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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TPO의 중요성 (40/151)

40. TPO의 중요성2021.05.20.

나는 진짜로 뒤집어질 듯이 놀랐다. 내가 바라는 TPO에 어긋나는 스타일이란 어마어마하게 진한 스모키 화장과 무시무시하게 화려한 드레스, 새빨간 손톱과 입술, 뭐 그런 걸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모습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거울 속의 나는 지난번에 구매한 은실로 섬세히 엮은 장미 레이스로 장식하고 검은색 망사를 풍성하게 두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귀걸이와 목걸이는 화이트 다이아몬드와 블랙 다이아몬드가 뒤섞여 반짝였는데 유색보석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지 대단히 화려하진 않았으나 무척 고급스러웠다.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렸는데 특별한 장식은 하지 않았다.

16549681237143.jpg‘그러니까 이 모습은…… 청순하다고 해야 할까. 포멀하고 우아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어디까지나 평소의 내 패션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남들은 함부로 따라 하기 어려울 정도의 화려함이긴 했다. 어쨌든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누구라도 ‘이런 건 국가 행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의 요란하고 TPO가 맞지 않는 패션을 원했으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엄하게 말했다.

16549681237143.jpg“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니. 내가 지시한 것과는 전혀 다르지 않니. 너희들 전부가 내 스타일을 망치기로 작당이라도 한 거니?”

이제껏 내가 시녀들에게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들은 무척 놀라고 두려운 듯 고개를 숙였다.

16549681237153.jpg“폐하, 죄송합니다. 행사에 어울리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지만 심한 논란에 휩싸이신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니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만…….”

16549681237153.jpg“저흰 폐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실까 봐 너무 걱정이 되었어요.”

16549681237153.jpg“이렇게 하시면 무척 잘 어울리실 것 같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하긴 언제나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그녀들이니 기자회견이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내가 다시 논란에 휩싸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16549681237143.jpg‘하지만 나는 논란에 휩싸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 이젠 슬슬 내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이해해줄 만도 할 텐데.’

나는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16549681237143.jpg“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말도 없이 명령에 불응해서는 안 되지. 나의 지시에 따르고 내가 하려는 일을 돕는 것이 너희들의 직무잖니.”

16549681237153.jpg“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16549681237153.jpg“무척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시 나는 그녀들에게 아주 엄해질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좋아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번 일 역시 어디까지나 날 걱정해서 벌인 일이니까.

16549681237143.jpg‘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인상 쓴 얼굴을 풀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16549681237143.jpg“앞으로는 주의하거라. 만일 또 이런 짓을 했다가는 그때는 큰 벌을 줄 거야.”

16549681237153.jpg“알겠습니다, 폐하.”

16549681237153.jpg“깊이 새기겠습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되도록 원래 의도대로 패션을 바꾸고 만찬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지금 바로 출발하더라도 시간이 빠듯했다.

16549681237143.jpg‘그냥 확 늦어버릴까.’

하지만 지금부터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하려면 그냥 지각 정도가 아니라 만찬회가 끝나고도 남을 것 같았다.

16549681237143.jpg‘아무래도 이번만 이대로 참석하는 것이 낫겠어. 뭐, 그동안 쌓아온 악명이 있는데 이번 한 번으로 평판이 확 뒤집히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만찬회가 열릴 중앙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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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로벨리아가 잘못 판단한 것이 있었다.

16549681237153.jpg“오늘은 오랜만에 황후 폐하께서 만찬회에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

16549681237153.jpg“그렇지요. 저번 국정회의에서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주요인물들이 나타나기 전, 앞서서 연회장에 와있던 몇 명의 대신들이 수군거렸다.

16549681237153.jpg“이번에는 황후 폐하께서 얼마나 놀라운 차림을 하고 나오실지 기대되는군요.”

16549681237153.jpg“그러게나 말입니다. 지난번 기자회견 때의 차림도 정말 경이로웠는데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말투에는 은근한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16549681237153.jpg“황후 폐하께서 납십니다!”

호명관의 말과 함께 로벨리아가 나타났다.

16549681296633.jpg“태양의 거룩한 동반자, 지지 않는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였던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한 뒤 모두 경악했다.

16549681237153.jpg‘황후 폐하께서…… 상황과 때에 맞는 복식을 갖추고 오시다니!’

기자회견과 행사마다 일부러 그러는 듯 상황에 맞지 않는 옷만 입고 왔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TPO를 맞춘 것만으로도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TPO를 맞춘 것이 끝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성을 모시는 이들답게 로벨리아의 시녀들은 몹시 훌륭한 패션감각과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센스는 평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으나, 역시 제국 대중들의 일반적인 취향에는 로벨리아의 이번 패션이 돋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그녀에게로 쏠렸다.

16549681237153.jpg“황후 폐하께서 대체 무슨 일이실까요? 저렇게 차분하고 정상적인 성장(盛裝)을 하실 줄이야…….”

16549681237153.jpg“그러게나 말입니다.”

16549681237153.jpg“황후 폐하께서 저렇게 아름다우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16549681237153.jpg“한때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수수한 드레스만을 입으시다가, 그다음엔 과하게 화려하고 무서운 복장만을 하시더니 이렇게 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성장을 하시다니…….”

그들의 말대로 로벨리아의 미모는 분명 빼어났으나 이제껏 그것을 알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빙의 전에는 황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한 차림을 하고, 빙의 후에는 진한 화장과 극도로 화려한 복장만을 고수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새삼스레 로벨리아의 정상적인 패션에 감탄했다. 몇 명은 해야 할 말조차 잊고 그저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말했다.

16549681237153.jpg“하나 확실한 건……. 내일 모든 일간지의 1면은 황후 폐하의 복식을 분석하는 기사로 가득 차겠군요.”

한편 로벨리아도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16549681237143.jpg‘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왜 저렇지?’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빙의하자마자 악녀 콘셉트를 잡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한 일의 태반은 패악을 떠는 것이었으니 그녀를 보는 시선은 대부분 당황하거나, 경악하거나, 하여간에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16549681237143.jpg‘물론 사용인들, 디자이너와 상인들은 나를 잘 따르긴 했지만 그건 내가 돈을 펑펑 쓰니까 그렇고.’

그런데 지금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게 봐도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부정적이기는커녕 긍정적으로 보였다. 그 자리의 모인 대부분의 귀족들의 시선에는 경애와 감명이 담겨 있었다. 로벨리아는 몸의 털이 비죽 서는 것만 같았다.

16549681237143.jpg‘내가 오늘 평소와 다른 차림을 하긴 했지만, 그게 저럴 정도란 말이야?!’

16549681237153.jpg“황후 폐하.”

번듯하고 잘생긴 귀족 남성이 다가와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16549681237153.jpg“인사 올립니다. 저는 윈터스 백작가의 장자 페르난이라고 합니다. 윈터스 자작이기도 하지요.”

로벨리아가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신사가 숙녀에게 바치는 경애의 표시였다.

16549681237153.jpg“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벨리아는 기가 막혔다. 그도 그럴 게 평소에 귀족들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기는커녕 잘 다가오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칫하다가 그녀에게 패악을 당할까 봐 우려했다.

16549681237153.jpg“일전에 기자회견과 관련된 기사는 잘 읽었습니다. 질 나쁜 유언비어로 인해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까?”

16549681237143.jpg“아니, 별로 마음고생은 하지 않았어. 나는 겉모습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의 시선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거든.”

로벨리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뼈있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의 손 안에 쥐인 자신의 손을 툭 하고 쳐내 빼내고는 자리를 떴다.

16549681237143.jpg‘귀찮게 대체 뭐야? 그저 화장법 좀 바꿨을 뿐인데.’

하지만 그가 끝이 아니었다.

16549681237153.jpg“황후 폐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16549681237153.jpg“클라우드 후작가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는 그곳의…….”

16549681237153.jpg“일전에 폐하와 빌헬름 후작과 관련된 기사는 잘 읽었습니다. 폐하의 혜안과 현명함을 몹시 존경…….”

쳐내도 쳐내도 자신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는 듯이 끊임없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로벨리아는 골치가 아프기 짝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귀족들과 하하호호 허울 같은 대화나 하는 것은 그녀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16549681237143.jpg‘이럴 때 아이샤와 알렉산드로스는 대체 어딜 간 거야? 하필 제일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없으니 더 나한테만 몰려들고 있잖아!’

심지어는 그 두 사람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16549681237143.jpg‘내가 평소에 한 일을 좀 생각해보라고! 온갖 미친 짓이란 미친 짓은 다 골라서 하고 다녔는데! 고작 한 번 멀쩡하게 입었다고 그런 건 까맣게 잊어버린 거야?’

하지만 원래 100번 잘하다가 1번 못하는 것보다는 100번 못하다가 1번 잘하는 쪽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람 심리인 것이다.

16549681237143.jpg‘거 사람들 참 되게 지조 없네! 날 싫어할 거면 끝까지 싫어하란 말이야!’

쳐내도 쳐내도 끝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로벨리아는 결국 지쳐버렸다.

16549681237143.jpg‘안 되겠어. 당장 화장을 고치고 와야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짙고 무시무시한 화장으로…….’

연회에 지각을 하든 말든 더 이상 이런 일을 견디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가 도로 황비궁을 향해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16549681237153.jpg“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호명관의 부름에 그녀의 발길이 뚝 멈췄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16549681351473.jpg“우리 황후께서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소리와 함께, 허리에 단단한 팔이 휘감겼다.

16549681351473.jpg“그럼 안 되지. 한 번 왔으면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어야 할 것 아닌가.”

속삭이는 그 목소리. 이제는 어쩐지 익숙해지고 있는 그 음성에 로벨리아는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듣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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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는 얼굴이 굳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로벨리아에게 말하는 것이 분명한 어조로, 하지만 주변에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49681351473.jpg“그대가 내 곁에 없으면 얼마나 허전한지 몰라. 그러니 곁에 있어 주지 않겠나? 응?”

로벨리아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49681237143.jpg“늦었잖아요! 왜 이제 왔어요?”

16549681351473.jpg“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황후.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각보다 10분이나 일찍 왔다고.”

로벨리아는 그제서야 시계를 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연회 시작 시각 10분 전이었다. 로벨리아가 더 일찍 왔으며, 곤란한 시간을 보냈기에 그가 굉장히 늦은 것처럼 느껴졌던 것뿐이다. 그녀는 혀를 차곤 다시 한번 빠르게 속삭였다.

16549681237143.jpg“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주세요. 저 들개 같은 떼거리들 때문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니까.”

16549681351473.jpg“그건 곤란하지. 황후가 죽으면 나 역시 누렇게 말라버린 잎처럼 시들시들해져 죽어버릴 테니까.”

16549681237143.jpg“허튼수작 부리지 마세요.”

알렉산드로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여자들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16549681351473.jpg“수작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한들 그대는 믿지 않겠지? 어쨌든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이번 연회에서 힘들고 번거로운 일은 모두 내가 할 터이니 그대는 그저 꼭 붙어만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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