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시녀들의 앙큼한 작당 모의2021.05.16.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없다 그래. 아니면 잔다고 하거나.”
그러자 시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사실은 이미 폐하께서 곧 나오실 거라고 말씀드린 상태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
원래 이 아이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일을 진행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약간 미심쩍게 느껴졌다.
‘설마……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사이를 응원한답시고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 지시를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긴 하지만 원래 이 아이들은 나의 이혼 계획에 납득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알렉산드로스와 내 사이가 좋아지고 내가 아이샤를 밀어내어 그의 총애를 독차지하길 바라고 있었다. 최근 나와 그의 말도 안 되는 로맨스가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을 때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이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내가 의심을 담은 날카로운 눈길을 주자 시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내 눈치를 보았다.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실수예요, 폐하.”
더 이상 추궁하는 의미가 없을 듯해 나는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폐하를 응접실로 모시렴.”
“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고 시녀는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잠시 뒤. 나는 응접실에서 그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부러 황비궁과 정원의 주변을 자주 오갔는데 며칠 동안이나 나의 황후의 얼굴 한 번 보기가 쉽지 않더군. 좀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기쁘겠는데 말이지.”
알렉산드로스는 날 보게 된 것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눈을 휘었다. 그 금안에 담긴 빛은 꿀이라도 떨어질 듯 달콤해서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심이라고 속아 넘어갈 만 했다. 물론 나는 그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수고를 하셨군요. 용건만 말하고 가실 테니 다과는 필요 없겠죠?”
“그야 물론이지. 어떤 다과도 그대와의 시간보다 달콤하진 않을 테니까.”
‘이 인간이 미쳤나?’
그의 망언을 듣자마자 머리가 띵해졌다.
‘왜 며칠 사이에 이렇게 느끼해진 거야?’
“못 본 새 혀에 기름칠을 더 잘하게 되셨군요.”
“기름칠이라니. 그대를 마주하니 마음이 들떠 절로 나오는 말일 뿐이야.”
“농도 지나치면 독이 되지요. 폐하와 제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와 남편인데도 이런 말을 주고받기에 부족하단 말인가?”
“부부이긴 하지만 ‘곧 이혼할’ 부부지요.”
내 몰인정한 말에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서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금방 웃음이라는 이름의 베일을 둘렀다.
“그대는 늘 내 진심을 짓밟는 데 주저함이 없군. 하지만 그대의 그런 냉혹함도 싫지 않아.”
“그래서 여기까지 친히 찾아오신 용건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는 명료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내버려 뒀다간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제서야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금요 만찬회가 있는 날이지. 그대가 꼭 참석해주었으면 하는데.”
그의 금안에 의뭉스러운 빛이 빛났다. 보나 마나 또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것이 뻔히 보였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싫어요.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지난번 빌헬름 후작이 후손을 생산할 가능성을 차단했던 사건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이혼을 바라는 내가 그런 행사에 참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 얄밉게도 알렉산드로스는 내 말에 조금도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대라면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로벨리아, 지난번 기자회견으로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대와 나의 ‘뜨거운 관계’를 의심하는 여론이 생겨나고 있다고 하더군. 특히나 궁인들 사이에서 말이야. 당연한 일이지.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으니.”
“그래서 저를 협박하러 오신 건가요? 노예들 중 제 정부가 있다는 소문이 다시 한번 퍼질지도 모른다, 라고.”
“협박이라니. 나는 어디까지나 걱정하는 의미에서 말해준 거야. 그 노예들을 끔찍이도 걱정하는 그대가 아닌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눈이 매혹적으로 휘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빛나는 계략을 본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어느덧 그의 입술은 나의 귓가에 스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도 괜찮은가? 그런 더러운 소문은 노예들의 앞날에도 상당한 걸림돌이 될걸.”
“…….”
“그대는 그저 만찬회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다시는 그 누구도 우리의 관계를 의심할 수 없도록 제대로 보여주자고.”
다시 한번 골치가 지끈지끈했다.
‘그래, 대단한 일도 아니지. 그저 만찬회에 참석하고, 알렉산드로스와 사이가 좋은 척하는 연극 한 번 해주는 것뿐이니까.’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하지만 제가 그 귀찮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인 걸로 아세요.”
“현명한 판단에 감사하지.”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손을 잡아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행스럽게도 슬슬 그의 행동에 익숙해지는지 나도 예전처럼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또 이 인간이 원하는 대로 되어버린 듯한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케일럽이나 노예들의 앞날이 막히는 건 그보다도 더 싫었으니까.
‘난 분명 이혼을 위해 뭐든지 하고 있는데, 왜 이혼까지 가는 길은 점점 더 꼬이기만 하는 것 같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숨을 삼켰다.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에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아무래도 세무법 공부는 내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았다.
*** 알렉산드로스가 응접실로 들어간 뒤, 로벨리아의 시녀는 방 몇 개를 건너 다른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파우더 룸으로 갔다.
“잘 됐어?”
“잘 됐어.”
“단둘이 계시게 한 거 맞지?”
“단둘이 계시게 한 거 맞아.”
방금 온 시녀는 자랑스럽게 대답했고, 파우더 룸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어떡해. 두 분 진짜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
“황제 폐하께서도 우리 폐하께 완전히 꽂히셨잖아. 이건 진짜 사랑이라니까.”
“내가 전부터 알아봤어. 황제 폐하는 정말 폐하께 반하신 거야.”
“그럼, 그럼! 난 진작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우리 폐하만큼 아름답고 우아하고 멋진 숙녀가 또 없는데 당연한 일이지.”
시녀들은 어찌나 기쁜지 얼굴을 붉힌 채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모두가 흥분감에 들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 중 가장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녀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가 이렇게 좋아하고만 있어서는 안 돼. 물론 황제 폐하께서 멋지고 고귀하고 귀여우시기까지 한 폐하를 사랑하시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 폐하는 왠지 몰라도 황제 폐하를 거부하고 계시니까.”
“맞아. 그리고 또 그 황비도 문제야. 그 간교한 여자가 언제 무슨 수작을 부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되찾으려 할지 알 수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황비로부터 우리 폐하를 지키고, 폐하께서 다시 황제 폐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황제 폐하의 폐하를 향한 총애 역시 식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고.”
시녀들은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아까 황제 폐하께서 그러셨는데 우리 폐하께 금요 만찬회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러 오셨다고 그러시더라고.”
“정말 오랜만에 만찬회에 참석하시겠구나! 기대된다.”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드리자. 모두가 두 분이야말로 최고의 한 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그 얄미운 황비의 콧대를 눌러주자. 다시는 우리 폐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시녀들 중 한 명이 몹시 결연한 얼굴을 하곤 말했다.
“난 정말 우리 폐하를 믿고 존경하지만, 이혼하시겠다는 생각만큼은 동의할 수 없어. 폐하는 오랫동안 황제 폐하를 연모해 오셨잖아. 이제 겨우 그 마음을 돌려받게 되었는데 이혼이라니 말도 안 돼.”
“맞아! 황제 폐하만한 신랑감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돈 많지, 권력 있지, 능력 있지, 얼굴 잘생겼지! 황제 폐하만큼 우리 폐하를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두 분만큼 잘 어울리는 남녀는 이 세상에 또 없으니까 말이야. 난 두 분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우리 진짜 잘하자. 최선을 다해 두 분의 관계를 밀어드리는 거야.”
“그리고 그 첫발은 오늘의 금요 만찬회가 될 거야.”
시녀들은 서로 진지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들은 서로 손을 포개더니 위아래로 흔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알♡로 커플 추진 위원회, 파이팅!”
“파이팅!”
*** 물론 로벨리아는 자신의 시녀들이 어떤 작당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늘 있을 만찬회에 참석하기로 했단다. 적당히 외출 준비를 해주렴.”
“네, 폐하. 오늘은 어떤 분위기로 연출해 드릴까요?”
시녀의 질문에 로벨리아는 곰곰이 고민했다. 솔직히 그녀는 이번 만찬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참석하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알렉산드로스와의 다정한 분위기만 조성하면 되는 거니까 복장은 TPO에 안 맞아도 상관없겠지?’
금요 만찬회의 특별한 드레스 코드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공식행사인 만큼 다들 일반적인 무도회나 연회보다 차분하고 포멀한 복장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최대한 요란하고 화려하게 해주렴. 누가 봐도 저 골 빈 여자, 하면서 쯧쯧 하고 혀를 찰 정도로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시녀들의 고분고분한 반응에 로벨리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 자신이 저런 식으로 말하면 시녀들은 울상을 잔뜩 지으며 조금이라도 멀쩡한 옷을 입도록 자신을 설득하곤 했다. 그녀들은 로벨리아가 훌륭한 황후로 이름을 높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랑받는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일로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하지? 뭔가 수상한데.’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가 물었다.
“이번에는 우는 소리들을 하지 않는구나?”
“그럼요, 어느 분 안전인데요.”
“폐하의 명령이라면 마땅히 따르는 것이 저희의 직분 아니겠어요.”
시녀들은 더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벨리아는 가슴 속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을 더 닦달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내 말에 불응한 적은 없으니 설마 대놓고 내 지시를 어기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그녀들은 손수 드레스를 골라 입혀주고, 로벨리아의 머리를 만져주었으며 다양한 화장품을 발라주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 얼굴을 매만지는 그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로벨리아는 점차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지난밤에 너무 늦게까지 공부를 했나.’
요즘은 딱히 일거리도 없고, 할 것도 없어 장래를 위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무법과 경영을 배우고 있었는데, 간만에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니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탓에 며칠이나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잠들기를 반복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로벨리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 끝났습니다.”
로벨리아가 잠에서 깬 것은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였다.
“어머나! 정말 아름다우셔요.”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시녀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로벨리아는 잠에서 덜 깨서 비몽사몽한 상태였기에 그녀들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로벨리아의 ‘쎈 언니 스타일’을 보고 진심 어린 감탄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로벨리아는 흐릿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몇 초 후, 시야가 점점 맑아지고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습이란…….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