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기혼자가 정인을 가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021.07.18.
“?!”
아이샤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한 발 물러선 그때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위압감이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뻗어 나와 그녀를 짓눌렀다.
“……!”
그 순간, 이세계에서 온 성녀라는 직위도, 대신관이 불어넣어 준 축복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저 본능적인 공포감만이 그녀를 잠식했다.
“흐…… 아!”
혀뿌리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절대적인 공포. 강한 동물을 앞에 둔 동물로서의 생리적인 두려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구나, 아이샤.”
선연히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는 순간 아이샤는 그저 살려달라고 하고 싶어졌다. 몸을 던져 울면서 그의 발밑에서 빌고 싶었다. 그저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아아…… 아…….”
그러나 이 압도적인 감각 앞에서 아이샤는 원하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부릅뜬 눈으로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뿐. 그런 아이샤에게 어떠한 자비심도 보이지 않은 채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너는 그녀를 대체할 수 없다. 그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발버둥을 치든 마찬가지일 거다.”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제발 그 살기 좀 거두어줘요.’
아이샤는 맹수의 그것처럼 휘황찬란한 두 금빛 눈을 보며 생각했다. 바로 그때.
‘어?’
아이샤는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졌음을 느꼈다. 그녀는 드디어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나보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 급히 말씀드릴 건이 있습니다.”
황제의 비서관이었다. 그는 황급히 뛰어오다가 알렉산드로스와 아이샤가 단둘이 있음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무슨 일이지?”
“황후 폐하의 일정에 대한 용건입니다.”
“그녀의 오늘 일정에 대해서는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다. 추가적인 문제라도 있느냐?”
“네, 그게…….”
비서관이 아이샤의 시선을 의식하는 티를 내자,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자신에게 귓속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황후 폐하께 슈워츠코프 공작이 약조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현재 사용인까지 전부 무르고 단둘이 독대 중입니다.”
“뭐라고?”
슈워츠코프 공작이라는 말에 알렉산드로스의 머릿속에는 제일 먼저 아이샤가 의심선상에 올랐다.
‘혹시 이번 건도 황비의 술수인가?’
그는 미심쩍은 시선을 아이샤에게 던졌지만, 그녀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연기에 도가 튼 그는 쉽게 알았다.
‘황비의 수작이 아니라면 더 미심쩍군.’
황비의 최측근인 공작이 사용인까지 전부 무른 채 로벨리아와 독대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술수고 수작이고를 떠나서…… 그냥 싫었다. 그 두 사람이 단둘이 한 방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끓고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고 비서관의 안내에 따라 몸을 돌렸다. 아이샤에게는 단 한 마디의 말이나 한 번의 시선조차 남기지 않은 채.
***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와 비서관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문을 두드리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응접실 문밖에 있었다. 이미 대화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작이 로벨리아의 앞에 무릎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로벨리아는 물론 주변의 모든 사용인들이 경악하고 있었으나 그런 것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궁 내에서 심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군. 슈워츠코프 공작, 북부지방에서는 남의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입 맞추는 것이 유행인가 보지?”
그가 가시 돋친 어투로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등장을 깨달았다.
“폐, 폐하……!”
시녀들은 마치 죄라도 지은 듯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고, 로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꼿꼿한 자세로 그를 맞이했다. 로벨리아를 다정한 눈으로 보고 있던 공작은 그를 보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안색을 바꾸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예법에 맞는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수도에서는 기혼자가 정인을 가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만.”
시녀들과 로벨리아, 비서관까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건 공식 선포나 다름없었다. 공작이 지금 황후에게 흑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도 그 황후의 법적인 배우자 앞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순간 자신 안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수도 문화는 자유분방한 사교를 추구하여, 기혼자라도 정부를 한둘쯤 들이는 것이 유행이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유행이라, 그 배우자의 면전에서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은 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촌뜨기들이나 하는 짓이 아니겠나.”
“조강지처 말고도 또 다른 배우자를 들이는 것이 공식적인 법도인 황궁에서 말입니까?”
“그 점잖기로 유명한 슈워츠코프 공작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군그래. 하지만 그대를 위해 조언 하나 하자면, 좀 더 품행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유유상종인지라 자신의 명예를 함부로 하는 것은 친구의 명예마저 먹칠하는 행동이 되곤 하니까.”
슈워츠코프 공작의 친구는 아이샤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말은 그와 아이샤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너 제일 친한 친구 두고서 여기서 뭐 하니?’ 가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황비의 측근인 주제에 갑자기 황후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아하니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읽어내지 못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의 말에 노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의 ‘옛 친구’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가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황후 폐하께 진실한 태도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저의 은인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은인께 해가 될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건 또 새로운 정보로군. 나의 황후가 그대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지?”
“그것은 사적인 일입니다, 폐하. 제게 바른대로 고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애초에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응당 받으셔야 할 귀중한 대우를 해드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삼 년이나 말입니다. 그런 폐하께서 이제 와서 배우자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행동은 몹시 면목없는 일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작! 말을 조심하시오! 지금 그 발언이 황실모독에 해당하는 사실을 알고는 있소?”
비서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끼어들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네가 끼어들수록 내 꼴만 우스워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자중하도록 해라.”
“송구합니다, 폐하. 시정하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가면을 벗어던진 차가운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공작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올곧고 차가운 시선으로 알렉산드로스를 보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군, 공작.”
알렉산드로스가 씹어뱉듯 말했다. 공작은 그 말에 따랐다.
“약조 없이 찾아와서 죄송했습니다, 황후 폐하. 차후 연통 드리겠습니다.”
“아…… 뭐…… 네. 그러세요.”
“그럼 이만.”
공작은 로벨리아와 알렉산드로스, 두 사람에게 모두 예를 갖춘 뒤 자리를 떠났다. 짧지만 폭풍 같은 상황이 지난 뒤, 사용인들은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라니?”
“그럼 삼각관계인 거지?”
서로에게 그렇게 속삭이는 시녀들에게 비서관이 엄한 눈으로 주의를 주었다. 한편 케일럽은 케일럽 대로 머리를 굴리느라 머리털이 빠질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황제 한 명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젠 공작이라니…….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고? 여전히 황후 폐하께 제일 가까운 건 나라고.’
방해꾼을 물리치고 로벨리아와 마주하게 되자 알렉산드로스는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뒤 후회한 게 바로 조금 전이었으니까. 어색하게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결국 그였다.
“……로벨리아.”
알렉산드로스는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로벨리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아까는…… 미안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
로벨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은 예상한 바였다. 자기가 사과 한마디 한다고 없어질 상처였다면 그녀가 그런 반응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이런 얄팍한 말보다도 그대에게 더욱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로벨리아.’
알렉산드로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그녀가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자신의 아내로 남아주면 좋겠다. 무슨 짓이라도 할 터이니…….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주변에 시선이 너무 많았으며, 그의 자존심은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말들을 그저 속으로만 주워 담을 뿐이었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나 찾은 것 같아. 내 조력자가 되기에 딱 알맞은 사람.’
입이 바짝바짝 타고 심장이 둥둥 울렸다. 도망치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혈류에 아드레날린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딱 노먼 슈워츠코프잖아!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의 소유자, 게다가 궁 외부인! 더군다나 험준한 북부 영지를 갖고 있으니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피해 숨어 있기 더할 나위 없지. 심지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도 날 도와줄 동기마저 있어!’
그는 분명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짜증 나는 남편에게서 도망치고 싶다고 하면 분명 발 벗고 도와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그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받고자 하면 남의 상황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잖아. 아무리 이혼이 하고 싶대도 그런 건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포기하기에는, 이쪽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내 인생이냐, 노먼에 대한 예의냐. 어느 쪽이지? 아, 이거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