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황후 폐하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2021.07.11.
의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먼발치라면 행사였나 보군요?”
“예. 국혼식이었습니다.”
노먼의 짧은 말에 나는 앞뒤 사정을 이해했다.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의 결혼식이었구나. 하긴 그 정도 큰 행사라면 공작으로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시녀들에게 찻상을 내오도록 했다.
“감사합니다.”
그가 인사하는 면전에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서로 예의를 차리느라 마음에도 없는 빈 인사를 나누는 일은 집어치우도록 하죠.”
나는 부채 너머로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슈워츠코프 공작. 황비의 최측근인 그대가 이렇게 내게 찾아온 이유가 뭐죠?”
보통 귀족들이라면 바로 본론에 들어가지 않고 긴 대화를 나누며 상대의 의중을 떠보는 데에 긴 시간을 들일 것이다. 하지만 외줄 위에 오른 듯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남의 의도를 염탐하는 일 같은 건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묻는 것이 낫지.
‘게다가 선빵필승. 방심했을 때 찌르면 당황해서 뭔가가 나올지도 몰라.’
하나 내 질문에 노먼은 기묘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당황한 기색이라기보다는…… 씁쓸한 웃음에 가까웠다.
“황후 폐하께서도 저를 황비 전하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아닌가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번에 제가 황후 폐하를 찾아온 일은 황비 전하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을 위해 폐하를 염탐하러 온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어라. 오히려 이쪽에서 의표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녀들의 얼굴을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뭐죠?”
“혹시 황후 폐하께서는 세인트 요한나 보육원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재빠르게 머릿속 명부를 펼쳤다.
‘세인트 요한나, 세인트 요한나……. 뭐더라…….’
그동안은 잊고 있었지만, 머릿속을 샅샅이 뒤지자 뇌리에서 잊혔던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아 참! 남부의 한 지방 도시에 있는 보육원이었지. 내 지난달 후원 목록에 있었어.’
그간 나는 이혼당하기 위해 정말 온갖 데에다 돈을 썼다. 그 돈으로 내가 정말 보석, 옷만 사들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귀족들이 드레스보다 더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일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고아, 병자 등 빈민의 구제.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삶의 질.
‘그래서 일부러 보육원과 병원, 도서관에 후원하고 그랬지. 귀족들은 그런 일들이 드레스 사는 것보다 더 쓸데없다고 생각하니까.’
아무튼 내 기억이 맞다면, 세인트 요한나 보육원은 내가 후원한 곳들 중 하나였다.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그곳이 공작과 무슨 상관이죠?”
나는 미심쩍은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하지만 노먼은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속 시원한 대답으로 내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신, 더더욱 어리둥절해지는 말을 했다.
“어째서 그곳에 거액의 후원을 하셨습니까?”
“으음?”
“어째서 그토록 큰 금액을, 심지어 7달 전부터 매달, 익명으로 후원하신 겁니까?”
‘그걸 공작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익명으로 한 후원의 내역을 이렇게 잘 알고 있다는 건 그가 내 뒷조사를 했다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층 날카롭게 물었다.
“영문을 모르겠군요, 공작. 제가 보육원에 후원을 하든 말든 그대가 무슨 상관인지요? 약조도 없이 이리 갑작스레 찾아와서 심문이라니, 그대는 이곳이 누구 안전인지 자각도 하지 못하는 겁니까?”
“송구합니다, 폐하. 감정이 다소 격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호통치자 노먼은 의외로 순순히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럼 이제 그만 답답하게 만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지 그러세요. 그대가 갑자기 저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며, 갑자기 그 보육원에 대해 캐묻는 이유는 뭡니까?”
“그것은……. 폐하, 제가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리면 당황스러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계신 사실일지도 모르지요. 어느 쪽이건 간에, 폐하께 실례가 되는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지만…….”
“당황은 그대가 약조 없이 찾아올 때부터 이미 실컷 했답니다. 그러니 그만 뜸 들이고 말하시지요.”
“듣는 귀가 많으니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시녀들과 케일럽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대단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케일럽은 눈썹 끝을 잔뜩 떨어뜨리며 애원했다.
“황후 폐하, 저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 모릅니다. 저라도 곁에 있게 해주신다면…….”
“아니, 모두 나가 있으렴.”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의 애원을 잘랐다.
“너희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제서야 시녀들과 케일럽은 어쩔 수 없이 응접실을 떠났다. 케일럽은 마지막까지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 같은 울상을 지으며 몇 번이나 이쪽을 보긴 했지만. 문이 닫히자 나는 말했다.
“자, 이제 공작의 차례로군요. 어서 사정을 말해보시지요.”
노먼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초조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마치 신부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과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폐하. 다름이 아니라……. 저에게는 사실 사생아 자식이 있습니다.”
“……!”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난 진짜로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게 뭔 소리야? 사생아 자식?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부채를 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저히 표정이 관리되지 않는 얼굴을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었으니까.
‘아니, 원작엔 그런 거 안 나왔잖아! 노먼의 사생아 자식이라니!’
하지만 내가 충격받았다는 사실을 티 낼 수는 없었다. 여유를 가장하는 것은 협상의 제일 중요한 전략 중 하나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남의 약점으로 호들갑을 떠는 건 무례한 짓이니까. 그래서 난 간신히 한 마디만을 꺼냈다.
“그건…… 확실히 의외로군요.”
다른 건 둘째치고 원작의 지고지순 순정남 서브 남주에게 사생아 자식이라니. 이건 확실히 좀 깨는 포인트 중의 하나였다.
‘트루럽이어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로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먼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름은 에른스트라고 합니다. 주변인들은 에른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만.”
“왜 ‘모양입니다만’이죠? 그대가 아이의 아버지 아닌가요?”
“예.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이를 직접 돌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아이는 현재 보육원에 있습니다.”
그제서야 내 머릿속에서 퍼즐조각이 맞춰졌다.
“그러니까 공작의 사생아 아들인 에른스트가 현재 성 요한나 보육원에 있나 보군요? 그래서 그대가 보육원의 익명 후원자의 뒷조사를 했던 것이고?”
“그렇습니다.”
노먼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럼 황후 폐하께서는 에른스트의 존재를 모른 채 우연히 그 보육원에 후원을 하신 거란 말씀이십니까? 에른스트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모르시고요?”
“그럼요. 대체 왜 제가 그걸 알고 후원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날카롭게 물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황후가 보육원에 익명으로 거액의 후원을 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겨냥한 의도적인 후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노먼은 복잡한 심정인 듯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랬군요.”
“잠깐. 궁금한 게 또 있어요. 공작은 왜 그대의 아들을 보육원에 보낸 거죠? 그대가 자신의 자식조차 책임지지 않는 파렴치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그래도 명색이 서브 남주인공이니까 말이다. 원작을 읽을 때 내가 노먼에게 느꼈던 감정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 제일 정상인이다.’였다. 내 질문을 들은 노먼의 얼굴에 일순 그늘이 졌다.
“그게……. 황후 폐하시라면 분명 제 복잡한 집안 사정에 대해 아실 겁니다. 저와 제 아버지의 평판이 어떤지도 아시겠지요.”
그건 물론 안다. 이곳에 와서도 공부하긴 했지만, 원작으로도 읽었으니까.
‘분명 북부 지방에서 산다는 사실과 특이한 외모 때문에 괴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외롭게 지냈지.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사람이 바로 아이샤였고.’
그제서야 머릿속에 끼어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진실의 형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설마…… 그대 집안의 오명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저의 아버지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이 오명을 벗고 싶었지만 외진 북부에서 험악한 무사들만을 상대해온 저와 아버지로서는 그 방법을 몰랐지요.”
노먼이 씁쓸한 얼굴로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저는 그런 생각마저 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외롭게 살 바에는 차라리 고아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요. 그랬으면 아무도 저를 괴물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고, 만나기도 전에 수많은 소문에 색안경을 끼지도 않았을 것이고, 저를 있는 그대로 보아줬을 텐데, 하고요.”
“그런 이유로 아이를 보육원에…….”
“적어도 괴물이라는 편견에 짓눌리며 자라는 일은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편견에 짓눌리지 않을 만큼 크고 단단히 자라면 진실을 밝히고 공작위와 영지를 물려주려고 했지요. 또한, 아이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달라는 것은 아이를 낳다 죽은 그녀의 부탁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어느샌가 그의 사연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나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눈짓을 했고, 노먼은 말을 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맡겨둔 보육원에 기밀로 꾸준히 후원하고는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후원하는 액수가 많아질수록 눈에 띌 것이고, 소문은 퍼질 것이며, 결국 누군가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뛰어들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에른스트가 저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이고, 그럼 소문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테니까요.”
“그런 와중에 다른 후원자가 생겼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겠군요?”
“그냥 신경이 쓰인 정도가 아닙니다.”
노먼은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이 후원자의 막대한 후원 덕에 비밀이 밝혀질 걱정 없이 제 아이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진심으로 궁금했습니다. 대체 이 후원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대체 어떤 의도로 이 보육원을 후원한 것인지. 혹시 저와 에른스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그대의 궁금증 역시 해소되었겠군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저는 계속 그가 누구인지만을 생각했습니다. 조사를 통해 후원자가 황후 폐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큰 충격을 받았죠. 황비 전하께서 말씀해주신 황후 폐하는 결코 보잘것없는 보육원에 거액의 후원을 할 사람이 아니니 말입니다.”
‘어라, 이 분위기…… 설마…….’
나는 뭔가의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불길한 예감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그리고 전 그때부터 계속 황후 폐하만을 생각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보육원에 후원을 하신 의도, 저와 에른스트의 비밀을 알고 그러신 건지에 대한 여부를…….”
그렇게 말하는 노먼의 눈빛은…… 원작을 읽으며 상상했던 냉철한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노먼은 아이샤 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애정을 주지 않았다. 자신을 길들인 주인인 아이샤만을 믿고 따르며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모습만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의 노먼은…….
‘저거…… 아무리 봐도…….’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의 붉은 눈에는…… 진심 어린 호의와 관심, 따스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노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보육원을 후원하는데 어떠한 이유도 없었고, 제 비밀을 잡고 이용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황후 폐하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