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내게 한 번의 기회라도 줄 수 없겠나2021.07.04.
직설적인 질타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수군거렸다.
“…….”
하지만 그 순간을 누구보다도 괴롭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제일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내가 그녀를 방치했던 것을 사과하는 것이지.’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사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기묘한 일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 사과쯤은 얼마든지 입에 담을 수 있는 자신이, 그녀를 앞에 둘 때만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곤 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그녀가 인재로서 탐이 나기 때문이란 말인가?’
지금의 자신은 꼭……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해도’ 감수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녀의 앞에서는 진심이고 싶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수단으로써의 사과’ 따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안에 있든, 그렇지 않든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대외적으로는 강한 척 연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굳건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섬세한 내면이 상처를 입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껏 어떠한 사람에게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으며, 그녀가 마음의 상처를 받는 문제는 그의 이익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변명거리가 남아 있었다.
‘……내 소중한 인재가 심신에 타격을 받으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내게 손해인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명분을 꾸며내 합리화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사과를 하는 것도…… 결국 장기적으로는 그녀가 나에게 신뢰를 잃을 것이니 내게 손해가 된다. 그래, 그것뿐이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눈앞의 여성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잡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녀는 도무지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원망, 그 감정이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그물처럼 가로막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렇게나 무언가를 갖고 싶었던 적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넣지 못했던 적도 없었다. 자신의 것이 되어달라고 애원해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전에 그녀를 농하기 위해 「발밑에 무릎 꿇을 수도 있다」라고 한 적이 있었지.’
알렉산드로스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이러다간 이성을 잃고 정말로 그렇게 해버릴 것 같아 두렵군.’
결국 고민 끝에, 그가 사과 대신 입에 담은 말은 이것이었다.
“로벨리아, 부탁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부디 내게 한 번의 기회라도 줄 수 없겠나. 단 한 번이라도 좋다. 그대가 내게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
“…….”
“그리고 그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지. 지금 그대가 바라는 삶의 모습을 무엇이든 이루도록 만들겠다. 단 하나, 나의 곁을 떠나는 것만을 제외하고.”
거기까지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뚜렷한 눈썹이 이완되어 내려앉고 선명한 목울대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메스타포와 나의 이름, 황실의 명예에 걸고 맹세한다. 그대는 나의 곁을 선택한 것을 결코,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에 걸고 내가 그렇게 만들도록 하겠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함을 했다. 시녀들은 너무나 놀라 입을 막았다. 심지어 케일럽마저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말은 결국 본질적으로는 애원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할 테니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는 간절한 부탁. 그리고 그 사실을 그의 열망 어린 눈빛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진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수를 닮은 금빛 눈동자에는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소유욕이라는 이름의 불꽃은 그 자리의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불타올랐다.
“…….”
“다시 묻지, 로벨리아.”
알렉산드로스가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그대는 내 곁을 떠나려고 하는 것인가?”
시녀들은 입을 틀어막은 채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차마 말은 할 수 없지만 표정과 눈빛으로 보아, 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다!’
‘황후 폐하도 이번에야말로 넘어가시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의 그 진중하면서도 열정적인 애원, 그 표정, 그 눈빛을 마주한다면 어떠한 여자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면서도 시녀들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애간장이 녹아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후 폐하도 여자인 이상 저렇게 매력적이고 멋진 말에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나 가슴이 떨리는데 당사자는 대체 얼마나 황홀할까. 시녀들은 부러움 가득한 한숨을 쉬었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로벨리아라고 해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시녀들뿐만이 아니었다.
“…….”
케일럽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차마 표정을 관리하고 순진함을 가장할 여유조차 없었다. 눈앞에서 사모하는 상대를 빼앗기게 생겼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하필 연적이 제국에서 제일 권세 있는 사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깨문 입술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고 피 맛이 났지만 케일럽은 개의치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의 주의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어서, 아무도 케일럽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네.”
그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울려 퍼져 긴장감 어린 정적을 깨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뭐라고……!”
“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삶은, 제가 원하는 행복은 폐하의 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결연함이 있었다.
“제 행복은 부나 권력으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부와 권력만을 가진 삶이 아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그 어떤 제안을 하시더라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대체 어떠한 능력으로 그의 이목을 이 정도까지 끌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행정관으로서의 오랜 실무 경력이 도움이 됐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그는 거짓말은 해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은 아니야. 그의 곁에 있는 것을 선택하면 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겠지.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을 정도의 막대한 부와, 어마어마한 권세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
하지만 그런 것은 애초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다른 여자만을 사랑하는 남자의 명분뿐인 아내로 살기는 싫어. 돈과 권력은 더 적더라도, 진정으로 나만을 봐주고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담담한 얼굴로 상대를 보았다.
‘물론 요즘은 나에게 잘해주고 있고, 관심을 보이는 듯 하지만 그건 오로지 인재로서의 나를 포섭하고 싶기 때문일 뿐. 결국 원작의 흐름을 따라 결국에는 아이샤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그의 운명인걸.’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은……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언제나 가장하고 있던 여유와 호인 같은 웃음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로벨리아로서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
‘괴롭겠지. 자존심도 상하고. 이제껏 원하던 걸 손에 넣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게 그에게도 결국 도움이 될 거야.’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메스타포에 맹세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나.”
그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고저가 없었으나 로벨리아는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의 밑에는 용암처럼 뜨거운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그 절절 끓는 감정과 뜬금없는 말의 내용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아 로벨리아는 주저하면서 대답했다.
“네, 압니다. 메스타포는 불바다를 뜻하는 것인데, 메스타포에 건 맹세를 어기면 사후 불바다에서 영원히 불타게 될 것이라고…….”
“잘 아는군.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할 말의 경중 역시 알겠군.”
“네?”
로벨리아는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음의 말이 떨어진 것은, 그녀가 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찰나였다.
“나 알렉산드로스 2세, 이 자리에서 메스타포에 맹세하지.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폐, 폐하!”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가 내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대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그대를 포기하게 된다면 사후 불멸의 세계에서 불바다에 영원토록 타올라도 좋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금빛 눈동자에 장난이나 웃음기라곤 조금도 어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서슬 퍼렇게 빛나는 그 두 눈은 집착적일 정도로 올곧게 로벨리아만을 보고 있어서, 그녀는 맨몸으로 맹수의 앞에 선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거대한 위압감을 깨뜨리고 로벨리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그가 일어나 문에 도달했을 때였다.
“폐하! 이러시는 것이 어딨습니까? 어째서 저에겐 일언반구의 논의도 없이 함부로 그런 맹세를……. 폐하! 당장 취소하시지요!”
“소용없어, 로벨리아. 되돌릴 수 없으니까 맹세인 것이다. 이만 나의 곁이라는 자리에 익숙해지도록. 떠나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
그 말만을 남기고 알렉산드로스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상대가 사라진 문을 보며 로벨리아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시녀들은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라니?”
한 시녀가 물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벨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