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노예 주제에 황궁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다니2021.05.06.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 하지만 라만차에서 데려온 아이들이 노예라는 소문이 난 것은 큰일이야.’
계급사회인 제국에서 노예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다. 평민들조차 멸시할 정도로 천한 취급을 받는다. 더더군다나 황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평민이라고 해도 프라이드가 강하니까. 그 아이들이 노예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궁인들로부터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할지도 몰라 이제껏 숨겨왔던 것인데, 이렇게 밝혀지고 만 것이다. 나의 있지도 않은 정부를 파헤치는 기자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나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내가 궁인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아야겠어. 그리고 정 안 된다면, 그 아이들의 업무지를 먼 곳으로 옮기는 수밖에.’
*** 하지만 로벨리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위켄드 오피니언에 그들의 신분이 밝혀지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황궁 내에서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펼치고 있었다. 더군다나 로벨리아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하여 자신의 구역이 아닌 곳의 일까지 나서서 돕고 있었다.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열심히 하기까지 하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황궁 내에서의 인망과 영향력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황궁 내의 모두가 그들의 정체가 노예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들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난색을 표할 수 있는 궁인은 많지 않았다. 물론 노예인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하긴 했다. 마법 수업을 들으러 가던 케일럽을 향해 세 명의 기사들이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좀 봐, 저 녀석이 그 노예 아니야?”
“황후 폐하께서 라만차에서 사들이셨다던?”
“소문대로 얼굴은 반반하네.”
“그래봤자 다리를 질질 끄는데 뭔 소용이야.”
그들은 셋 다 귀족이었지만 고귀한 신분이 고결한 성격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킥킥 웃으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더니 케일럽의 어깨를 고의적으로 치고 지나갔다.
“어이쿠, 실례.”
“너 가서 바로 씻어야겠다. 더러운 게 묻었을 거 아니야.”
“다리 병신 노예 주제에 감히 황궁 내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다니.”
어깨가 욱신거려왔지만 케일럽은 어색하게 웃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 노예 주제에 귀족 나리들께 부딪쳤으니 고개 숙여야지.”
“계속 고개 숙이고 다녀. 너한테는 그런 자세가 어울려.”
그들이 낄낄거리며 지나치는 순간 케일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알고 있는 얼굴이야. 메인 자작가의 귀하신 독자라고 했던가.’
케일럽은 생각했다.
‘나중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잠시 후, 로벨리아가 붙여준 마법 스승의 수업을 듣던 도중 케일럽은 창밖에서 시끄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훈련이라고 해도 실전처럼 임해라! 훈련에 나태하게 임하거나 서로 봐주었다가는 저녁 시간 내내 추가 훈련을 받을 줄 알아라!”
내다보니 황실기사단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마훈련 중인지 기사들은 말을 탄 채로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아까의 그 기사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케일럽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적당한 핑계로 교실을 나선 케일럽은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는 나무 그늘에 숨은 채 소매에서 초록색의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여치였다.
“가서 저 말에 붙어.”
케일럽의 지시에 여치는 더듬이 달린 고개를 끄덕이더니 폴짝폴짝 뛰어갔다. 훈련을 하느라 기사들은 작은 풀벌레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치는 근육이 탄탄한 말의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케일럽은 기사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해. 가장 결정적인 순간, 바로 그때를 놓쳐선 안 돼.’
케일럽은 인내심 있게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때는 찾아왔다.
“이얍!”
여치가 붙은 기사가 호승심에 눈이 멀어 다소 무리한 공격을 시도할 때, 그래서 무게중심이 다소 아슬아슬하게 옮겨졌을 때. 케일럽은 그때를 노렸다.
‘지금이야.’
케일럽은 여치에게 신호를 보냈고, 마법에 걸린 여치는 말의 엉덩이를 물었다.
“히히히힝!”
마법에 걸린 여치는 생각보다 강력해서 말을 놀라게 했고, 놀란 말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평소라면 별문제 없었을 것이다. 괜히 황실의 기사가 아니었기에, 기사에게 무게중심을 잡아 버티고 말을 달래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만일 남자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으아악!”
남자는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날뛰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훈련 중지! 낙마 사고다!”
“군의관을 불러와!”
“누가 저 말 좀 진정시켜!”
“아아악! 너무 아파요! 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요!”
남자는 볼썽사납게도 흙먼지 섞인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연무장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어떤 기사는 군의관을 부르러 달려가고 누군가는 말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마법에 놀란 말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메인! 말에서 떨어지는 수준의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황실의 녹을 먹는 기사냐?”
군의관이 부랴부랴 달려오는 동안 훈련관이 야단을 쳤다.
“저 녀석, 늘 하는 거 없이 잘난 척만 하더니 저럴 줄 알았지.”
“공격을 받아 다친 것도 아니고 말에서 떨어져 다치다니……. 황실 기사단의 수치야.”
동료 기사들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기사를 진찰한 군의관이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완치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케일럽은 연무장을 뒤로했다.
“이제 나랑 같아졌네. 나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다리를 질질 끄는 기사를 써주는 기사단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지만.”
케일럽은 고소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선생님께서 걱정하실지도 모르니 돌아가 봐야겠다. 황후 폐하께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말이야. 선생님을 걱정시키면 안 되지 않겠어?”
*** 그들이 노예라는 소문이 난 뒤 궁내의 여론은 반반이었다. 노예라고 해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그들을 나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반, 그렇다고 해도 노예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이 반. 다들 노예로서 거친 인생을 살아온지라 사소한 일에 굴하지 않고 능력도 있어서 소란을 현명하게 헤쳐나가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버거울 때도 있었다. 로벨리아에 의해 황비궁에 들어온 뒤 바냐는 침방에서 자수 놓는 일을 했다. 신분이 알려진 뒤에도 다행히 침방 궁인들은 모두 바냐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다른 구역에는 그녀를 곱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쟁반에 헝겊과 실타래를 잔뜩 쌓아놓고 조심조심 발을 옮기던 바냐는 발에 무언가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앗!”
그녀가 놓친 쟁반에서 와르르하고 실타래와 반짇고리, 헝겊이 쏟아져 내렸다. 당황해 실타래를 줍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거 봐, 노예가 멍청하게도 혼자 넘어졌네.”
“천한 노예라서 행동도 굼뜬가 봐.”
“노예들은 다 이교도라면서? 이교도들은 전부 천박하고 야만스럽다던데 저 얼뜨기 같은 행동을 보면 사실인가 봐.”
그들은 아이샤의 빨래를 담당하는 궁인들이었다. 바냐는 그들을 무시하고 실타래를 주웠다.
‘괜히 맞대응하려고 하면 안 돼. 황후 폐하를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얌전히 지내자.’
그때 그녀가 주우려던 실타래 위에 누군가의 구둣발이 올라왔다. 빨래 궁인이었다.
“저기, 발 좀 치워주세요.”
“왜? 너 같은 노예한테 잘 어울리잖아. 노예한테 이런 은실, 금실, 비단실이 가당키나 하니?”
빨래 궁인은 바냐를 비웃으며 실타래를 짓밟았다.
“어머, 실타래가 더러워졌네. 너 같은 노예는 이런 더러운 실이나 써. 딱 잘 어울린다 얘.”
“깔깔깔깔!”
“…….”
빨래 궁인들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리고 바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이깟 일로 울면 안 돼. 그건 황후 폐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야.’
“뭐해? 안 가져가? 네 거잖아.”
빨래 궁인이 발끝으로 실타래를 톡톡 찼다. 바냐는 굴욕감을 참으며 그것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그 더러운 물건에 손대지 말거라. 손이 지저분해지잖니.”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냐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목소리는…….’
그 도도하고 단호한 목소리. 비꼬는 듯한 어조 아래에 냉철한 분노를 숨기고 있는…….
‘처음 들은 뒤로 잊은 적이 없어. 이건 분명……!’
라만차에서의 경매에서 처음 만난 뒤로는 만날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바냐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지 못했다.
“화, 황후 폐하……!”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바냐의 눈에는 감격과 반가움이, 빨래 궁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떠올랐다.
“나를 위한 일을 하는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되지 않겠니?”
붉은 머리를 가볍게 틀어 올리고, 이제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 다름없는 붉은 루즈를 짙게 바른 입술을 휘어 올리며 로벨리아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이샤의 궁인들은 사치스럽다, 나라를 망칠 악녀라며 깎아내렸지만 바냐는 그런 호화로운 차림새야말로 그녀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바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오히려 내가 사과를 듣고 싶은 것은…… 저쪽이지.”
그러면서 그녀는 손톱을 붉게 물들인 손가락으로 빨래 궁인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실로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화, 황후 폐하……. 여,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지…….”
그들 중 한 명이 용감하게 물었지만 로벨리아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걸레짝처럼 더러운 실타래는 내 하녀의 손보다는 너희들의 입에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 더럽고 야비한 말만 쏟아내는 입이야말로 걸레와 다를 바가 뭐겠니?”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단호한 녹색 눈동자에는 차가운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저희는 폐하와 같은 귀하신 분께서 지내시는 황궁에 저런 이교도 노예가 있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황실에 대한 지나친 충정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깊이 사려해주십시오.”
빨래 궁인의 말에 로벨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이 아이는 내가 친히 골라 황궁으로 데려온 아이다. 너희는 충정을 운운하면서 내 안목과 판단을 짓밟고 욕되게 만드는구나. 내가 제국의 황후이고 황실의 안주인인데, 그런 내가 골라온 아이를 모욕한다는 것이 황실에 대한 불충의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이지?”
“폐, 폐하……!”
“저희는 정말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로벨리아는 듣기도 싫다는 듯 손짓 한 번으로 상대들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들어라. 내가 데려온 하녀, 하인들은 내 안목으로 친히 골라 내 판단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들의 신분이 어찌 됐건 그들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일은 내 판단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감히 황후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제국법에 따라 그 죄를 물고 황궁에서 나가게 될 터이니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기도록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