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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그녀가 갑이고 내가 을 (46/151)

46. 그녀가 갑이고 내가 을2021.06.10.

로버트는 훌륭한 비서관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작은 실수를 했다. 황후궁 완공 보고서에서 로벨리아가 주문한 가구에 대한 정보를 빠뜨린 것이다. 그것은 로벨리아가 평소 워낙 많은 주문을 하기에 일어난 일이었고, 어쩌다 보니 벌어진 아주 작은 실수일 뿐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6549682312233.jpg“아아, 이런…….”

알렉산드로스는 곤란한 듯 웃다가도 아주 한순간 냉랭한 시선을 비서관에게 던졌다. 그는 인간적인 정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그를 모신 자일지라도 자비가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비서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처벌을 예감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16549682312233.jpg“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 그래, 취향과 주관이 뚜렷한 그대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부를 조성하고 싶었을 텐데. 그대를 놀래켜 주고 싶었던 나머지 내가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 미안하게 됐군, 로벨리아.”

상단주 앞에서까지 망신을 주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16549682312242.jpg‘요즘 나한테 사과하는 일이 잦아진 것 같단 말이야.’

로벨리아의 머릿속에 문득 예전의 일이 생각이 났다.

16549682312233.jpg‘그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 진심 없는 사죄 정도야 얼마든지.’

16549682312233.jpg‘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원하는 일이 아니겠지.’

16549682312233.jpg‘그리고 나 또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분명 사과를 할 수 있지만 진심이 아닐 것이기에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6549682312242.jpg‘그렇다는 건 지금 하는 사과는 진심이라는 걸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안건과 지금은 문제의 경중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그때의 생각이 나서 묘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 이렇게 정중한 사과도 할 줄 아는 남자였구나 싶기도 하고.

16549682312242.jpg‘뭐, 알렉산드로스가 사과를 할 줄 알건 말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곧 남이 될 사이니까 말이야.’

로벨리아는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16549682312269.jpg“폐, 폐하께서 사과를 하시다니……!”

상단주의 생쥐 같은 수염은 비죽 섰고 턱은 빠질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반응은 아니었으나 비서관 역시 충격받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로벨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16549682312242.jpg“뭐, 됐어요.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16549682312233.jpg“내가 선물한 것과 그대가 주문한 것 중 어느 쪽의 가구를 쓸 생각이지?”

16549682312242.jpg“그야 당연히 제가 고른 것을 써야죠. 곧 남이 될 사람의 선물 따위를 받아서야 되겠어요?”

제국의 황제를 대하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만방자한 로벨리아의 태도에 경악하고 벌벌 떠는 것은 비서관과 상단주 뿐이었다. 어느덧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16549682312233.jpg‘곧 남이 될 사람이라니.’

그녀의 말에 알렉산드로스의 뱃속이 기분 나쁘게 울렁였다. 그런 생각도 곧 바뀔 것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던 여유 같은 건 이제 그에게 없었다. 그녀는 어느 때고 자신에게서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물을 쳐도 잡히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가는 사냥감 같았다.

16549682312233.jpg‘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빈틈을 보여서는 안 돼.’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여유롭기 짝이 없던 남자인 알렉산드로스에게 로벨리아는 인생 최초의 긴장감이었다.

16549682312233.jpg‘작은 것이라도 좋다. 찬물에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천천히 나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해.’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입을 열었다.

16549682312233.jpg“로벨리아, 그대는 이혼 후의 생활을 계획하고 있지. 드레스와 보석을 모으는 것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지 않나?”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로벨리아처럼 계획성과 지략이 뛰어난 여자가 아무런 계획 없이 이혼하려 할 리는 없었다. 이혼 시 여성은 보석과 드레스만을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과 드레스와 보석에 치중되어있는 로벨리아의 사치 행각을 연결해보면 그녀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녀가 회계와 세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 역시 서적 구매 영수증으로 알고 있었다. 허를 찔린 로벨리아는 움찔했지만 짐짓 태연한 척 대답했다.

16549682312242.jpg“네. 그게 왜요?”

16549682312233.jpg“내가 선물한 가구들만은 예외로 이혼 시 가져갈 수 있도록 특별한 서류를 작성해주도록 하지.”

알렉산드로스는 뱀처럼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49682312233.jpg“아까 상단주에게도 들었겠지만 그 가구들은 아주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반면 그대가 고른 가구들은 아무리 정성 들여 골랐어도 아쉽게도 제국법상 이혼 후 가지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 가구들을 고를 건가?”

로벨리아와의 이혼. 그것을 입에 담기는커녕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의 선물을 결코 받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아주 값진 드레스 선물을 주었을 때도 그것을 무시하고 한 번도 입지 않은 그녀가 아닌가?

16549682312233.jpg‘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할 수 있지.’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전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혼’이라는 말에 로벨리아는 상당히 솔깃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16549682312242.jpg‘또 무슨 꿍꿍이지? 이 인간이 이혼을 전제로 한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인데.’

로벨리아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답게, 그는 조금도 빈틈이 없는 다정한 호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꼭 선물을 하고 싶은 것 외에는 아무런 속셈도 없는 사람처럼.

16549682312242.jpg‘그의 제안에 넘어가는 것은 결국 그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어.’

하지만, 이혼할 때 위자료로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해준다는 그의 제안은 솔깃했다. 그가 선물한 가구들은 딱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있어 보였으며, 그 양도 어마어마했다.

16549682312242.jpg‘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제국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야.’

혼자 사는 여자를 무시하고 만만하게 볼 사람이 많다는 사실 정돈 알고 있었다. 어떤 세계에서든 힘 약한 사람에게 돈은 다다익선이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 돈들이 결국 그녀를 누구도 깔보지 못하게 하며,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시녀들은 생각했다.

16549682312269.jpg‘우리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선물을 받아들이시도록 해야 해!’

16549682312269.jpg‘그래야 두 분의 관계가 진전될 수 있어!’

그녀들은 그런 뜻이 담긴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로벨리아에게 다가가서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16549682312269.jpg“황후 폐하, 정말 근사한 선물이에요. 저는 이렇게 멋지고 귀해 보이는 가구는 본 적이 없어요.”

16549682312269.jpg“황후 폐하의 품격에 그 무엇보다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16549682312269.jpg“이런 멋진 가구들이 가득한 방은 얼마나 멋질까요? 또 그런 방을 거니시는 황후 폐하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요?”

16549682312242.jpg“내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렴. 아무리 그래도 곧 이혼할 사이인 사람의 선물을 받을 수는 없지 않니?”

16549682312269.jpg“아이, 폐하. 또 그러신다.”

16549682312269.jpg“제발요, 폐하. 저희의 얼굴을 봐서라도 저 멋진 선물을 받아주세요.”

16549682312269.jpg“정말이요. 저런 아름다운 가구들을 어디 처박아두어 좀이 슬게 만들거나 불태우거나 묻어버렸다가는 제가 억울해서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로벨리아는 당황했다. 평소 시녀들은 그녀를 잘 따랐기 때문에, 시녀들이 이렇게까지 한목소리로 떼를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16549682312242.jpg“너희들 정말 오늘따라 왜 이러니?”

16549682312269.jpg“제발 부탁드려요, 폐하. 제 평생의 소원이에요.”

16549682312269.jpg“저는 나중에 백발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서 청춘을 회상할 때, 아, 그 멋진 가구들을 버리다니! 그러지 말 것을! 하면서 회한에 젖어 엉엉 울지도 몰라요.”

결국 로벨리아는 시녀들의 애원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16549682312242.jpg“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좀 징징대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

16549682312233.jpg“현명한 선택이야, 로벨리아. 상단주! 어서 가구들을 도면대로 배치하도록.”

16549682312269.jpg“알겠습니다, 폐하!”

16549682312269.jpg“와! 폐하, 정말 감사해요.”

16549682312269.jpg“폐하, 진심으로 사모해요!”

알렉산드로스와 시녀들의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에 로벨리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일꾼들이 황후궁에 바삐 가구를 채워 넣고 있었다.

16549682312242.jpg‘이런!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잖아. 하지만 그의 제안이 솔깃하게 다가오던 참이었으니, 이건 결국 내 책임이기도 하지.’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시녀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가 바라던 대로 되었다. 계략이 성공한 것도 그렇지만, 그가 오래 준비하던 선물을 로벨리아가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순수하게 기뻤다. 하지만 그저 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으로 로벨리아의 마음이 돌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 단계의 계단은 올랐으나, 여전히 그녀는 계단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가 버릴 듯이 불안한 모습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핥았다. 그녀를 향한 갈증에 목이 탔다.

16549682312233.jpg‘이 불안감을 잠재울 방법은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손에 넣는 것 말고는 없겠지.’

그녀를 손에 넣고 말리라. 결국 자신의 것으로 하고 말리라. 그러지 못한다면 적어도 도망치지는 못하게 만들리라.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그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16549682312233.jpg“그녀의 기분만을 살피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안달하다니, 이래서야 그녀가 한 말대로 그녀가 갑이고 내가 을이 되기라도 한 것 같군.”

알렉산드로스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16549682312233.jpg“을이 된 것 같다니, 신선한 기분이군. 나쁘지 않은데.”

자신은 여전히 여유롭다고,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듯이,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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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벨리아가 황후궁으로의 이사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동안, 아이샤는 그녀대로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바로 로벨리아와 그녀의 노예들에 대한 논란을 만들어내기 위한 계획이었다. 비록 알렉산드로스의 총애가 로벨리아에게로 옮겨졌다고 해도 아이샤의 영향력이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아이샤는 성국에서 온 성녀였고, 또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에게 잘해주는 것이 잠깐의 변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녀의 명망과 친위대는 여전히 굳건했다. 소문을 내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저 지난번 기자회견 때 더 큰 이슈로 잠시 묻혀있던 시한폭탄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16549682312269.jpg“이교도 노예를 서른 명이나 들이시다니 황후 폐하도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16549682312269.jpg“게다가 그 노예들을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 들이시다니요.”

16549682312269.jpg“노예를 사들이는 것 자체가 귀족으로서의 수치일진대 하물며 황후 폐하께서 그런 짓을 하시다니.”

16549682312269.jpg“어째서 지금껏 이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걸까요?”

친위대 중 한 사람이 개최한 작은 찻자리. 그곳에서 귀부인들은 로벨리아의 험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진행되는 대화를 들으며 아이샤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새하얀 장모종의 고양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16549682424524.jpg“냐아아아.”

고양이가 나른한 듯 하품을 했고, 아이샤는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주워섬겼다.

165496824513.jpg“너무들 그러지 마세요. 황후 폐하께서도 어떤 사정이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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