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가슴이 파인 드레스는 구시대의 유물이죠2021.05.13.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 아니 수십 명은 될 듯한 사람들이 복도를 가득 채운 채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곳의 궁인으로 일하고 있는, 황후 폐하 소유의 노예들입니다. 저희의 주인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이레네는 당황했다. 노예들에 대한 거부감과, 노예를 무시하거나 말라던 로벨리아의 명령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웠다.
“화, 황후 폐하는 아무나 접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더욱 그렇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기에 다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부디 그분께 한마디만 하게 해주세요. 한 번만이라도 좋습니다.”
“내 말 못 들었나? 너희들의 위치를 생각해라. 어딜 감히 함부로 발을 들이려고…….”
그 소란을 끊은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무슨 일이지?”
로벨리아였다. 시녀가 돌아오지 않는 데다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까지 하니 나온 것이었다.
“폐, 폐하. 이 노예들이 감히 아침부터 폐하의 일정을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정말 간곡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저희의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이레네와 노예들의 얼굴을 슥 훑어본 로벨리아는…….
“어떤 용건인지 말해봐.”
결국 노예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의 근무지를 먼 곳으로 옮기려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는 황후 폐하의 가까운 곳에서 폐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노예들이 웅성거리며 각자 한마디 씩 했다.
“왜 저희의 근무지를 옮기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시정하고 싶습니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저희를 먼 곳으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폐하. 폐하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잘할 테니 부디 저희를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진심 어린 표정과 말투로, 그들 모두가 진심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로벨리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근무지를 옮기려고 했다는 것을 이들이 어떻게 안 거지? 그리고 그걸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사실 그녀는 노예들을 직접 사들이긴 했지만 그 이후로 그들을 직접 만나볼 일이 별로 없었다. 궁내부의 업무는 전부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로벨리아는 노예들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하는지 짐작도 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노예들이 자신을 위해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로벨리아는 어떠한 방향으로든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어. 내 명성을 드높이려 노력할 필요도 없고. 알아들었나? 절대 나를 위해 노력하지 말도록.”
자신의 말이 겸양이나 빈말이 아닌 진심임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더 눈에 힘을 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눈에 거대한 ‘로벨리아 깍지’ 가 껴 있는 노예들에게는 그녀의 말이 전혀 다른 뜻으로 들렸다.
‘황후 폐하께서 우리에게 지나치게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잖아!’
‘우리 같은 한낱 노예 따위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할까 봐 황후 폐하처럼 귀하신 분께서 친히 걱정해주시다니!’
‘황후 폐하는 정말 자비롭고 위대한 분이셔. 이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
노예들의 눈에 감동과 감격의 빛이 아롱대고, 그들이 기쁘고 감명 받은 얼굴을 하자 로벨리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아이들이 내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잖아.’
“내 말을 어떻게 듣고 있는 건가? 오해하지 말도록. 열심히 하지 말라는 건 너희들을 위한 겸양이 아닌 진심이다. 이제부터 과도한 업무를 떠안거나 내 명성과 권위를 세우려 노력하는 자들은 경을 치겠다. 알아들었나?”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못을 박았으나, 노예들의 얼굴에는 더더욱 짙은 감동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건 뭐, 그렇다고 죄 없는 이 애들에게 더 나쁘게 대할 수도 없고…….’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자 더 깊이 생각하기도 싫어졌다. 로벨리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무튼 근무지를 옮기지 말라는 너희의 뜻은 알겠으니 가 봐.”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지지 않는 달에게 영원한 영광 있기를!”
“자비로우신 황후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노예들은 환호하며 몇 번이고 거듭해서 로벨리아를 찬양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거나 무릎 꿇고 땅에 입을 맞추는 이들까지 있었다. 결국 로벨리아는 닭살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가보라니까!”
그제서야 노예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와 자신을 찬미하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 말라고 그리도 단단히 못을 박았건만, 그들이 결국 자신의 명성을 올리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그리고 물론 그녀의 예감은 실현되었다. 로벨리아의 말을 자신들을 걱정한 뜻으로 잘못 이해한 노예들은 더더욱 열심히 일하며 어딜 가든 그녀의 인품과 자비심을 찬양했다. 노예들의 찬양을 들은 황궁 내의 다른 궁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낱 노예들의 안위마저 이토록 걱정하시는 황후 폐하는 대체 얼마나 사용인들에게 관대한 분이실까?’
‘그분 수하의 궁인들이 이렇게 입을 모아 찬양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훌륭한 상사이신 거겠지.’
‘나도 황후궁에서, 황후 폐하의 아래에서 일하고 싶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노예들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로벨리아가 관리하는 구역의 업무 능률이 수직으로 상승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다른 궁인들조차 그녀의 수하에서 일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로벨리아의 구역에서 일하고자 하는 궁인들의 경쟁률이 높아지자 자연히 궁인들 중 특별히 재능 있고 뛰어난 이들만 선별되었다. 이렇게 하여, 황궁 내에서 로벨리아의 명성은 또 한 번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이 소동을 기뻐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덕분에 나와 같은 노예들의 근무지가 옮겨질 위험도 덜었을뿐더러, 황후 폐하의 명성도 드높아졌군.’
바로 케일럽이었다. 그는 노예들에게 은근슬쩍 로벨리아의 계획을 흘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제 한동안 그 재수 없는 황비와 수하의 궁인들, 기사들이 잘난 척하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걸.’
케일럽은 알렉산드로스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로 키득거렸다. 그러던 그는, 어느 순간 눈꼬리를 휘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제일 기쁜 것은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만.”
***
“황후 폐하, 이걸 봐주십시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샬롯 앤 콜린스 부티크의 수석 디자이너가 내게 새로운 드레스의 도안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검은 실크 망사와 은사로 짜낸 장미 레이스의 조화를 보십시오. 정말 아름답고 고혹적이며 기품까지 넘치는 드레스입니다. 재료 하나하나도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급이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황후 폐하만을 위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디자인은 숨기고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던 처음과 달리 요즘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훨씬 진지해졌다.
“이 아름다운 라인과 색상을 보십시오! 황후 폐하의 체형과 머리색, 피부색만을 고려하여 최고의 결과물을 제작하였습니다. 저희 샬롯 앤 콜린스에서는 황후 폐하께서 분명 만족스러우시리라고 자부합니다!”
‘그만큼 내가 샬롯 앤 콜린스 부티크의 중요 고객이 되었다는 것이겠지.’
나는 그의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을 보며 생각했다. 하긴 일반적인 손님과 누구보다 돈을 물 쓰듯 쓰며 모든 행동이 화제가 되고 온갖 신문들에서 패션 분석 기사를 써내는 손님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악명도 명성이고 노이즈 마케팅도 마케팅이지. 존재감 없는 손님보다는 늘 신문에 등장하는 손님에게 최고의 상품을 팔고 싶을 수밖에.’
그리고 내가 드레스와 보석에 돈을 펑펑 쓰는 것은 당연히 이혼 후의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지만……. 디자이너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으니까.
‘여태까지 모은 것만 해도 성 몇 채는 살 정도의 값어치는 되겠지. 평생 놀고먹으며 떵떵거릴 정도는 된다는 뜻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은 계속 할 거야. 요즘은 세무 공부도 하고 있으니까, 적당한 중소도시에 사무소를 하나 개업해야지. 개와 고양이도 키우고 작지만 예쁜 정원을 가꾸면서 살아도 아마 충분히…….’
장래에 대한 몽상에 빠져있느라 말이 없는 내 눈치를 보던 디자이너가 말했다.
“어떠십니까, 폐하? 저희 가게의 역작이 마음에 드십니까?”
“응? 아, 으음.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긴 한데…….”
나는 디자인 카탈로그들을 팔락팔락 넘겨보다가 무심코 내뱉었다.
“……어쩐지 전부 목까지 올라온 디자인이네?”
내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이번에 보여준 21가지의 드레스 디자인들은 전부 하나같이 네크라인이 막혀 있었다. 내 말에 디자이너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말했다.
“목까지 빈틈없이 막혀 있는 드레스 디자인이 요즘 유행입니다, 폐하. 괜히 가슴 부분을 깊이 패서 맨살을 드러내거나 하는 드레스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죠.”
‘그건 또 의외네. 제국의 드레스는 죄다 등이나 가슴이 깊숙이 패여 있는게 보통인 줄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게 이곳에 온 뒤 내가 본 드레스 중 태반이 가슴이 패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얌전한 디자인이 유행하다니……. ……음?’
그때 내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지난 기자회견 때 들었던 말이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파인 드레스는 입지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그대는 내 말을 듣지 않겠지?’
‘어머, 당연하죠? 제가 왜 폐하의 말씀을 듣겠어요.’
‘아무래도 너무 깊게 파인 드레스를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해야겠군.’
그래, 분명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 갑작스러운 유행을 만든 게 알렉산드로스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황제가 그렇게 한가한 직업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그가 여자들 드레스 디자인에까지 간섭을 할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내가 아무리 알렉산드로스를 미심쩍어한다고 한들 말이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과도한 생각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써보았지만 어쩐지 등골이 시렸다. 그리고 내 불길한 예감은 전생에서부터 쓸데없이 잘 맞는 편이었다.
“황후 폐하? 혹시…… 네크라인을 올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디자이너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 괜찮아. 이대로 하도록 해.”
아무래도 이게 최신 유행이라면 지나치지 않고 따라 하는 쪽이 더 사치스러운 악녀처럼 보이겠지? 그제서야 디자이너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럼, 이번에 구매하실 디자인은…….”
나는 카탈로그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전부 다 사도록 하지. 수고 많았어.”
디자이너의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허리를 거의 90도 직각으로 굽혔다.
“언제나 정말 감사드립니다, 황후 폐하. 이번에도 완벽하게 완성하여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첫 만남과 숨겨둔 디자인을 내가 전부 사들였을 때의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역시 패션 업계에서는 유명세가 제일 중요하구나.’
디자이너와 조수들이 나가고 나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하녀가 든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남은 일정은?”
“이제 오후 일정은 없습니다. 저녁에 있을 금요 만찬회가 다음 일정입니다.”
시녀가 재빠르게 일정을 체크해주었다.
‘그럼 이제 세무법 공부를 좀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황후 폐하,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다른 시녀가 방에 들어오며 내게 알려왔다. 나는 그 손님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야, 제국에서 두 번째로 귀한 인물인 나에게 ‘귀한 손님’이라고 칭할만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