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누가 대화를 유출한 거야?2021.06.24.
하지만 아이샤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의 그림자 속에 숨어, 남몰래 미소짓는 누군가의 정체를.
*** 알렉산드로스와 케일럽이 처음으로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며 대치했던 그 날 밤.
“이걸 어떡한다…….”
로벨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도에 대해 궁리하던 케일럽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로 황비 아이샤의 방문이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을뿐더러 방문이 살짝 열려 있기까지 했다. 로벨리아와 아이샤의 관계에 대해 간략히 알고 있던 케일럽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가 로벨리아의 앞에서 짓던 사랑스럽고 순진한 미소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가 ‘계략’을 떠올렸을 때의 얼굴이었다.
“황비 전하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문단속이 허술하기 짝이 없군.”
케일럽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일부러인가?”
아이샤 본인이 아무리 칠칠하지 못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방문을 허술하게 하기는 어렵다. 그녀를 모시고 따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들 중 문단속을 챙겨줄 사람이 한 명 없을까. 케일럽은 최근 로벨리아의 주가가 오르고 있으며 반대로 아이샤의 궁 내에서의 영향력은 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소심한 아웃사이더인 척, 비밀을 함부로 소문낼 배짱도 없는 겁쟁이인 척을 하는 것은 정보전 면에서 상당히 좋은 전략이었다. 옆에 그를 두고도 사물인 양 신경 쓰지 않고 비밀 이야기를 떠들어대거나, 심지어 그를 대나무숲처럼 쓰려고 드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최근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는 황비는 갑작스레 떠오른 황후를 견제하려 들겠지. 책 잡을만한 부분을 쥐잡듯이 찾아내고 있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별다른 흠이 없다면. 그렇다면 황비는 없는 흠을 만들어내려고 하겠지.’
정말이지 간단한 수작이었다. 방비가 허술한 문에 황후나 그녀의 사람이 유혹을 느끼고 들어오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황비가 원하는 결과이리라.
‘내 이런 생각을 황후 폐하께서 아신다면 지나친 생각이라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꾸중하시겠지.’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황후는 자신이 악독한 사람인 줄로 알고 있지만 케일럽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순진하며, 착해 빠졌고, 물러터진 사람이었다. 진짜 ‘악의’가 어떤 형태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난 「악의」의 모양을 잘 알고 있어.’
모두가 순진하고 사랑스럽다고 칭송하는 황비이지만 케일럽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믿은 적이 없었다. 뒷골목과 노예시장을 전전해오던 자신의 삶 속에서 선한 사람은 없었고 모두가 악인이었다. 누구도 믿지 않는 케일럽에게 있어서 ‘순수’ 따위는 원하는 것이 있는 자의 가면에 불과했다. 그야, 자신부터가 그러하니까. 순수의 가면을 쓰고 있는 자신의 속내가 얼마나 검은지 알고 있는 그로서는 순수를 가장하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케일럽은 살짝 열린 문을 통해 황비의 방 안에 마력 탐지 마법을 걸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은 황비의 방 안을 샅샅이 훑더니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역시나.”
케일럽은 킥킥 웃었다. 어쩜 이렇게 빤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얕은 수작일까? 겉으로 보기엔 아주 허술해 보였던 황비의 방문과 방 안에는 여러 가지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오면 방의 주인에게 알려주는 마도구, 30분 간격으로 방 안의 모습을 촬영해 다시 볼 수 있는 영상구 등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몇 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전부 허접쓰레기로군. 저것들을 설치하기 위해 돈깨나 썼을 텐데 미안하게 됐네.’
케일럽은 그저 손가락을 몇 번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황비의 방 안의 마도구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죄책감 없이 황비의 방에 들어갔다.
‘이곳은…… 집무실인가?’
그는 굳이 방 안을 뒤지거나 하는 헛수고를 하지 않았다. 황비가 바보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침입을 유도하게 만든 방에 중요한 자료를 놓아 둘리 없었으니까. 대신 케일럽은 아이샤의 잔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그의 소매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케일럽은 책장 위에 놓여 있는 장식용 도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여기 들어가. 그리고 너는 여기서 들은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전달해 주는 거야.”
귀뚜라미는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폴짝폴짝 뛰어 도자기 안에 쏙 들어갔다. 이것으로 더 이상 이 방에서 볼 일은 없었다. 그는 방에서 빠져나온 뒤 아이샤의 마도구들을 전부 작동시켰다.
‘나중에 꼭 말해줬으면 좋겠어, 황비.’
케일럽은 방문을 원래 열려있던 만큼만 아주 조금 열어놓으며 생각했다.
‘자기가 낸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기분은 어때?’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시원하게 등을 돌려버렸다. 황비궁의 적막한 복도에는 그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만이 간간히 울려 퍼졌다. *** 아이샤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나와 셀리먼 공작부인의 대화를 유출했을까?’
셀리먼 공작부인과의 대화 내용은커녕, 그녀와 그날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몇 없었다.
‘내게 늘 가장 친한 척을 하는 씨시인가? 아니면 그날 방문을 지켰던 시어도어? 어쩌면 애슐리나 미리엄 일지도 몰라.’
주변인들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샤는 이 일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신에게 친근한 척 다가와서 ‘다음에는 잘 될 것’이라는 둥, ‘다들 금방 잊을 것’이라는 둥, 전형적인 위로의 말을 주워섬기는 시녀들의 얼굴이 밉살스러웠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배신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 귀부인들을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는 자신의 미모와 인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녀들도 분명 지금쯤 지난 파티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고 있으리라.
‘게다가 노먼조차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 날 배신하고……. 대체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생각할수록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로벨리아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서 주최한 파티에서 모든 손님들에게 망신을 당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로벨리아였더라면…… 자신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가만히 앉아 괴로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선은, 그 대화를 유출한 게 대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만 했다.
‘그 대화를 나눈 곳은 분명 내 두 번째 집무실이었지.’
파티가 파하자마자 아이샤는 수많은 하녀들을 이끌고 해당 집무실로 갔다. 그러고는 하녀들을 시켜 집무실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먼지 한 톨까지 샅샅이 뒤져! 마도구나, 마도구 일지도 모르는 것들은 전부 찾아내! 만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면 너희 모두 오늘 제 발로 퇴근하지는 못할 거야.”
하녀들은 아이샤가 시키는 대로 했다. 가구를 밀고 옮기고,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고, 필통 화병 벽시계 등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뒤져보았다. 한동안은 별다른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분명 마도구는 몇 개 발견했지만 그건 전부 아이샤가 설치한 것들이었다. 한 하녀가 책장 위에 있던 장식용 도자기의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꺄악!”
도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에 놀란 하녀는 깜짝 놀라 도자기를 떨어뜨렸다. 와장창! 도자기가 박살 났고, 그 안에서 작고 검은 귀뚜라미가 뛰쳐나왔다.
“벌레다!”
“어서 잡아!”
마도구를 찾던 하녀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벌레에 혼비백산했다. 늘 많은 사람들이 관리하긴 했지만 황궁도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가끔 벌레가 나왔다. 하지만 벌레가 나오는 모습을 높으신 분께 들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랬다가는 사용인들이 청소를 게을리했다고 회초리를 맞곤 했으니까.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귀뚜라미를 한 하녀가 밟아 죽이려고 하던 그때였다.
“잠깐! 그거 죽이지 마.”
그렇게 말한 사람은 놀랍게도 아이샤였다.
“혹시 모르니까 생포해. 실수로라도 죽였다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아이샤의 판단은 옳았다. 궁중 마도학자에게 귀뚜라미를 보인 결과, 그 귀뚜라미는 마도구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건 정말 놀랍군요! 이런 작은 생물에게 도청 마법을 걸어놓다니요. 게다가 지속시간도 굉장히 깁니다! 이 정도의 마도구를 만들어내려면 최소 5서클, 아니 6서클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이 마도구는 어디서 만들어진 거야?”
“사실 그게 제일 놀라운 점입니다. 이런 건 그 어떤 마탑에서도 만들지 않아요. 예순 평생 이런 건 처음 봅니다.”
궁중 마도학자는 마도구 귀뚜라미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린 듯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궁중 마도학자도 관심을 보일 정도로 수준 높은 마도구가, 누가 만들었는지 불명이라니!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들은 제국법상 필히 등록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수준 높은 마도구를 만든 마법사를 궁중 마도학자가 모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마도구를 확보하기까지 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니! 아이샤는 너무 화가 나고 약이 올라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진정하자. 분명 알아낼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궁중 마도학자가 모른다면 마탑이나 마법 아카데미 소속은 아닐 거야. 무소속의 마법사일 가능성이 큰데…….’
그때 아이샤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벨리아의 노예 중에 마법사가 있었지.’
그의 마법 재능에 대한 소문은 궁궐 내에서도 자자했다. 노예라는 신분이 가리지 못하는 천재라는 말조차 있어, 아이샤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이름이 분명…… 케일럽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이샤가 알기로 케일럽은 3서클이었다. 물론 그 나이치고는 대단한 실력이라고 하지만, 이런 수준 높은 마도구를 만들어내기에는 역시 급이 떨어진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 시점에서 이미 케일럽에 대한 의심을 거두겠지만……. 아이샤에게는 케일럽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아이샤는 케일럽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황궁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아이샤는 테라스에서 시녀들과 한담을 나누다가 정원의 길을 지나가는 미소년을 보았다. 보드라울 것 같은 갈색 곱슬머리, 강아지처럼 순하게 쳐진 눈매. 서글서글한 눈동자. 그 누구라도 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에 아이샤와 시녀들은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세상에, 황궁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요?”
“어려 보이지만 저런 연하남이라면 전 좋아요.”
“아마 황후가 얼마 전 들여온 하인 중 한 명 같은데요. 대단한 미소년에다가, 마법 신동이라고 하더군요.”
아이샤는 티스푼으로 찻잔을 저으며 그를 보았다.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면 기댈 곳이 필요하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