.jpg“사실……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의 지아비는 내심 반성국단체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세작을 숨겨준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16549684494119.jpg“그렇다면 세작의 현재 거처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겠군요?”

16549684494095.jpg“그건…… 그건 정말 모릅니다, 대신관님. 저는 늘 지아비의 그런 행동을 반대했습니다. 분명 가족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요. 전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대신관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16549684494119.jpg“그렇군요.”

그는 분명 그녀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여인의 가슴속에 터널 끝의 빛과 같은 희망이 번졌다.

16549684494095.jpg“그, 그럼 이제 저와 제 아이를…….”

16549684494119.jpg“저들 모두를 신의 곁으로 보내주도록 하세요.”

16549684494095.jpg“예.”

별안간 떨어지는 날벼락 같은 말에 여인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16549684494095.jpg“네? 아, 아니, 대신관님!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발!”

16549684494095.jpg“으아아앙, 엄마!”

16549684494095.jpg“대신관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니, 아이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제발……! 커헉!”

인간의 숨이 끊어지는 비참한 소리와 함께 폐건물은 적막에 잠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머리카락 한 가닥 흐트러지지 않은 신성한 자태로 걸어 나오며 대신관이 말했다.

16549684494119.jpg“성녀님 말입니다.”

16549684494095.jpg“예.”

16549684494119.jpg“아무래도 제가 직접 나서서 도와드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16549684494095.jpg“지, 진심이십니까? 대신관님께서…… 제국에 직접 가시겠다고요?”

당황해 되묻는 신관에게 대신관은 말했다.

16549684494119.jpg“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게 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녀님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16549684494095.jpg“…….”

16549684494119.jpg“성녀님은 신의 뜻을 전하는 사도. 신의 뜻에 가장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그분을 보좌하고, 도와드리는 것이 신관인 우리들의 의무죠.”

그렇게 말하며 대신관은 기도하듯 두 손을 포갰다. 그의 손목에 걸린 묵주가 차란차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주저하던 신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84494095.jpg“대신관님의 제국행 채비를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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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빠진 모발의 양이 좀 늘어난 것 같았다.

16549684575649.jpg‘내 인생이냐, 노먼에 대한 예의냐! 대체 어느 쪽을 골라야 하지?’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16549684575649.jpg‘그래. 내게 남은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노먼 말고는 알렉산드로스를 상대로 날 도와줄 사람이 없는걸. 이 방법이 아니면 난 결국 평생 황궁에서 살아야만 해. 알렉산드로스와 아이샤가 좋아죽는 꼴 구경이나 하면서 말이지.’

남의 호의를 이용하는 듯해 죄책감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 마음을 굳게 먹었다.

16549684575649.jpg‘정신 차리자. 막 이곳에 왔을 때, 아니, 가족들과 의절했을 때, 이젠 정말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걱정하기로 마음먹었잖아. 내 코가 석 자인데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로벨리아. 넌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라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에게 연통을 보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조만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답신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왔다.

16549684575649.jpg‘결국 이렇게 또 독대를 하게 되었네.’

지난번과 똑같았다. 지난번과 같은 응접실에, 나와 노먼 단둘. 내 시녀들과 케일럽은 여전히 노먼을 싫어하고 미심쩍어했지만 내 명령이니만큼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부채 너머로 슬쩍슬쩍 상대의 안색을 살폈다. 노먼은 차를 마시고 있었고, 나와 달리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태연해 보였다.

16549684575649.jpg‘원작의 서브남주, 아이샤의 절친과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독대를 두 번이나 하게 되다니…….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노먼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16549684575693.jpg“먼저 연락을 주시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뵙기 위하여 기별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감사드립니다.”

16549684575649.jpg“전혀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대를 위해 이곳에 초청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저의 필요를 위해 불러낸 것일 뿐이니까.”

16549684575693.jpg“황후 폐하께서 저를 필요로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묻는 노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감격이 묻어났다.

16549684575649.jpg‘아니, 필요로 한 건 맞는데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헛기침을 해 분위기를 환기하곤 입을 열었다.

16549684575649.jpg“지난번의 만남에서 그대는 그대의 기나긴 사연을 이야기해주었죠. 그때 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금의 거짓도 없겠죠?”

16549684575693.jpg“물론입니다. 조금의 거짓도 없음을 메스타포에 맹세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먼의 붉은 눈은 무척이나 맑아서 아무래도 연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원작에서도 누구누구처럼 간계를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기도 하고. 그의 단정한 얼굴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는 굳은 의지와 진심 어린 호의가 담겨 있었다. 그 사실에 안심하며 내가 말했다.

16549684575649.jpg“그럼 이번엔 제 차례예요. 제가 그대의 사연에 귀 기울였듯 그대 역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고맙겠군요.”

16549684575693.jpg“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노먼에게 나의 상황과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집안과 황실의 정략으로 인한 결혼, 3년 동안 황후로서 정당한 대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 아이샤의 등장과 이혼에 대한 결심, 이혼당하기 위해 이제까지 했던 노력과 알렉산드로스의 반응에 대하여.

16549684575649.jpg“……그때 전 깨달았어요. 황제 폐하의 마음을 돌려 이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전 진심으로 찾고 싶어요. 제게 어울리지 않는 황관을 벗어던지고 이 지긋지긋한 황궁을 떠나는 방법을…….”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황후가 이혼을 원한다니. 황후라는 어마어마한 직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황궁을 떠나고 싶어한다니! 이제껏 내가 했던 온갖 패악들은 화제가 되었어도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단 한 번도 소문이 나거나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16549684575649.jpg‘사실 일반적인 인식에 따르면 미쳤냐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노먼이 지나치게 정색을 하거나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면 수습을 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16549684575693.jpg“황제 폐하의 의사에 반해 이혼하시는 방법이라 하면, 해외로의 도피…… 가 제일 가망 있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는 몹시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상대의 반응을 보고 꺼낼지 말지 정하려 했던 도망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다니, 이건 오히려 이쪽에서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내가 놀랐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16549684575693.jpg“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황궁의 삼엄한 보안을 뚫고, 황제 폐하의 감시를 피해 달아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16549684575649.jpg“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네요. 당황스럽지 않으신가요?”

16549684575693.jpg“진지하게 들어달라고 하신 말씀…… 아니었습니까?”

노먼은 오히려 지금 한 말에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16549684575649.jpg“진지하게 들어달라고 한 이야기는 맞는데 진짜 진지하게 들어주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이상한 이야기잖아요. 이혼을 바라는 황후라니.”

16549684575693.jpg“분명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납득 불가능한 사연은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협력하겠습니다. 저에게는 공작령의 영지와 병력이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흔쾌하게 도와준다고 나서는 노먼의 태도에 오히려 이쪽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16549684575649.jpg“잠깐, 슈워츠코프 공작.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물론 제가 그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곳으로 부른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대의 호의에 대한 허락의 뜻은 아니에요. 이 일에 협력한다 해도 그대가 얻을 이득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그저…… 그대를 이용하는 것뿐이에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사라졌다. 역시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노먼에게 있어서 리스크가 너무 큰 일이었고, 메리트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아무리 내게 고마움과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런 것은 거절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허공을 불안정하게 떠돌던 나의 시선이 덜컥 멈췄다. 손이 잡힌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노먼은 내 손을 감싸 쥐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손등에 입 맞추었다.

16549684575693.jpg“마음껏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손등 위로 달싹이는 입술의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16549684575693.jpg“저는 폐하의 도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얼마든지 이용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상대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었다. 오로지 나를 향한 한결같은 신뢰와 다정함뿐이었다.

16549684575693.jpg“반드시, 제가 폐하의 가장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가 노먼을 불러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16549684623157.jpg‘역시 로벨리아는 공작에게 호감이 있는 건가?’

비서관의 보고에 따르면, 두 사람은 현재 황후궁의 응접실에서 독대하고 있었다. 사용인조차 전부 무르고. 아무리 비교를 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대할 때 그녀는 독대는커녕 우연히 마주쳐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싫어했다. 만나자고 먼저 청하기는커녕, 사사건건 그를 피하고 도망칠 기회만 노렸다.

16549684623157.jpg‘그런데 슈워츠코프, 그 자식은 이토록 가까운 곳에 두다니!’

배신감과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독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업무조차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만남에서 공작이 감히 입에 담았던 건방진 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16549684575693.jpg‘수도에서는 기혼자가 정인을 가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만.’

16549684575693.jpg‘저는 지금 황후 폐하께 진실한 태도로 임하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했듯이, 그 작자는 로벨리아에게 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속이 시커먼 놈과 한 방에서 독대라니! 어찌 황후가 되어서 이리도 무방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남편인 자신을 두고! 두 사람이 독대를 하는 동안 고민은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두려움은 확실한 하나의 생각에 도달했다. 이젠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로벨리아,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매력을, 오히려 노먼 슈워츠코프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겐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호감을 슈워츠코프라는 놈팡이에게는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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