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만일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없다면2021.05.30.
당연한 수순으로, 다음날 신문마다 전날의 금요 만찬회에서 있었던 일들이 대서특필됐다.
“황후 폐하, 경하드립니다. 수도 제1 일간지에 황후 폐하의 드레스에 대한 특집 기사와 두 분의 뜨거운 금슬에 대한 기사가 12페이지 분량으로 실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언론이란 언론에는 전부 만찬회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고요. 두 분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요!”
시녀들은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기사에 쓰인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요? 황제 폐하께서 공개적으로 황후 폐하께 입을 맞추신 건가요?”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 푹 빠지신 것이 분명해요. 정말 잘 됐어요, 폐하!”
하나 야단스럽게 좋아하는 그녀들과 달리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대외적으로 알렉산드로스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번 일도 어디까지나 노예들의 미래에 책임감을 느껴서 한 일일 뿐이니까. 나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쓸데없는 기사 좀 가져오지 말랬지? 기사의 내용은 전부 과장이라고 하지 않았니. 황제 폐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나와 폐하는 머지않아 갈라설 관계일 뿐이야.”
“어머!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시녀들은 물러나더니 다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정말 수줍음이 많으신 것 같아.”
“당연하지. 언제나 강하고 냉정한 척하시지만 사실 누구보다 여린 분이라고.”
“황제 폐하께서도 폐하의 이런 점에 빠지신 게 분명해.”
아, 진짜. 미치겠네! 나는 귀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모두 방에서 나가! 혼자 있고 싶어.”
“네, 네!”
시녀들이 우르르 내 방에서 빠져나갔고,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 로벨리아를 보지 못한 지난 일주일 동안 자꾸만 그녀가 생각이 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탐이 나고,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녀의 가치를 다른 자가 알고 먼저 회유할까 봐 안달이 났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당장 그녀를 손에 넣고 싶은 마음이 근질거려서 참기가 어려웠다. 그녀를 유혹하려면 직접 만나야 할 테니 일부러 황비궁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녀를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계 역시 더욱 심해져서 그녀는 이제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황비궁에 찾아갔다가 소득 없이 돌아올 때마다 기묘할 정도의 실망감이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를 만난 오늘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당혹스러울 정도의 만족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절경처럼 그녀는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을 뛰게 하고 기쁨을 주었다. 그녀를 포섭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보고 싶은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던 알렉산드로스는 당혹스러웠다.
‘인재를 원하는 마음이란 원래 다 이런 건가. 그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반갑고 기쁘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로서도 탐나는 인재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알렉산드로스는 느리게 훑듯이 상대의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한다.’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서 자신의 사랑 연기에 끌어들인 것은 물론 그녀를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강한 경계심으로 인해 제대로 된 유혹은커녕 얼굴 한 번 마주하기 쉽지 않았으니까.
‘물론 모두의 뇌리에 우리의 관계를 깊이 새겨놓는 것도 빼놓을 수 없지. 그것이 이후 그녀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예상 밖의 반가움을 느낀 것을 제외하면, 계획은 순조로웠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 주세요. 저 들개 같은 떼거리들 때문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니까.”
사랑에 빠진 남자 흉내를 내기에 상당히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뾰로통한 얼굴을 하는 그녀는 실제로도 귀여웠으니까. 거짓말과 연기는 질릴 정도로 해보았지만 이렇게나 쉬운 것은 처음이라고,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경애하는 나의 황후.”
그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담아 그녀를 응시하고, 그 작은 손 위에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상당히 잘했음을 알았다. 모두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썩 싫지 않았다.
“왜 그러지? 로벨리아. 설마 정말로 두근거리기라도 했나?”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즐겁게 만드는 것은 로벨리아의 반응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란 것뿐이라고요.”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그녀의 모습.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만나기를 고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눈앞에 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애써 강한 척하는 그녀의 옆얼굴은 아껴서 빨아먹고 싶은 사탕처럼 보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떼기가 어렵군.’
알렉산드로스는 내심으로 미소 지었다.
‘이렇게나 보기 좋은 모습을 한 순간이라도 놓친다니, 말도 안 되지.’
그녀와 달리 자신의 얼굴은 혈색이 잘 드러나는 편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그는 격양되어 쿵쿵 빠른 박자로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녀처럼 혈색이 잘 드러나는 편이었다면, 자신의 얼굴은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해버린 것 같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겠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가면 뒤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는 속을 음료수로 식히면서도 그녀와 닿아 있는 부위가 자꾸만 의식이 됐다. 하지만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되찾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에 푹 잠긴 채 그녀의 좋은 향이 나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녀를 인재로서 꼭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걸.’
이성을 포기하고 싶다니! 자신의 지성과 이성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정말 이상하군.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정도로 이성을 잃었는데도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다니.’
위기감이 느껴지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별것 없이 그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쉴 새 없이 그녀를 향했다. 원래 관찰력과 눈치가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해 일부러 누군가를 신경 쓰는 일과는 달랐다.
‘이렇게 온 마음과 온 정신을 빼앗겨 보는 것도 처음이로군. 한데 이상한 일이지. 조금도 귀찮거나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으니.’
알렉산드로스는 몇 달 전 아이샤에게 일부러 신경을 쓰려고 했을 때를 생각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녀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어 아이샤를 배려해주었을 때, 그때는 그 일이 무척 번거롭고 의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로벨리아를 대하는 그의 기분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이샤가 연회장에 나타났다는 사실 역시 눈치챘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아이샤는 여전히 그의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그녀에게 잘 보이고 가까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역시 아이샤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연기를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을 위해 타당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군.’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이샤에게 잘해야 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이유가 그저 ‘그러고 싶지 않다’라는 감정 하나를 이겨낼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로벨리아를 맘껏 눈에 담고 그녀의 마음을 얻을 기회는 이번 뿐일 텐데. 어렵게 두 사람 사이를 저울질할 필요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그녀에게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합리화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보았다. 아이샤가 등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을. 계획이 하나 어긋났다는 사실에 대한 곤란한 감정과, 기묘한 후련함이 그의 폐부를 채웠다. 이 후련함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로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를 눈에 담고, 팔로 단단히 휘감고, 입을 맞추어도 그녀를 향한 갈증은 도저히 잦아들지 않았다.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자신과 대조적으로 이 손을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그녀가 보였다. 자신의 시선이,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불쾌한 듯 움찔거리고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은 듯 손을 밀어내는 그녀의 움직임을 놓칠 그가 아니었다. 그 발버둥은 미미했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뱃속을 긁어대는 것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던 알렉산드로스의 생각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갔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것은 최악의 가정이었다.
‘그녀를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지.’
지금으로서는 일말의 가능성도 부여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능성.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동을 보면…….
‘그녀가 한사코 나를 거부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 가능성이 ‘제로’는 아닌 것처럼 느껴져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정말 이상하군.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그녀에게서 어느 정도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와야 정상인데…….’
오늘 하루의 기회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유혹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조금도 마음을 여는 것 같지 않았다. 이제껏 자신이 로벨리아에게 한 노력의 반의반도 들이지 않아도 다른 여자들이 쉽게 마음을 내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황궁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벼랑 위에 선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야,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에 헛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결국 그녀는 내게 넘어올 것이고 나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 충분히 있고말고.’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눈앞의 로벨리아가,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어느 때보다도 쓸쓸하고 우울한 눈을 했다. 그 슬픈 빛을 본 순간. 그녀의 녹색 눈동자 위로 길게 진 속눈썹 그늘을 마주한 순간. 알렉산드로스는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로벨리아.”
“네?”
그의 목소리에 올려다본 그녀의 눈망울에는 조금 전에 본 슬픈 감정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알렉산드로스의 뇌리에 박힌 조금 전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 위로 입술을 겹치고 그녀의 작은 문을 열었다.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충동을, 그리고 그 모습을 이 자리의 모두에게 각인시키고 싶다는 충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으읍, 읏……! 흣!”
로벨리아가 놀란 듯 떨면서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채 눈짓했다.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 그녀가 지키고 싶은 것을 상기시켰다. 영리한 로벨리아는 눈짓만으로도 그의 의미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의 저항이 잦아들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손목을 놓고 대신 등을 감싸 안았다. 가늘게 떨리는 가녀린 등을 질척한 손길로 쓸어올리고 그녀의 입술을 남김없이 탐했다. 너무나 목이 말랐다. 견딜 수 없이 이 여자가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의 타액으로 목을 축여도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자신과 연인 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나 슬픈 눈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그런 눈을 할 정도로? 겨우 일주일 만에 한 번 만난 것인데, 이 정도의 마주침도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게 묻고 싶은 어린애 같은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이미지도, 자존심도, 언제나 모두의 우위에 서서 이익을 취하겠다는 계획도 전부 물거품이 될 테니까. 양팔에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춰도 어떠한 안심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물거품 같았다. 아무리 강하게 끌어안아도 이 두 팔을 빠져나갈 물거품.
“그만…… 이제 됐어요.”
그녀가 헐떡이며 속삭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는 물러났다. 하지만 갈증은 조금도 해갈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뜨거워져, 이제는 가슴 속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로벨리아가 자신의 눈을 황급히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은 국정회의 참석자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편안한 자리인데도 이상하게 조용하군.”
긴 적막을 깨뜨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불편함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가?”
타오르는 갈증을, 뱃속을 얼어붙게 만드는 두려움을 숨기며 호인의 가면을 쓰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발버둥을 치더라도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른다면, 주변 사람들의 뇌리에라도 낙인처럼 새겨주는 수밖에. 그 누구도 그녀를 감히 탐할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