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나는 그대가 다칠까 걱정이 돼 (52/151)

52. 나는 그대가 다칠까 걱정이 돼2021.07.01.

1654968330727.jpg“미…….”

성녀는 성녀라는 것일까, 잠시 얼어붙었던 아이샤는 곧 정신을 차렸다.

1654968330727.jpg“미친 거 아니야?! 노예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그녀가 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케일럽은 피식하고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16549683307279.jpg“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비 전하. 천한 몸이라고 해도 때론 분노할 줄 안답니다. 소중한 사람이 모욕당했을 때는 더더욱 말이죠.”

그는 언제 다가왔냐는 양 성큼 물러나곤 말했다.

16549683307279.jpg“볼일이 끝났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 심문에는 증거도 가지고 오시길 바랄게요.”

1654968330727.jpg“이봐, 어딜 가는 거야! 야! 노예!”

아이샤는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이미 케일럽은 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응접실에는 아이샤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티세트만이 남게 되었다.

16549683307293.jpg

  ***

16549683307297.jpg“그런 일이 있었다고?”

입가로 찻잔을 옮기던 손을 멈추고, 로벨리아가 되물었다.

16549683307302.jpg“네! 정말 쌤통이지 않겠어요? 황비 그 여자가 그렇게 꼴사납게 착한 척을 하더라니 진면목이 만방에 다 까발려진 거잖아요.”

16549683307302.jpg“황후 폐하를 모함한 게 그 여자였다니……. 너무 화가 나요. 더 된통 당했으면!”

16549683307302.jpg“황제 폐하께서 이걸로 황비를 벌주시지 않을까요?”

각자 자신의 의견을 떠들썩하게 말하는 시녀들 사이에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로벨리아가 문득 말했다.

16549683307297.jpg“대체 누굴까? SP판을 바꿔치기 한 사람 말이야.”

16549683307302.jpg“네? 글쎄요.”

16549683307302.jpg“소문에 의하면 황비 쪽에서 쥐잡듯이 찾고 있는데 오리무중인 모양이에요.”

16549683307302.jpg“누구라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황비를 그렇게 망신 줬는데, 황후 폐하의 편일 것 같아요. 황제 폐하라면 정말 좋겠네요.”

16549683307302.jpg“어쩜, 그럼 좋겠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6549683307297.jpg‘알렉산드로스일 리가 없지. 명색이 남주인데 사랑하는 여주인공에게 그렇게까지 피해가 가는 일을 할 리 있겠어? 아직 완전히 사랑에 빠진 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호감은 있을 거 아니야.’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16549683307297.jpg‘대체 누굴까? 시녀들의 말대로라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가 분명해. 마도구를 조작한 거니까 굉장한 마법 능력이 필요하겠지.’

시녀들은 ‘황비의 적이라면 어차피 황후 폐하의 편일거고, 그럼 된 거 아니냐.’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로벨리아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16549683307297.jpg‘아이샤의 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내 편이리라는 보장이 없지. 대체 누굴까……. 이만한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이샤, 혹은 성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16549683307279.jpg“많이 신경 쓰이시나요?”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로벨리아의 상념을 깨뜨렸다.

16549683307297.jpg“아, 케일럽. 아무래도 그렇구나.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또 어떻게 보면 황실의 보안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니까. 이런 일이 황비에게만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겠니.”

16549683307279.jpg“하지만 황비 전하와 달리 황후 폐하는 위선적이지 않으신걸요.”

순진한 얼굴을 한 케일럽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말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 얼굴에 로벨리아는 풋 웃을 수밖에 없었다.

16549683307297.jpg“그건 그렇지만 상대가 어떤 일까지 할지는 알 수 없지 않니.”

16549683307279.jpg“그렇군요…….”

사실 ‘뛰어난 마법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케일럽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로벨리아의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 재능을 가진 사람이니까.

16549683307297.jpg‘하지만 역시 케일럽이 그럴 리가 없지. 이렇게나 소심하고 순진한 애인걸. 내 곁을 지키는 정도가 고작일 텐데.’

케일럽의 순진한 얼굴을 보면서 로벨리아는 순간이나마 그를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16549683307297.jpg‘결정적으로 그 정도의 마도구를 조작하기에는 케일럽의 능력이 모자라기도 하고.’

케일럽은 이미 6서클을 뛰어넘는 마법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마법 스승과 로벨리아에게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로벨리아는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한편 케일럽은 순진한 얼굴 뒤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6549683307279.jpg‘역시 내가 한 일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구나. 폐하께 내가 한 일이라고 알리지 않길 잘했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이어진 정적을 노크 소리가 깨뜨렸다.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들어와 말했다.

16549683307302.jpg“황후 폐하, 귀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16549683307297.jpg“자고 있다고 전해드려.”

16549683307302.jpg“그, 그게…….”

하지만 시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의 등 뒤로 긴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16549683357935.jpg“그렇게 말할 줄 알고 기다리지 않고 직접 왔지. 현명한 선택이었군 그래.”

낮고 느린, 울림이 좋은 목소리. 시녀들 모두가 감탄한 그 목소리에 단 두 사람만은 미간을 좁혔다. 로벨리아와 케일럽이었다.

16549683307297.jpg“허락도 없이 남의 공간에 들어오는 것은 실례라는 사실을 모르시는지요?”

시녀들과 케일럽은 예를 차리기 위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로벨리아는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느긋하게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제국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알현하는 사람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조금도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익숙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는 성큼 로벨리아의 방으로 발을 디뎠다.

16549683357935.jpg“황제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야말로 큰 실례지. 제국법에 정통한 그대라면 알 터인데?”

16549683307297.jpg“…….”

16549683357935.jpg“어디 보자, 황실 법 16조 8항에 따르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화 200만 개 이하의 벌금이었던가. 하지만 그대에게 죄를 물리겠다는 것은 아니야. 그대는 모든 것에서 예외지.”

시녀들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다 말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들은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 서로를 보고 히죽 웃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느샌가 로벨리아의 맞은편에 섰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미소 지었다.

16549683357935.jpg“호두나무 티테이블이 그대와 무척 잘 어울리는군. 특히 그 붉은 머리카락과.”

16549683386156.jpg“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16549683307297.jpg“잠깐, 나가지 말아봐.”

슬쩍 빠져주려던 시녀들은 로벨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움찔 놀랐다.

16549683307297.jpg“거기 있으렴. 폐하께서는 어차피 금방 가실 테니 말이야.”

16549683357935.jpg“너무 벽을 세우는 듯해서 서운한데.”

알렉산드로스가 작게 불평했다. 로벨리아는 그의 등장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마침 시녀들과의 대화 내용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16549683307297.jpg“마침 오셨으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폐하. 혹시 최근 있었던 황비의 파티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요?”

그녀가 자신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기회였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씩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16549683357935.jpg“물론 알고 있지. 그 파티에서 있었던 사건까지 전부.”

16549683307297.jpg“혹시 SP판을 교체한 범인을 알고 계시는지요?”

16549683357935.jpg“의외로군. 나는 그대를 모함한 황비가 어떤 벌을 받을지에 대해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16549683307297.jpg“물론 그것도 궁금하니까 대답해주시지요.”

16549683357935.jpg“먼저 범인에 대해서는 조사 중이야. 황비의 집무실에서 찾아낸 도청용 마도구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어. 용의주도한 녀석이더군.”

16549683307297.jpg“황비가 받게 될 벌은요?”

16549683357935.jpg“황실 법 71조 15항에 따라 3달간의 황비궁에서의 근신과 반년간의 예산 삭감.”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로벨리아는 흠칫 놀랐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기묘한 빛으로 번쩍였던 것이다.

16549683357935.jpg“부족한가?”

16549683307297.jpg“네?”

16549683357935.jpg“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그대의 평판을 추락시키고 부정한 말이 돌게 하지 않았나. 벌이 부족하다고 느끼나?”

귀족적으로 돌려서 묻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아이샤에게 더한 벌을 줄까?’라고.

16549683307297.jpg‘솔깃한 건 사실이야. 아이샤가 더는 날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하지만…….’

로벨리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16549683307297.jpg“아니요.”

16549683307297.jpg‘하지만 아이샤의 음모를 눈치챈 이상 그녀가 행동을 더 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좋아. 어차피 이번 일로 줄 수 있는 벌은 한계가 있을 거고, 그 정도의 미약한 벌로 반성할 리가 없을 테니 그녀의 다음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꼬리를 잡기에 좋겠지.’

알렉산드로스의 눈이 의외라는 듯 뜨였다.

16549683357935.jpg“의외로군. 벌이 부족하다고 할 거라 생각했는데.”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말해주지 않았다.

16549683307297.jpg“황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겠지만 저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거든요.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제 평판을 망치고, 황제 폐하로부터 내쳐지도록 하는 데에 말이죠.”

알렉산드로스는 피식 웃더니 제 입술을 핥았다.

16549683441959.jpg

16549683357935.jpg“결과적으로는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므로 그런 일을 더 하도록 내버려 두겠다 이건가. 지략가다운 생각이야, 로벨리아. 하지만…….”

16549683307297.jpg“하지만?”

16549683357935.jpg“그대가 다칠까 걱정이 되는군.”

이번에 놀란 쪽은 로벨리아였다.

16549683307297.jpg“그런 감상적인 말씀도 할 줄 아는 분이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만. 하지만 황비도 황족시해죄가 얼마나 엄중한 줄은 알 겁니다.”

16549683357935.jpg“몸만을 이야기한 게 아니야, 로벨리아. 난 이런 일들로 그대의 마음이 다칠까 걱정이 돼.”

이쯤 되자 참을 수가 없어졌다. 로벨리아는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16549683307297.jpg“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저에게는 이득이 된다고.”

16549683357935.jpg“이익과는 별개지. 세간에 자신에 대한 비난이 떠도는데 마음에 조금의 상처도 생기지 않는 사람은 없어, 로벨리아. 더군다나 그대는 약한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 지금은 잘 견디고 있다고 해도 만에 하나 힘이 든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라도 그 사실을 드러내고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눈앞의 사람에게서 이렇게까지 섬세한 걱정을 받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16549683307297.jpg‘정신 차려, 현혹되면 안 돼. 보나 마나 마음에도 없는, 나를 꼬드겨내기 위한 꿍꿍이속으로 한 말일 뿐일 테니까…….’

그래,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렉산드로스 같은 냉혈한 소시오패스가 이렇게나 배려심 가득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금빛 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고, 또 진심 어린 걱정을 품고 있어서……. 그 눈을 보면 그의 말이 꼭 진심으로 느껴졌다. 아니, 진심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제껏 로벨리아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배려해준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껏 한 번도 듣지 못한 걱정의 말을 듣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충족감이 드는 일이었다. 꼭 메말라 붙은 가슴 속 토양에 촉촉하게 봄비가 내린 것만 같았다.

16549683307297.jpg‘안 돼, 그의 이런 거짓 다정함에 익숙해지면.’

로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16549683307297.jpg‘어차피 다 거짓말일 게 뻔해. 그는 아이샤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있어봤자 더한 상처를 받을 뿐이라고.’

그렇게 되뇐 끝에, 로벨리아는 날붙이처럼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16549683307297.jpg“그렇게 제 마음의 상처를 신경 쓰시는 분인 줄 미처 몰랐는걸요. 그런 분께서 왜 저를 3년이나 방치하셨는지 궁금해지는데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