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런 게 바로 로판 여주의 기분일까2021.05.27.
아이샤는 알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눈빛은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이었다. 자신이 제국에 온 직후, 그는 자신을 상당히 귀애했다. 그때 그의 반응은 누가 봐도 사랑까진 아니어도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있어 보였고 아이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인들 역시 이제껏 그가 누군가에게 그런 다정함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하나 지금 보이는 알렉산드로스는…… 그때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다정해 보이지 않는가? 아이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야?’
“두 분의 금슬이 좋다고 하더니, 그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저만하면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는 애처가 드라크마 3세도 울고 가겠습니다.”
“가히 황실 역사에 남을 정도의 금슬인 듯합니다.”
“내일 조간신문이 기대가 되는 군요.”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일깨워주었다. 아이샤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녀가 등을 돌리고 어디론가 뛰어간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였다.
*** 아이샤까지 온 뒤,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 알렉산드로스와 아이샤가 나타나면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더 늘었으면 늘었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야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당연하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도 반백의 수염을 기른 대신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황후 폐하, 오늘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여신의 자태이십니다. 화원에 만발한 달맞이꽃도 황후 폐하를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겠군요.”
“정말입니다. 어째서 진작 이런 고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의 차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어울리십니다.”
서른 정도로 보이는 귀족 청년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오늘 황후 폐하의 모습을 보자마자 너무나 눈이 부셔 넋을 잃었습니다.”
“늘 이런 차림을 하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평소의 차림도 아름다우시지만 역시 남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은 이런 청순함이지요.”
“틀림없이 황제 폐하께서도 오늘의 차림에 다시 한번 반하셨을 겁니다.”
귀족 남성들이 입을 모아 떠들어댔다.
‘알렉산드로스와 사이좋은 척을 하러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런 인간들까지 상대해주어야 하나.’
나는 담담한 얼굴을 가장하며 생각했다.
‘사이좋은 척 연극을 하러 나왔는데 황제의 가신들의 싸대기를 갈겨버리면……. 역시 그건 좀 그렇겠지.’
그때였다.
“오늘 그대의 차림을 선택한 이는 그대가 아닌 다른 이인 듯하군.”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들자, 알렉산드로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언제나처럼 차려입지 않았나? 나는 그대가 항상 고수하던 그 분위기가 좋던데.”
“그런가요? 다른 사람들은 이 분위기를 훨씬 좋아하는 것 같은데 폐하의 취향은 독특하시군요.”
내가 무심코 한 말에 주변의 대신들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도, 알렉산드로스도 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나 외에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오로지 내 모습만을 두 눈에 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대의 차림새는 남들을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나긋하게 말하며 손을 뻗어 내 귀 옆머리를 매만졌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취향을 억누를 필요는 없지. 비록 그것이 내 취향에도 잘 맞긴 하지만.”
“…….”
그의 말에 남자의 취향이 어떻고 하면서 떠들어대던 가신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나는 왠지 모를 유쾌함을 느꼈다. 물론 그가 꼰대 같은 대신들에게 한 방 먹여준 것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도 당연히 이 스타일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나 역시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전에도 한 번 내 스타일을 칭찬한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만 꼽자면 이쪽을 더 좋아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역시 내 패션을 인정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싫지 않네.’
시녀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평소의 차림보다 오늘의 차림을 좋아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니, 잠깐!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저 인간은 알렉산드로스라고! 속이 시커멓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말이야. 방금 그 말도 다 내 기분을 좋게 하려는 빈말일 줄 어떻게 알아?’
그에게서는 아무리 작은 만족감이라고 해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이혼할 남자이니 정을 들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심지어 그 남자가 호시탐탐 날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시선을 살폈다. 정말이지 진심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다정한 눈빛. 게다가 저렇게 잘생긴 얼굴에 친절한 태도라니. 솔직히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관심과 친절을 받는다는 것이. 전생에 난 한 번도 이런 다정함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오빠의 편이었고, 친구들은 놀 때만 부르는 사람 정도의 관계였고, 애인도 없었으므로.
‘이런 게 로판 여주의 기분이구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차피 다 가짜이고 연극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네.’
그런 생각을 하는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은 얼굴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나를 보는 알렉산드로스의 미간에 가는 금이 생겼다.
“로벨리아.”
“네?”
내가 시선을 올려 그를 보았다. 어 하는 사이에 그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입술 위에 겹쳐졌다.
“허억!”
대신들이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와 식기 떨어뜨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놀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인간 진짜 미친 거 아냐?!’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고 숨결이 섞여 들어갔다. 질척하고 뜨거운 감각이 입 안부터 뱃속까지 천천히 퍼져나갔다.
‘아무리 사랑하는 척 연극을 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지!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를 밀어내려고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런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쥐었다. 당황해 굳어버린 내 시야에 어느 때보다 짙어진 그의 금빛 눈동자가 들어왔다. 그 손길, 그 눈빛만으로도 나는 그의 의도를 읽어냈다.
‘지금 내가 그를 밀어내면…… 지금까지 한 연극이 전부 허사가 될지도 몰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태까지 힘들고 피곤한 걸 참으며 이렇게 노력했는데, 그것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의 어깨를 짚은 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제서야 내 손목을 쥔 손을 풀어주었다. 그는 내 손목을 잡는 대신 커다란 손으로 나의 등을 감쌌다. 긴장을 풀어주듯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것조차도 내게는 너무나 유혹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으음, 음…….”
나는 가늘게 떨면서 나를 괴롭히는 그의 움직임을 감내했다.
‘역시…… 여전히…… 잘하네.’
나 말고 다른 여자랑은 키스 한 번 해본 적 없다면서, 이런 굉장한 테크닉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금세 숨이 가빠지고 허리가 떨려왔다. 그저 입술을 겹치는 것만으로도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느껴져, 구두 안쪽에서 발가락이 조여들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브랜디의 맛이 났다. 그가 내뱉는 숨결 가득히 술 향기가 훅 끼쳐왔다. 입술을 통해 술기운이 옮은 것인지, 아니면 열기에 취한 것인지……. 나는 머릿속이 푸딩처럼 부드럽게 녹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이만하면 됐어. 할 만큼 했어. 이제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밀어냈다.
“그만…… 이제 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등을 감싸 쥐던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시선만큼은 결코 거두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가 공식 행사든 뭐든 간에 금방이라도 다시 덤벼들어 입을 맞추고 싶어 하는 듯하는 눈빛이기에 나는 조금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 둘은 물론 대신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 동안, 연회장에는 긴장감 어린 정적만이 흘렀다. 그 정적을 끊은 것은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피식 웃었다.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양, 항상 얼굴에 걸치는 호인의 미소를 두른 채 그가 말했다.
“이곳은 국정회의 참석자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편안한 자리인데도 이상하게 조용하군. 불편함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가? 내 한 잔 따르지.”
황제가 남의 술잔에 술을 따라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즉 저건 ‘불편해하지 말고 어서 떠들어라’라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 귀족적 화법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으니 반응도 뜨거웠다.
“아, 아닙니다, 폐하! 정말 즐거운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하하, 늘 술을 받기만 해서 나도 한 번 따라주고 싶었는데, 그대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알렉산드로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술을 받았고 대신들은 언제나처럼 그에게 꼬리를 살랑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키스의 여운을 수습할 여유가 생겼지만.
‘정말이지, 내일 신문에 어떻게 나올지 참 기대가 되네.’
나는 반어적으로 생각하며 몸의 떨림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나 이때의 나는 이 상황에서 떠들썩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람은 바로 아이샤였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지, 테이블 아래로 감춘 그녀의 두 주먹이 얼마나 애처롭게 떨리고 있는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