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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더 이상 착한 척은 그만 두지? (51/151)

51. 더 이상 착한 척은 그만 두지?2021.06.27.

아이샤는 케일럽에게 다가갔다. 수줍어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런 모습은 아이샤로서는 셀 수도 없이 해본, 일종의 특기이기도 했다.  

16549683159784.jpg“저어…… 혹시 황후 폐하의 새 하인인가요?”

  그녀의 말에 상대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그 둥글고 순한, 하지만 깊이 있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아이샤조차 가슴이 조금 뛸 정도였다.  

1654968315979.jpg“네, 맞습니다. 혹시 누구신데 제게……?”

  심지어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아이샤는 눈매를 사랑스럽게 휘며 팔짝 뛰었다.  

16549683159784.jpg“맞군요! 저는 황후 폐하와 한 지붕 아래살이를 하는 사람이에요.”

  겸손하게 에둘러 표현했지만 지금 황후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사람 중 저런 표현을 쓸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황비였다. 게다가 차원이동자인 그녀의 생김새는 누가 봐도 이색적이어서 눈에 띄었다.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서양인들 사이에서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상대는 그녀가 누군지 눈치채자마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1654968315979.jpg“황후 폐하의 호위 기사 케일럽이 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16549683159784.jpg“헤헤, 뭘요. 너무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1654968315979.jpg“하지만 저는 일개 하인일 뿐이고 황비 전하는 황비 전하이신걸요.”

16549683159784.jpg“제가 온 세상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급 같은 게 없었어요. 모두가 다 똑같은 사람인걸요.”

  아이샤의 이 ‘만인평등론’은 이제껏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온 무기였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특히 아랫 계급 사람들에게 잘 먹혔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말을 할 때마다 평민들은 성녀님께서 자신 같은 천것에게도 다정하시다며 감격했다. 귀족들은 조금 경박하게 느낄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세계에서 온 그녀의 개성, 자유분방한 사랑스러움이라고 찬미하는 이도 있었다.  

16549683159784.jpg‘황궁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외롭고, 기댈 곳이 필요하겠지. 이럴 때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는 성녀님이라니,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 너무 감동해서 울어버리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런 계산적인 속내를 숨긴 채 아이샤는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눈앞의 미소년이 자신의 다정함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면서. 그런데…….  

16549683159784.jpg‘어?’

  아이샤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6549683159784.jpg‘내가 방금 잘못 봤나?’

  아이샤는 본 것 같았다. 미소년의 얼굴에 아주 한순간 비틀어진 웃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순간이었다. 방금 전 본 것이 신기루였다는 양 지금 그의 얼굴에는 사랑스럽고 순진한 얼굴 말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16549683159784.jpg‘그럴 리가 없어. 하인 따위가 날 비웃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미소년은 곤란한 듯이 웃었다.  

1654968315979.jpg“황비 전하를 부끄럽게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스스럼없으시면 제가 곤란해져요. 나중에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어요. 황비 전하처럼 다정한 분이시라면 이해해주시겠죠?”

16549683159784.jpg“아, 네…….”

1654968315979.jpg“그럼 저는 수업에 늦어서 이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러면서 미소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등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16549683159784.jpg‘어떻게 된 거지? 왜 나한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지?’

  자신에게 아무런 호감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 남자라니, 제국에 온 뒤로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아이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샤는 자존심이 굉장히 셌다. 시녀들 앞에서 자신 있게 나섰는데 이대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샤는 빠르게 움직였다.  

16549683159784.jpg“잘 가요, 앗……!”

  아이샤는 케일럽이 등을 돌리기 전에, 그의 눈앞에서 발을 옮기려다 헛디뎌 넘어지는 척을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붙잡아주지 않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비록 황후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궁인인 케일럽이 자신을 다치게 둔다면 벌을 줄 수도 있었다.  

16549683159784.jpg‘아무리 철벽을 친다 해도, 벌을 받고 싶지는 않겠지.’

  그리고 아이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케일럽은 자신이 넘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6549683159784.jpg“꺅!”

1654968315979.jpg“조심하세요!”

  아이샤는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케일럽이 자신의 몸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막은 것이다.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뚝은 미소년다운 얼굴에 비해 의외로 단단했는데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16549683159784.jpg“정말 고마워요, 케일럽. 덕분에 다치지 않았네요. 감사의 뜻으로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이번 주 중이라면 언제든 괜찮아요.”

  아이샤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족이 그저 길가에 서서 이야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차를 마실 것을 제안했다. 평민에게 그것은 크나큰 영광이자 기쁨이었다.  

16549683159784.jpg‘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짓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아. 마법 천재인데다가 이렇게나 잘생기기까지 했으니까.’

  이런 대단한 제안을 받은 케일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아이샤는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아이샤를 쳐다보고 있지조차 않았다. 그는 고개를 완전히 돌리고 있었다.  

1654968315979.jpg“아…… 죄송해요. 시간이 없어서요. 수업도 듣고, 황후 폐하를 호위하느라 하루하루가 바쁜지라…….”

16549683159784.jpg“네?”

1654968315979.jpg“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이러다 정말 늦겠어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아이샤를 두고 미소년은 진짜로 쿨하게 사라져 버렸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아이샤는 기가 막혀 그 자리에서 입을 딱 벌렸다. 시녀들이 자신을 보고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창피했다. 미소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던 아이샤가 무심코 내뱉었다.  

16549683159784.jpg“저 인간, 혹시 고자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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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683159784.jpg‘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아이샤는 케일럽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83159784.jpg‘그렇게까지 했는데 내게 어떠한 호감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했어. 그리고 예상되는 이유는 딱 세 가지야. 고자거나, 남색가거나, 아니면…….’

순간 아이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16549683159784.jpg‘……이미 흠모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거나.’

누군가를 흠모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꼭 호감을 얻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16549683159784.jpg‘설마…… 그 건방진 노예가 황후를 마음에 품고 있고, 그래서 황후를 위해 마도구를 만든 것이라면?’

하지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케일럽이 6서클 이상이어야 하며, 로벨리아와 협력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가 3서클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여넘겨야 한다.

16549683159784.jpg‘그 나이에 3서클도 대단한 천재라던데 6서클이라니 말도 안 되지. 게다가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까지 속여넘겨? 아니, 선생까지 황후와 한패이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은 정말 적었다. 거의 벼락 두 번 맞을 확률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6549683159784.jpg‘이상하게 그 노예에 대한 의심이 거두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이성은 분명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감정은 자꾸만 그가 수상하다고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촉’이 섰다. 그리고 아이샤는 그 ‘촉’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시녀에게 말했다.

16549683159784.jpg“씨시, 부탁이 있는데. 황후의 노예 중 한 명인 케일럽이라는 자를 데려와 주었으면 좋겠어.”

16549683211418.jpg“네? 하지만 그는 황후의 소유라서 이곳으로 오게 하는 것을 강제하기 어렵습니다. 황후의 호위를 하는 것이 우선일 테니까요.”

16549683159784.jpg“그가 황후 소유라는 걸 몰라서 말했겠어? 내 지시에 따르는 것이 네가 할 일이잖아.”

16549683211418.jpg“하, 하지만…….”

16549683159784.jpg“씨시.”

조급해진 아이샤에게는 표정을 정돈할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이미 너무나 많은 일들로 고통받아 닳고 닳아온 그녀였다.

16549683159784.jpg“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당장 여기로 데려오라고 했잖아.”

언제나 사랑스럽고 다정하던 그녀의 다른 얼굴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시녀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16549683211418.jpg“아, 알겠습니다.”

16549683159784.jpg“고마워, 씨시. 너라면 내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어.”

아이샤는 자신이 언제 무서운 얼굴을 했냐는 양 생글거리며 웃었다. 시녀는 펄떡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생각했다.

16549683211418.jpg‘확실히 요즘 황비 전하께서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 잠시 후, 아이샤의 유능한 시녀는 케일럽을 아이샤의 응접실에 데려왔다.

16549683159784.jpg“아, 케일럽! 오랜만이에요. 제 얼굴 기억나세요?”

아이샤는 살가운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16549683159784.jpg“케일럽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찻상도 마련했어요. 어때요, 삼단접시가 정말 예쁘죠?”

아이샤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노예는커녕 평민들도 평생 맛보기 어려운 진귀한 과자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16549683159784.jpg“부담 갖지 말고 맘껏 먹어도 돼요. 부족하면 더 내오라고 할 테니까요. 자, 여기 앉으세요.”

아이샤가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케일럽은 앉지 않았다.

16549683159784.jpg“케일럽?”

1654968315979.jpg“전하의 청에 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러운 노예인 제가 고귀한 황비 전하의 공간을 더럽힐까 저어되어 도저히 앉을 수가 없군요.”

그렇게 말하는 케일럽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러웠다. 아이샤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케일럽이 한 말은 자신을 낮추는 척하면서 아이샤의 여론 공작을 비꼬는 것이었다. 그녀는 황후가 궁에 ‘더러운 노예들’을 들였다는 소문을 냈고 그 사실은 온 수도에 널리 알려졌으니까. 하지만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이샤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정돈하며 말했다.

16549683159784.jpg“아하하,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봐요. 제가 왜 케일럽을 더럽다고 생각하겠어요? 자, 그러지 말구…….”

아이샤는 그의 손을 잡아 끌어당길 생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16549683159784.jpg“꺄악!”

놀랍게도, 케일럽은 닿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쳐냈다.

16549683159784.jpg“케, 케일럽……?”

아이샤는 비틀거리면서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선하고 순진한 인상의 미소년이 아니었다. 케일럽은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1654968315979.jpg“이제 더 이상 착한 척은 그만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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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83159784.jpg“케일럽, 그, 그게 무슨…….”

1654968315979.jpg“순진한 척하지 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네 본모습은 지난번의 파티에서 다 까발려졌는데 이제 와서 무슨 수작질이야?”

상대의 변모에 아이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그가 ‘지난번의 파티’를 언급하자 뜨거운 분노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때의 그 수치, 그 비참함. 그것은 시간이 흘렀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6549683159784.jpg“너……! 그거, 네 짓이지? 바뀐 sp판……!”

원래의 계획은 분명 그를 데려와 부드럽게 떠보는 것이었을 텐데……. 지나친 충격과 분노는 그녀가 계획조차 잊게 만들었다.

1654968315979.jpg“뭐? 하하. 성녀가 생사람 잡네. 증거 있어?”

16549683159784.jpg“발뺌하지 마! 분명…… 분명 너잖아! 너랑 황후랑 짜고서 그런 거지, 내 말이 맞지!”

아이샤가 발악하듯 말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말에, 얼굴 가득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던 케일럽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1654968315979.jpg“이봐, 성녀.”

아이샤의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1654968315979.jpg“나한테는 뭐라고 지껄여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 더러운 혀로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갑작스레 낮아진 목소리. 차가운 눈동자.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 그녀보다 큰 체구. 그 모든 것이 아이샤로 하여금 생리적인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1654968315979.jpg“한 번만 더 그랬다간……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나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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