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이사 선물2021.06.06.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와의 접점이라니, 그런 거 없는데?”
사실 알렉산드로스 쪽에서 만나려는 시도를 하긴 했다. 식사를 하자는 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둥 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이 왔으니까. 어쩌면 자기도 지난번에 키스한 일이 신경 쓰인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와 불필요한 일로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전부 거절했다.
“그런 건 왜?”
나는 가구 카탈로그에서 눈을 떼고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들의 얼굴에 어린 실망의 기색을 눈치챘다.
“왜들 그러니? 꼭 성 무하 기념절에 선물을 받지 못한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때였다.
“황후 폐하, 다녀왔습니다.”
케일럽이 나타났다. 그는 마법 수업을 듣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케일럽. 오늘 수업은 어땠니? 선생의 말은 잘 듣고 있겠지?”
“물론이죠. 황후 폐하께서 친히 선생님의 말씀에 잘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분의 명령인데 제가 감히 불응하겠어요.”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은 없니? 선생 말로는 네 나이에서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도를 나가고 있다고 하던데.”
“예, 황후 폐하께서 늘 살펴봐 주신 덕에 즐겁게 공부하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케일럽은 믿음직하고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사실 전생의 나이로 따지면 동생이 아니라 조카뻘 정도는 될 것이다. 예의가 바르고 다정한데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닫는 케일럽은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아이였다.
‘케일럽은 이 피곤한 황궁에서 몇 안 되는 힐링이라니까.’
그때 시녀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케일럽, 황비에게서 이상한 낌새는 못 느꼈나요?”
“네? 이상한 낌새라고요?”
“요즘 이상하게 얌전하기도 하고, 황비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케일럽이 수업을 듣는 곳은 황비가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우니까 뭔가 귀에 들어오는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시녀의 말에 케일럽의 얼굴에 기묘한 빛이 돌았다.
“황비 전하에 대해서는…….”
나는 한순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의 기미가 어리는 것을.
‘저렇게 착한 케일럽이 비웃음? 에이, 잘못 본 거겠지.’
“황비 전하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아, 특별히 수상한 거동은 없나요?”
“네. 무언가 확실하게 알게 되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케일럽은 무척 선량하게 웃었다.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케일럽이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야죠.”
“케일럽은 황후 폐하께 지극정성이니까 말이에요.”
“저는 황후 폐하를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니까…….’
이혼할 때 즈음에는 케일럽 역시 독립시켜야 할 텐데, 지금 모습을 보니 그때 그가 독립을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황후궁 인테리어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어갔다. 가구 장인들은 정해진 시일에 맞추어 작업을 착착 해내었으며, 공사 역시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완공 당일.
‘좋아, 황후궁의 수리가 다 되었다고 하고, 가구와 내부 장식품들도 전부 오늘 올 예정이야.’
나는 체크리스트의 항목에 하나하나 줄을 그으며 생각했다.
‘인력을 충분히 동원하기만 하면 가구를 배치하는 일은 오늘 하루 안에 끝낼 수 있겠지. 그러면 드디어 내가 꿈꿔왔던 집이 완성되는 거야.’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꿈꿔왔던 황후궁을 곧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이제 아이샤와의 아웅다웅했던 한 지붕 아래 생활도 안녕이라고.’
그런데 황후궁의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낯선 감정이 신경을 긁어댔다. 금요 만찬회에서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 아무도 감히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로벨리아에게 키스를 한 것은 자신으로서도 예상 밖이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데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로벨리아는 발버둥쳤지만 결국 자신의 계략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된 것이다.
‘그런데, 전부 내 계획대로 되었을 텐데…….’
고요한 집무실, 홀로 남은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어째서 이렇게 초조한 것이지?’
하루 종일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다. 그날, 금요 만찬회가 있은 뒤로 계속……. 알렉산드로스는 피곤함을 느끼며 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생각이 났다. 자신이 신경을 써주자 일순 괴로운 듯한 얼굴을 하던 그녀의 얼굴. 그 깊게 팬 미간과 쓸쓸한 눈빛. 그때 로벨리아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눈을 했다. 그녀 옆의 빈자리는 그 따위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녀가 보통 사람과는 달라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로군.’
알렉산드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굳이 그런 얼굴을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이 나를 옆에 둔 채로!’
그는 뜨거운 한숨을 토하고는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그녀의 허리를, 손을 붙잡았던 그 손. 자신이 곁에 있어도 그녀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 것만 같았지만 자신은 달랐다. 그녀가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눈에 들지 못해 안달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더 그녀에게 진심이었고, 그녀는 생각보다 더 자신에게 넘어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녀는 나의 것, 적어도 곧 나의 것이 될 예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껏 그녀는 자신이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금요 만찬회 이후, 그녀를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달라졌다. 마치 실체 없는 연기처럼 손을 움켜쥐어도 흩어질 것 같고, 지나치게 큰 새장에 가둔 파랑새처럼 창살 사이로 날아갈 것 같다. 도저히 ‘자신의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그것은 그녀를 감시하는 인원을 아무리 늘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인재를 탐하는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으나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으로서도, 이런 감정은 난생처음이었으므로. 그때였다. 그를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비서관 로버트였다.
“황후궁의 수리가 곧 완료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는 공손하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보고서를 훑어본 뒤 말했다.
“이 정도 기간이면 아직 무언가를 준비하기에는 충분하겠군.”
“예. 황후궁 완공 기념 선물을 준비하시겠습니까?”
“그래.”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이 괴롭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금의 그는 그녀를 놓치거나 포기하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구를 선물할 생각이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지금, 황후궁 완공의 순간은 큰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
‘제국의 주인이 한 사람을 손에 넣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수도 없이 많지.’
알렉산드로스는 되뇌었다.
‘그녀가 아무리 특출날지언정 그중 어떠한 것에도 걸려들지 않을 리는 없어. 그러니 하루빨리 내게 넘어와 주었으면 좋겠군. 내가 이성을 잃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기 전에, 부디.’
***
“이게 다 뭔가요?”
경악한 로벨리아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보고 호인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보다시피.”
“보다시피가 아니고요. 좀 제대로 말해보세요.”
“황후궁의 수리가 거의 다 됐지 않나. 새집엔 새 가구를 들이는 법이니 황후에게 어울릴만한 디자인으로 새로 맞췄지.”
그들은 황후궁 앞에 있었다.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상단의 마차가 늘어서 있었고, 상인들이 수백 개는 족히 될 법한 가구를 내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 일에 얼마나 열과 성을 쏟아부으셨는지 모릅니다. 최상급의 호두나무 목재에 금과 백금, 루비와 사파이어를 장식해 최고로 호화로운 가구를 제작했지요.”
쥐 같은 수염을 기른 상단주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보십시오, 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것들을 짜내느라 어찌나 많은 장인들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의 가구를 만들기 위해 전세계의 장인들을 수소문하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니까. 이런 쪽이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지.”
알렉산드로스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이런 놀라고 값진 선물에도 불구하고 로벨리아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골이 다 띵해질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 가구들이 수레에 잔뜩 실려 황궁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겹치게 되다니!
“바쁘신 와중에 송구합니다, 폐하. 가구의 배치는 이 도면대로 지시하면 되겠습니까?”
“어디 이리 보여봐라. 로벨리아, 이걸 봐줬으면 좋겠군. 기존의 배치와 거의 비슷하게 하되 추가된 가구들이 있어서 수정한 부분이 있다. 그대의 동선과 편의성을 고려해 수정한 건데 어떤가?”
로벨리아는 그제서야 정신적 충격에서 깨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느샌가 도면까지 보여주며 내 의사를 묻고 있었다. 상인과 일꾼들 역시 가구를 황후궁으로 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를 수 없게 된다.
“잠깐만요. 대체 왜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신 거죠?”
“응?”
알렉산드로스는 의아한 듯 눈을 떴지만, 옆에 있던 상단주는 기함을 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진노해서 나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지 독 안에 든 쥐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자기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긴 알렉산드로스가 자비 없는 폭군이라고 원작에도 쓰여있긴 했지만.’
물론 그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단주와 비서관의 떨리는 동공 앞에서 로벨리아는 쐐기를 박아넣었다.
“저에게는 제 나름의 인테리어 계획이 있었고, 가구도 전부 주문 넣은 상태였다고요. 황후궁 공사에 맞추어 오늘 배송 예정이었고요. 그런데 제게는 언질 한 번 없이 멋대로 가구를 주문하시면 어떻게 해요?”
황제의 면전에서, 심지어 그가 하사한 선물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난하다니! 다른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