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황제와 황후의 대국민 사기극2021.05.23.
‘대체 뭘 하겠다는 거지?’
로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은 채로,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주변에서 헉 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이다. 조금 전 귀족 남성들에게도 수도 없이 받은, 단순한 인사였지만 그의 손등 키스는 차원이 달랐다. 얇은 장갑을 사이에 두고 누른 그의 입술, 손등 위에 퍼지는 작고 따뜻한 온기, 그의 몸에서 나는 체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도 올곧게 그녀만을 바라보는 강렬한 빛의 눈동자. 그 모든 것들이 다른 귀족 남성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색정적이고 야릇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누른 알렉산드로스가 내뱉었다.
“경애하는 나의 황후.”
짧은 말이었지만, 그 몇 글자 안 되는 말속에 뜨거운 감정이 단단히 억눌려있는 듯했다. 로벨리아는 물론 주변에도 들릴 정도의 크기의 목소리였던지라 주변에서 숨 삼키는 소리, 한숨 쉬는 소리,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벨리아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느꼈다. 지금껏 받아왔던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관심과 시선이었다. 전생에 숱한 프레젠테이션과 발표를 겪어왔던 로벨리아마저도 약간 긴장이 될 정도였다.
‘연기 엄청 잘하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를 보며 생각했다.
‘그의 속이 시커멓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면 나도 속아 넘어갔을지도 몰라.’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 증거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연극에 속아 넘어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알렉산드로스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로벨리아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허어…….”
“저럴 수가!”
주변에서 수군거리고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의 얼굴에 입 맞추시다니……!”
“황비 전하께도 한 번도 하지 않으신 일인데…….”
손등 키스 까지는 예상했지만 이것까진 로벨리아로서도 예상외였기에 그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과의 경계가 흐려질 정도로 붉어졌다. 그녀를 바로 앞에 두고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
“왜 그러지? 로벨리아. 설마 정말로 두근거리기라도 했나?”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로 속삭였다. 로벨리아는 악문 잇새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란 것뿐이라고요.”
“이 정도로 놀라면 쓰나. 이제부터 저 자들에게 더한 것을 보여줄 생각인데. 다시는 그 누구도 우리의 금슬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하아…… 정말. 그래요, 어차피 할 거면 제대로 해요. 전 정말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로벨리아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척 속삭였다.
“만일 이런 연극을 한 번이라도 더 하게 만들면 저도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머리 깎고 성국으로 들어가든가 짐 싸서 외국으로 탈출이라도 할 거라고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없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직하게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야릇한 손길이었다. 그가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황후는 수줍음이 많기도 하지. 그렇게나 부끄러웠나? 역시 속은 여리기 짝이 없다니까.”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개소리였다.
‘국가행사에서 귀족을 폭행하고, 그레이마켓에서 노예 관리인을 채찍으로 때리는 여자가 여려요?’
그것이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는 못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정도 눈치는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오른 열기가 식고 나서야 로벨리아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멀리 갈 수는 없었다. 그만큼이나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은 집요하고 단단했다.
“사랑스러운 로벨리아, 어째서 요 일주일간 만나기 이렇게 쉽지 않았던 거지? 그대를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내 애간장이 녹아 없어져 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 그리 냉정한가.”
그가 다시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벨리아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요 일주일간 만나지 않은 이유를 소문내려고 그러는구나.’
그들이 일주일이나 마주치지 않았다는 소문은 궁인들을 중심으로 쫙 퍼진 상태였다. 기자회견에서 뜨거운 금슬을 가장했는데 이런 소문이 나면 그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번만 그의 연극에 어울려주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가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폐하. 저는 요 일주일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답니다.”
“물론 그 사실은 잘 알지. 그대가 언제나 궁내부 업무로 바쁘기 짝이 없는 건. 그래도, 단 하룻밤만이라도 날 위해 시간을 내어줄 순 없었나? 그대가 없으면 내가 어떤 기분이 되는지 잘 알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로 연기에 뛰어났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만 보면 누가 봐도 뜨거운 사랑에 절절매는 남자 같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저런 간절한 얼굴을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로벨리아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내뱉었다.
“……그래요, 앞으로는 노력해볼게요.”
“역시 나의 황후는 현명하고 자비롭군.”
알렉산드로스는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유려한 말투로 칭찬을 하더니 다시 한번 로벨리아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두 번째인지라 아까만큼 놀랍거나 얼굴이 붉어지진 않았다.
‘이게 연극인 건 알렉산드로스도 알고 있겠지? 이 대화를 핑계로 자꾸 접촉하려고 하면 곤란한데 말이야.’
로벨리아는 그와 자꾸만 만나는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가 의문과 의심을 품은 눈으로 상대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는 그저 눈꼬리를 휘며 다정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 순간부터 알렉산드로스는 어딜 가든 로벨리아를 데리고 다녔다. 그의 팔은 그녀의 허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누구와 대화를 하건 그의 꿀 떨어질 듯 다정한 시선은 로벨리아의 얼굴에 콕 박혀 있었다.
‘굳이 이 정도까지 해야 해? 진짜 부담스러워!’
이러다 자기 얼굴이 뚫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로벨리아는 그의 팔을 풀어내며 말했다.
“대신과 편히 대화하시지요. 저는 잠시 파우더 룸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함께 가도록 하지. 나 역시 마침 휴식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
알렉산드로스는 국무대신과 중요한 대화를 하다가도 미련 없이 끊으며 그녀를 따라오려고 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저러다 화장실까지 따라오겠네!’
결국 로벨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냥 안 갈래요. 하시던 대화 마저 하시지요.”
“그러지. 하지만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말하도록 해. 내 최선을 다해 보살피도록 할 터이니.”
알렉산드로스가 다정하게 말하며 그녀의 귀 옆머리를 매만졌다.
‘네가 제일 불편해요, 네가…….’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로벨리아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가 시종이 쟁반에 받쳐 들고 가는 음료수에 시선을 주면 알렉산드로스가 친히 가져다주었다. 핑거 푸드에 시선을 주면 그것도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발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져서 서 있는 자세를 고쳤더니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시종에게 다른 구두를 가져오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두 분의 금슬이 좋다고 하더니, 그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저만하면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는 애처가 드라크마 3세도 울고 가겠습니다.”
“가히 황실 역사에 남을 정도의 금슬인 듯합니다.”
“내일 조간신문이 기대가 되는 군요.”
*** 그러던 그때, 아이샤가 뒤늦게 도착했다. 그녀가 다소 늦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샤는 오늘의 만찬회에 로벨리아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에서 제일 이름을 날리는 메이크업 전문가와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했다. 어깨가 트인 튜닉 드레스는 노란 조명에 맞추어 약간의 푸른색을 입혀 빛 아래에서 새하얗게 반짝였으며, 드레스 전체에 진주와 오팔가루를 뿌려 찬란히 빛났다. 우유처럼 하얀 진주를 꿰어 만든 팔찌는 고급스러움을 더하면서도 그녀를 더 사랑스럽고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성국에서 온 성녀라는 그녀의 직위, 행사의 분위기, 요즘의 유행을 고려하여 최고의 전문가들이 완성한 그야말로 완벽한 차림새였다. 아이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꽤 자신감이 있었다.
‘전문가에게 거금을 주고 철저하게 제국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꾸몄다고. 쓸데없이 화려하게 입어서 남의 시선을 끌려 하는 그런 천박한 여자 따위 오늘의 나에겐 상대도 안 돼.’
아이샤는 사람들의,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반응을 기대하며 연회장으로 발을 디뎠다. 자신을 부르는 호명관의 목소리는 꼭 그녀를 부푼 꿈속으로 이끌어주는 나팔소리 같았다. 그러나…….
“황비 전하께서 납십니다!”
호명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몇 명 정도는 그녀를 보았지만, 가벼운 인사만을 건넬 뿐 그 이상 관심을 보이거나 긴 대화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마치 신화 속의 성녀 같으십니다.”
그런 빈말 같은 인사치레만을 몇 번 주워섬기곤 슬쩍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유심히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회장의 어느 곳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설마…….’
아이샤는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대체 무엇이 그들의 시선과 관심을 그렇게까지 옭아매는지 알기 위하여.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본 것은…….
“대신과 편히 대화하시지요. 저는 잠시 파우더 룸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함께 가도록 하지. 나 역시 마침 휴식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로벨리아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곤, 더없이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알렉산드로스였다.
“……아뇨, 그냥 안 갈래요. 하시던 대화 마저 하시지요.”
“그러지. 하지만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말하도록 해. 내 최선을 다해 보살펴줄 터이니.”
알렉산드로스는 너무나 달콤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그의 팔은 로벨리아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샤의 동공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녀의 부채를 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