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혼하시겠다는 결심을 거둬 주세요2021.06.13.
“하지만 황비 전하, 노예를 서른 명이나 황궁에 들이는 일에 대체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건 선대 황족들을 모욕하는 일이나 다름없다고요.”
“자신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여자에게도 그렇게나 관대하시다니, 정말 황비 전하의 인품은 훌륭하시다니까요.”
귀부인들은 아이샤의 인품에 감탄하면서도 계속해서 로벨리아의 험담을 이어나갔다. 아이샤가 말이 심해지는 것 같으면 말리는 척은 해도 로벨리아의 험담을 결코 단호하게 막지는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슈워츠코프 공작님,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으시던데.”
잔뜩 감정적으로 된 귀부인들의 화살이 조용히 앉아만 있던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아이샤 역시 그쪽을 돌아보았다. 노먼 슈워츠코프 공작. 그는 제국에서도 희귀한 은발과 붉은 눈을 가진 미남자였다. 그는 실내에서도 장식 없는 검은 정복의 단추를 목까지 잠갔으며 단정히 빗은 머리카락은 한 가닥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서늘하고 냉철한 눈빛 하며 굳게 다문 선이 고운 입술, 빈틈없는 복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그의 긴 은빛 속눈썹 위로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이 드리워져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만.”
“그냥 듣고만 계시면 안 되죠. 슈워츠코프 공작님은 황비 전하께 큰 은혜를 입으셨잖아요. 그런데 황후의 잘못된 행동에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그래서 부인의 말씀은, 저더러 황후 폐하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담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과 똑같이 말입니까?”
귀족들의 사교계에서는 거의 들을 일이 없을 정도의 직접적인 말. 그 말을 하는 목소리는 몹시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평온하지 못했다.
“허, 험담이라뇨! 왜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 저, 저희들이 이제껏 나누던 대화는, 그저 부정의한 행동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었을 뿐……!”
우아하게 치장한 귀부인의 얼굴은 어디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가 목소리를 벌벌 떨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던 그때. 슈워츠코프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있어서 더 즐거워질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군요.”
“공작님……!”
귀부인들은 물론 아이샤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슈워츠코프 공작은 이 자리의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듯 아이샤를 보고 말했다.
“황비 전하, 진실된 충의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동방의 격언 중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무리와 어울리다 보면 보고 들리는 것이 그릇된 것뿐이니 결국 그릇된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 하하. 언제나 좋은 말씀 감사해요, 공작님. 참고할게요.”
“그럼 저는 이만.”
아이샤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슈워츠코프 공작은 자리를 떠났다. 키가 큰 그는 고작 몇 걸음 만에 응접실을 가로질러 그녀들이 있는 공간을 빠져나갔다.
“대체 뭐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가 사라진 뒤에야 귀부인들이 일제히 불만을 토로했다.
“슈워츠코프 공작님, 점잖은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에요. 어떻게 이런 모욕을 주곤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나실 수가!”
“저러니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이샤 황비님을 제외하고는 한 분도 없는 거 아니겠어요?”
아이샤는 굳이 그녀들을 막지 않았다. 공작을 맹렬히 성토하는 귀부인들을 진정시키는 대신, 그녀는 고양이의 보드라운 등털을 만졌다.
‘슈워츠코프 공작, 은근히 고집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 아래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 고집을 적당히 꺾어두는 것이 좋겠어. 앞으로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말이야.’
***
“황후 폐하, 황후 폐하!”
지난 밤늦게까지 세무법 공부를 하다가 잠에 들었던 나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으음, 오 분만…… 아니, 십 분만…….”
“폐하, 지금 늦잠 주무실 때가 아니에요!”
“제발 일어나서 이 신문 좀 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시녀들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목소리가 왜 그래? 너희 울었니?”
시야가 흐린 눈을 벅벅 비비고 보니, 그녀들의 눈가가 붉어진 것이 보였다.
“아니에요, 저희 안…… 울었어요.”
“근무시간에 울면 안 되잖아요.”
“너희가 기계도 아닌데 근무시간이라고 안 울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너희 울었지?”
“저, 정말 아니에요. 그보다 이 신문 좀 보세요, 폐하.”
그 말과 함께 눈앞에 신문이 들이 밀어진 탓에 나는 그것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시녀가 보여준 것은 신문의 사설 평론란이었다. 자신이 귀족이라고 밝힌 익명의 투고자는 이런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교도 노예를 서른 명이나 황궁에 들인 황후의 비행을 규탄한다! 이것은 선대 황족에 대한 능멸이다!】
“이런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에요, 폐하.”
“저희가 수도의 모든 신문들을 확인해봤는데, 일곱 개나 되는 신문에 비슷한 논지의 사설 평론이나 기사가 실렸어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요. 황후 폐하께서는 노예들이 학대당하는 모습에 분노해 데려오신 것이고, 일 년 후에는 전부 자유민으로서 독립시켜주겠다는 계획까지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속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비난을 하다니…….”
그렇게 말하던 시녀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모시는 분 앞에서 우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비난하는 기사를 본 순간 나는 기뻤다. 지난번에 그레이 마켓에 다녀온 것으로 비난받을 때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가? 왜 뒤늦은 지금 갑자기 이런 여론이 불거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비난을 당하고, 나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수록 이혼당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하지만…….
‘비난받는 것이 난 정말 기쁜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녀들은 날 정말 좋아했다. 빙의 전에도 로벨리아를 잘 따른 모양이지만, 얼마 전에는 이런 말까지 들었다.
‘폐하께서 성격이 바뀌셔서 정말 좋아요.’
‘그러니?’
‘네. 폐하께서 한없이 다정하고 자비로우실 때는 폐하께 감사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이제는 그 누구도 폐하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못하잖아요. 폐하의 바뀐 성격이 정말 멋있어서 동경하게 되어요.’
‘그렇다고 함부로 따라 하지는 말렴. 네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아이, 알아요. 황후 폐하만이 하실 수 있는 행동이라는 거. 그래서 더 멋지고, 부러워요. 저 말고 다른 애들도 다들 그렇다고 했어요.’
그녀들은 당황스럽게도 내가 로벨리아가 된 뒤, 로벨리아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싫지는 않았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이혼을 할 생각밖에 없고, 그럼 그녀들과도 헤어져야 할 테니까.
‘차라리 이 아이들이 날 진심으로 위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마음이 편했을까.’
하지만 그건…… 내 예상보다도 훨씬 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 낯선 세상에 떨어진 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의 덕택이 컸으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말했지, 난 이혼을 하려고 이런 짓들을 하는 거야. 그러니 내가 비난당하는 것에 걱정하고 슬퍼할 필요 없단다. 나는 비난당하면 내 목적에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쁘거든.”
“그래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폐하께서 비난당하시면 마음이 아파요. 폐하께서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저희가 아는데…….”
“폐하, 역시 이혼을 안 하시면 안 될까요? 황제 폐하와 함께 행복하게 사시면 안 될까요?”
그녀들의 진심 어린 걱정에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이런 걱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구나.’
전생에 나의 가족들은 남만도 못한 관계였고, 제대로 된 친구나 애인 역시 가져보지 못했으니까.
‘이런 기분이었구나. ……다른 사람이 날 진심으로 위한다는 건.’
하지만, 가슴이 이렇게나 아픈데도 불구하고. 나는 잔인한 말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황제 폐하의 곁에서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단다.”
“어째서요?”
“황제 폐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든. 그분은 오로지 황비밖에 관심이 없으시고, 황비만을 사랑하시는 분이야.”
“하지만 저희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 황제 폐하는 폐하를 사랑하세요. 황비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로지 폐하만을 진심으로 연모하고 계신다고요.”
하지만 그녀들의 말은 내게 와닿지 않았다.
‘너희가 원작을 읽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생각했다.
‘지금은 약간의 변덕을 부릴지 몰라도 결국 그는 아이샤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야. 왜냐하면 그는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고, 아이샤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시녀들이 애타는 얼굴로 말했다.
“폐하,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엇이니?”
“지금은 황제 폐하의 마음을 믿지 못하신다고 해도, 만일 황제 폐하께서 폐하만을,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실 거라는 확신이 드신다면……. 그때는 이혼하시겠다는 결심을 거두어 주세요. 황제 폐하를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어리석은 소원이구나. 애초에 그런 확신이 들 리가 없어. 그분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면 약속해주셔도 상관없잖아요. 제발요, 폐하. 약속해주세요.”
‘나를 위해 헌신하는 이 아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밖에 없다니.’
그렇게 생각한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할게. 메스타포에 걸고 약속할게.”
“메스타포요!”
“정말이죠, 폐하? 그렇게 해주시는 거죠?”
“그럼. 괜히 메스타포에 걸은 줄 아니.”
고작 이 약속 하나에 그 아이들은 눈물범벅인 얼굴 가득 미소를 띄웠다.
“저희 정말 열심히 할게요, 폐하.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진심을 믿으실 수 있도록이요.”
“너희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니? 됐고 내가 시키는 일이나 잘하렴.”
“그건 물론 이제껏 계속 그랬듯 잘하고요.”
시녀들이 방긋방긋 웃자 나는 안심이 됐다. 그제서야 내 얼굴에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잘 풀려서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역시 이상하단 말이야. 요즘 시기에 갑자기 노예를 사들인 것에 대한 여론이 떠오르다니.’
시녀들이 조식을 들여오겠다며 침실을 떠나자, 나는 차가운 얼굴로 생각했다.
‘역시 수상한 건…… 아이샤인데.’
얼마 전 금요 만찬회에는 아이샤 역시 참석했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존재감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나와 알렉산드로스가 사이좋은 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샤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예상이 갔다. 틀림없이 알렉산드로스의 애정과 황실 내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아이러니하네. 아이샤와 내가 원하는 게 같다는 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났다. 금요 만찬회 뒤 아이샤는 계속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했다고 들었지만, 내가 황비궁에서 황후궁으로 이사를 갈 때는 인사를 나왔다.
‘황후 폐하, 가시는 건가요? 한 지붕 생활도 즐거웠는데 이렇게 일찍 떠나시다니 아쉬워요.’
내가 처음으로 황비궁에 왔을 때 그녀의 극렬했던 거부반응을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빈말치레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렴. 우리가 그런 빈말이나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니? 「한 가족」인데.’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금요 만찬회에서 아이샤가 나를 도발했던 말을 돌려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