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나의 도주를 도와줄 그 사람2021.07.08.
“……이건 말도 안 돼, 정말로.”
나는 굳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한숨을 쉬자, 등 뒤에서 눈치만 보는 듯하던 시녀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세요?”
“황제 폐하께서 폐하를 너무 소중히 여기셔서 감정이 격해지신 것 같아요.”
“맞아요. 다 황제 폐하께서 폐하를 너무 사랑하셔서…….”
“아니, 황제 폐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들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설령 사랑한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지. 누군가를 강제로 자신의 옆에 두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어.”
“…….”
내 칼날처럼 단호한 말에 시녀들은 주저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맑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가 대체 나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그 생각을 한 순간, 원작에서 아이샤에게 집착하고 소유욕을 부리던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래 집착과 소유욕이 있는 인간인데 아이샤 대신 나에게 그 감정을 느끼게 된 건가?’
하지만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야, 나는 아이샤가 아니었으니까!
‘원작의 내용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는 아이샤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나에게 이토록 집착하다니 이상해. 아무리 내가 능력이 있어도 그렇지…….’
그가 나를 인재로서 마음에 들어한다는 건 알았지만, 연애적인 감정을 느끼는 상대가 아닌 인재로서 마음에 드는 상대한테도 이렇게까지 심한 집착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아이샤와 사랑에 빠지면 나한테 이랬던 것을 후회하게 될 텐데. 바보 같은 사람.’
나는 혀를 쯧쯧 찼다.
‘아마 원작의 어떠한 억지력이 그가 타인에게 심한 집착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 걸지도 몰라. 집착의 대상이 왜 아이샤가 아니라 나인지는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이제 어떻게 한다……. 메스타포에 맹세까지 해버렸으니 절대 나를 쉽게 놔주려고는 하지 않을 텐데.’
나는 여태까지 그가 나와 이혼하려는 마음을 먹게 하려고 온갖 악녀 짓들을 해왔다. 부족한 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상상력과 능력의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이혼할 마음이 들게 만들기는커녕, 메스타포에 맹세를 하게 되고 말았지.’
그런 일이 생기고 당황한 상태에서 억지로 머리를 굴리려고 애쓰니, 여러 생각이 뒤엉켜 머리에서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이마를 짚었다. 그림자 아래에서 내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내 생각엔…… 이제 계획의 방향성을 바꿀 때가 온 것 같아.’
그렇다. 이제껏 내가 했던 것이 알렉산드로스의 마음을 바꾸려는 노력이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마음을 바꾸지 않은 채 이혼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거야.’
물론 이것은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이제껏 알렉산드로스의 마음을 바꿔서 합의이혼을 하려고 노력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니까. 대륙의 주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야. 그런 그의 의사를 거슬러 이혼하는 것은 정말로 힘들고 험난한 길이겠지.’
그것은 몹시 어려운 데다가,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목이 타고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냥 이혼하지 말까?’
심지어는 그런 약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시녀들도 그랬지. 이혼하지 말고 황후로서 계속 이곳에서 지내면 안 되겠냐고.’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제국의 황후라니! 제국의 온 여성들이 선망할 법한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가진 삶이 아닌가. 나는 이전의 로벨리아만큼 만만한 성격이 아니니 그렇게까지 무시당하지도 않을 테고,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이 있으니 앞으로도 돈을 펑펑 쓰며 온갖 사치를 부리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황후로서 궁내부의 일을 하는 것은 내 능력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비록 알렉산드로스는 아이샤와 사랑에 빠질 테고, 둘이 깨 볶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하지만 나도 정부를 들일 수 있으니까.’
황후로서의 삶을 상상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돈도, 권력도 있겠지만 그런 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야. 내가 되고 싶은 건 진짜 나인 거야.’
나는 생각했다.
‘황제의 아내라는 이유로 부와 권력을 누리고……. 그런 삶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원작에서 알렉산드로스도 말했다시피 어차피 그의 변덕에 따라 언제 잃을지 모르는 것들인데!’
알렉산드로스가 지금은 내게 온갖 관심과 정성을 보이지만 이런 건 그의 변덕의 일부일 뿐이었다. 아이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이제 나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리라.
‘게다가 정부를 두고 연애를 해봤자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내가 권력이 있으니까 누구든 날 좋아하는 척해줄 텐데. 그런 진심 없는 연애 놀음 같은 건 해봤자 비참할 뿐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돈은 전생에도 꽤 벌었고 권력 놀음도 이제 지겨워. 내가 갖고 싶은 건 남에게 기대 얻는 부와 권력이 아니라 혼자서도 당당한 나, 그리고 진심 어린 애정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아래에서 녹색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지.’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든 알렉산드로스의 곁을 떠나는 것. 그것도 그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어떻게든 도망친다는 것.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개인 비자금이 될 보석을 꽤 모으긴 했지만 제국의 황제에게는 턱도 없을 정도의 금액일 텐데. 게다가 황궁의 삼엄한 보안을 뚫고 도망을 가려면…….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채 나가기도 전에 붙잡힐 게 뻔해.’
그 모든 준비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아주 오랜 준비가 필요할 텐데, 그게 얼마나 걸릴지도 상상되지 않았다. 어쩌면…… 몇 년? 몇십 년? 아니, 어쩌면 몇백 년은 필요할지도.
‘내 도주를 도와줄 조력자가 있다면 좋을 텐데. 황제와 견줄만한 대단한 부와 권력의 소유자여야겠지. 그리고 궁 내에는 알렉산드로스의 눈이 많으니, 궁 외부인이면 더 좋고.’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선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남주인공인 알렉산드로스와 견줄만한 부와 권력의 소유자가 대체 어디 있겠으며,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날 왜 도와주겠는가?
‘거래를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거래를 하지. 그 정도로 대단한 부와 권력의 소유자라면 내가 가진 보석으론 콧방귀도 안 뀔 거야.’
머리에 불이 나도록 고민하던 나는 결국 끙끙대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폐하!”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내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왜 그러니?”
“그게, 약조 없는 손님이 왔습니다.”
그녀는 꽤 당황한 것 같은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황후 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약조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황제 정도를 빼면.
“뭐야? 어떤 녀석이 건방지게 약조도 없이 날 찾아오는 거야. 누군데?”
“그게…….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입니다.”
“슈워츠코프 공작?”
나는 물론 다른 시녀들까지 깜짝 놀랐다. 그야, 그는 그 누구보다 날 찾아오는 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슈워츠코프 공작이라면 황비의 최측근 아닌가요?”
“수상한데요. 어쩌면 이쪽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말해 세작 짓을 하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어요.”
물론 나도 그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온 뒤로 고위 귀족들과 그들의 세력에 관해서 공부해두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원작의 서브 남주인공이잖아!’
그렇다. 원작에서도 꽤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이세계에서 온 꽃」의 제1 서브 남주인공! 비중으로 치면 케일럽보다도 위야. 괴물 공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외톨이로 살다가 아이샤에게 구원받은 뒤 그녀에게 헌신하는 지고지순한 서브남주지. 애절한 순정으로 많은 독자들의 눈물을 뽑았던 바로 그…….’
내가 이곳에 온 뒤 알아본 바로는 아이샤와 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길래 순조롭게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있나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노먼 슈워츠코프가, 나한테는 대체 왜?!’
정말로 아이샤의 세작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한 서브남주이니까 알렉산드로스나 케일럽에 견주도록 어마어마하게 잘생겼을 터. 그 굉장한 미모로 미남계를 써서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는 거라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요, 황후 폐하.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요.”
“맞아요. 약조를 핑계로 돌려보내죠.”
시녀들이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렴.”
“폐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 시점에서 노먼 슈워츠코프가 로벨리아를 찾아오는 것은 원작에서는 없었던 장면이야. 스토리가 원작과 달라지고 있다면 차이점에 대해 정보를 최대한 많이 가질수록 당연히 유리해.’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렴. 황비의 측근이라지만 점잖은 사람이라던데 별일이야 있겠니.”
“그야 그렇지만…….”
“그렇게 멍하니 보고만 있지 말고 내 화장이나 고쳐주렴.”
그제서야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에워싸고 화장을 고치기 시작하는 그녀들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머릿속으로 노먼이 온 이유에 대한 가설을 하나씩 세우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별로 도움은 안 되네. 그럴싸한 가설을 세우기엔 정보가 너무 없어.’
곧 화장이 끝났고, 한 시녀가 공작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 왔다.
“들여보내렴.”
마음의 준비를 한 내가 말했다. 내 지시에 시녀가 응접실의 문을 열었고,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내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그의 모습은…….
“어머!”
시녀들 중 누군가가 탄성을 터뜨렸다. 물론 다른 시녀들에게 주의를 받고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녀를 탓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상대가 어마어마하게 잘생겼던 것이다. 금빛 술이 달린 흰 예복으로 성장한 슈워츠코프 공작은 은사 같은 머리카락과 유리알 같은 붉은 눈, 혈관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미남자였다.
“지지 않는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차분하지만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는 아이샤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야.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없을 테니 경계하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최대한 냉정한 얼굴을 하고 부채로 입을 가렸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군요, 슈워츠코프 공작. 아마 우리가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죠? 그대는 무도회 등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으니까요.”
노먼은 차분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절 본 것이 처음이시겠지만, 저는 황후 폐하를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