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가 날 사랑하는 것이 운명인데2021.06.03.
박살난 도자기 인형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아이샤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내고 그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본래 사랑스러운 발레리나의 형상을 띄고 있었으나 지금은 비참하게 망가진 도자기 인형과 금이 간 탁상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왜 깨져있지? 내가 아끼던 거였는데.’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도자기 인형을 던졌다.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며 던진 인형은 테이블 위의 탁상시계에 부딪쳤다. 그 덕에 예쁜 레이스 보와 탁상시계, 꽃병으로 장식되어있던 테이블 위는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으로 엉망이 되었다.
“아, 안 돼.”
아이샤는 그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았다. 그러다가 떨리는 손을 뻗어 도자기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내가 물건을 던지다니. 난 그래선 안 돼.”
아이샤는 허겁지겁 치마폭에 도자기 조각을 던져넣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녀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건 사랑스럽지 않잖아.”
화가 난다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여자 따위 그 누구도 사랑해줄 리 없었다.
“아야!”
아이샤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손가락을 들여다보니, 도자기에 베여 붉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해야…….”
당황하던 그녀는 우선 치맛자락으로 손가락을 둘둘 감았다. 새하얀 치맛자락 위에 검붉은 핏물이 번졌다. 그녀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마폭에 감쌌던 도자기 조각 몇 개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어버린 건지.
“알렉산드로스.”
아이샤가 끊어질 듯 가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을 감으면 어젯밤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의 다정한 눈빛. 그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단단한 손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듯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주던 배려. 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를 귀찮게 만드는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 들던 그 순간. 자신에겐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입맞춤……. 아이샤는 그 순간 자신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이런 건 이상해.”
아이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희고 가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내 것이어야 하잖아.”
흰 손가락 사이에서 검은 눈동자가 번득 빛났다.
“그게 이 이야기에서 정해진 ‘운명’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알렉산드로스가 ‘운명’조차 거슬러서 그 여자를 선택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자신을 두고.
‘그 여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건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할 한국의 정보를 그 여자도 알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리 뒷조사를 해보아도 나오는 정보가 없다는 사실에 아이샤는 질려 버렸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 여자를 제거해버리는 편이 훨씬 낫겠지. 어차피 사라진 사람이 이세계의 정보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알 게 뭐겠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위험한 짓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고작 몇 달 만에 이런 잔혹한 생각을 하게 되는 자신이 두려웠다. 몸이 떨렸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원래 황궁이란 그런 곳이잖아. 권력이란 그런 거잖아. 제국에서 제일 높은 여자라는 권력을 손에 넣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잖아.’
아이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생각했다.
‘게다가, 모든 건 그 여자가 잘못한 거잖아! 그 여자 역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뒤에서 얼마나 끔찍한 짓을 수없이 저질렀겠어?’
아이샤가 생각하기에 운명을 거스르는 방법은 그런 것밖에 없었다. 입에 담을 수도 없이 끔찍한 일들. 그만큼이나 운명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엇나간 순리를 되돌려놓기 위해, 성녀로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
아이샤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래,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갈 거야. 알렉산드로스도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강렬한 감정이 그녀의 이성을, 양심을 마비시켰다.
‘내가 뺏긴 것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쯤은 할 수 있어. 그게……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하잖아!’
알렉산드로스의 사랑을, 위치를, 권력을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채 살아남는 것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가 원해서 황비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낸 성국, 추악한 음모, 그녀를 이 자리에 올려놓은 모든 것들이 그녀가 추락한다면 그녀를 집어삼키려 덤벼들 것이다.
‘그러니까 난 정신 차려야 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 아이샤의 얼굴은 누구라도 넋을 나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이세계에서 온 성녀로 추앙받던 그녀의 얼굴에는 순수함이 아니라 추악하게 얼룩진 독기와 악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좋아, 생각하자, 생각해.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론 로벨리아가 죽어버리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녀를 암살하는 것은 여전히 겁이 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황후였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총애받고 있었다. 이제 막 제국에 온 뜨내기인 자신이 어쭙잖게 암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성국의 위광을 뒤에 업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나마 폐후 시키는 정도가 제일 현실적인 판단이겠지. 뭐, 폐후 시킨 뒤 황후도 뭣도 아닌 여자가 되면 그때 처리해도 되고.’
하지만 어떻게 폐후 시키느냐가 문제였다. 로벨리아는 황제에게 총애받고 있었으니까. 그는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손톱을 계속해서 물어뜯던 아이샤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는 황비가 되어서 지난 반년 동안 제국법 법전 한 번 훑어보지 않고 대체 뭘 했단 말이니?’
로벨리아가 얼굴 가득 사악한 비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했을 때는 모멸감에 사로잡혀 아무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아주 좋은 방안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아이샤는 법전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궁내부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법전을 읽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황후를 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로벨리아가 여태껏 패악을 떨고 다녔어도 문제없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 테다.
‘법전을 다 읽어봤다고 했으니,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짓들을 벌이고 다니는 거겠지. 간악스러운 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제국법에 따르면 황후를 폐하는 조건은 5가지였다. 1. 황후가 역모를 꾀하였을 때. 2. 황후가 황족 시해의 죄를 범했을 때. 3. 황후가 외국을 등에 업고 조국의 안위에 해가 되는 짓을 저질렀을 때. 4. 국가의 여론이 황후에게서 현저히 뒤돌아섰을 때. 5. 그 외 황제가 판단하기에 황후가 황실의 권위를 현저히 실추시켜 조국에 피해를 줄 때. 여기서 1~3번은 너무 어려운 조건이라 자신이 꾸며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4~5번은 다르다. 1~3번과 달리 조건이 모호하며 판단이 주관적이기에 꾸며낼 여지가 있어 보였다.
‘이미 5번은 충분히 충족된 것 같은데 폐후는커녕 총애를 하다니. 알렉산드로스도 정말로 이성을 잃었구나.’
아이샤는 생각했다.
‘그 여자가 약이라도 썼나? 아니면, 마법이나 저주를 걸었나?’
로벨리아가 알렉산드로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법이나 약을 사용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그 사실을 밝혀내는 순간 황족 시해죄로 폐후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점은 따로 조사해보아야겠어.’
로벨리아가 마법이나 약을 사용했다면 좋겠지만, 만일 아니라고 하면 결국 그녀를 폐후시킬 방도는 순수하게 자신이 스스로 짜내야 하는 셈이다. 4~5번의 본질은 결국 여론전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얼마나 이성을 잃고 로벨리아에게 푹 빠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여론이 거세어진다면 그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다행히…… 여론전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일 중에 하나니까 말이야.’
자신의 시녀들을 통해 최근 궁내의 여론이 로벨리아에게 무척 호의적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고작 로벨리아가 소유한 노예 몇 명이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그녀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다니!
‘…… 일단은 이 부분을 건드려보아야겠어.’
라만차의 거리가 알렉산드로스의 소유라는 것이나,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의 관계에 대한 이슈 때문에 묻혔지만 로벨리아가 노예를, 그것도 30명이나 데리고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파헤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궁인들은 멍청하게도 납득한 모양이지만 귀족들은 그러지 않겠지. 그들은 그 무엇보다 겉으로 보이는 품위를 중요시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아이샤가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짓눌린 입술 사이로 악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은 세상이 전부 제 것 같겠지? 내가 반드시 모든 것을 빼앗아 주겠어. 그때 와서 내 발밑에서 설설 기어도 이미 늦었다고.”
*** 혼란스러운 사건만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나는 간만에 긴장감을 풀어주는 희소식을 들었다. 바로 황후궁의 공사가 거의 다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샤의 공간을 침범하여 땅따먹기를 하는 것도 재밌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에게도 그렇게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론 피를 나눈 가족들과도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는데, 아이샤 같은 애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사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이혼하기 전까지 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실내 인테리어도 전부 새로 해야지.’
내 취향이 아닌 옷을 전부 버리고 새로 샀던 것처럼 황후궁의 내부도 전부 갈아엎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십수 명의 가구 장인들을 불렀다. 가구와 벽지, 실내 장식 등의 카탈로그와 샘플을 비교하고 고민하고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시녀들과 토론을 했다.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골랐는데, 드레스와 보석과 달리 가구는 이혼 뒤 가지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네.’
그렇게 정신을 팔 거리가 있었기에 나는 바로 며칠 전 알렉산드로스와 또 키스를 했으면서도 충격과 혼란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든, 아이샤든 알게 뭐야. 이제 제발 나한테 간섭하지 말고 자기들끼리 짝짜꿍했으면.’
하지만 나의 시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르셨나요, 폐하?”
나의 부름에 시녀들이 침실에 들어왔다. 하지만 황궁의 실내 장식 계획에 완전히 정신을 팔고 있던 나는 그녀들의 얼굴에 어린 기대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다름이 아니라, 너희들이 보기에는 이 검은 흑단목 장식장이 더 낫니, 아니면 붉은 파덕목 자개장이 더 낫니?”
“그게요…….”
그녀들이 주저하자 나는 그제서야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시녀들의 얼굴에는 완연한 실망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왜들 그러니?”
“저…… 혹시 지난 금요일 이후로 황제 폐하와 더 이상의 진전은 없으신가요?”
“만남을 가지셨다거나, 깊은 대화를 나누셨다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