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황후의 숨겨진 정부2021.04.25.
“그러게 말입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황실의 수치입니다.”
아이샤의 말에 맞장구치던 시종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성녀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기에 사고방식이 이곳 사람들과 조금 다르고, 특히 여성 차별에 민감하다고 들었는데. 황비 전하를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높으신 분의 명을 잘 따르면 되는 자신이 그런 걸 신경 쓸 위치도 아니었고. 말없이 손톱을 깨물던 아이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로벨리아의 뒷조사는 잠깐 멈추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뭡니까?”
“내가 지금부터 쓸 편지를 똑같이 여러 장 옮겨 적은 뒤 언론사들에게 전해. 제국의 5대 일간지는 황실의 손안에 있으니 제외하고 다른 곳에 뿌리도록 해.”
아이샤는 막힘없이 지시하곤, 깃펜과 잉크를 꺼내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저질스럽고 쓸데없는 가십만 취급하는 옐로 페이퍼(Yellow Paper)일수록 더 좋아.”
“그건…… 어째서입니까? 그런 곳에 나는 기사는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을 텐데요.”
“그런 곳일수록 황실의 영향력이 적고,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아이샤는 오래 걸리지 않아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내용이 길지는 않았으나 지명과 인명, 시일 등의 정보는 구체적이었고, 어휘는 자극적이었다. 그야말로 가십지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정보였다.
“또,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는 귀족들도 그런 뉴스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기 마련이지.”
“그…… 그렇습니까? 귀족분들께서는 신뢰도 높은 제국 5대 일간지만 보실 줄 알았는데…….”
“밖에서 품위 있는 척하는 인간일수록 저질스러운 뒷이야기에 환장하는 법이지. 내기해도 좋아. 이 편지가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보일지 말이야.”
아이샤는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봉하지 않고 시종에게 건넸다. 시종은 여전히 긴가민가하였으나,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소문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니까. 나는 그저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
그러나, 아이샤의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단 사흘조차 걸리지 않았다.
*** 수도의 황색 언론사 중 한 곳인 위켄드 오피니언(Weekend Opinion).
“에잇! 지금 이딴 걸 기사라고 가져온 거냐!”
위켄드 오피니언의 편집장 윌리엄 보너는 신경질적으로 원고 다발을 집어 던졌다.
“뭐, 히랄 산맥에서 신종 괴생명체 발견? 뭄바 왕정의 저주가 걸린 목걸이? 너희는 이게 진심으로 재밌다고 생각했냐?”
“저,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정말로 기삿거리가 없어서요…….”
“이러다 있던 구독자들도 다 떨어지겠다! 이 녀석들아. 우리가 무슨 오컬트 전문인 줄 알아? 우리 독자들이 이런 걸 원하는 줄 아느냔 말이다!”
보너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유명인의 비밀 연애! 아니면 유명인의 사생아, 숨겨진 오점! 그런 진짜 뉴스거리를 가져오란 말이다!”
“하, 하지만 그런 뉴스가 아무 때나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놈들아, 뉴스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와야지!”
보너가 책상을 쾅 내리치자 기자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여기가 어디냐? 바로 위켄드 오피니언이란 말이다. 그 유명한 달리아 클레멘츠의 숨겨진 사생아, 패트리시아 애쉬비와 휘팅턴 백작의 비밀 연애, 베네딕트 후작 영식의 평민 애인 같은 대박을 터뜨린 곳이라고!”
“…….”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인간이 어디 있어. 일주일에 168시간 붙어서 밀착취재 하다 보면 어떤 놈이든 뉴스거리 하나는 나오게 되어 있어. 그 정도로 할 의지와 열정이 없으면 당장 짐 싸서 나가! 이래서 요즘 젊은 녀석들이란……! 내가 수습기자였을 때는 말이야……!”
편집장의 ‘나 때는 말이야’ 가 시작되려던 바로 그때였다.
“편집장님!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온 우편물입니다.”
“뭐야? 또 저주받은 목걸이 같은 건 아니겠지? 진짜 알짜배기 정보가 아니면 불쏘시개로나 써버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보너 편집장의 얼굴은, 수습 일꾼의 이어지는 말에 장밋빛 화색이 돌았다.
“그게…… 황후 로벨리아의 숨겨진 정부에 대한 정보랍니다!”
“뭐라고?!”
그의 기자 생활 20년 내공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알짜배기 정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대박 뉴스였다. *** 그 제보를 받은 뒤 한가하던 위켄드 오피니언의 사무실은 무척이나 바빠졌다. 편지에 쓰여 있는 목격자를 확보하고, 인터뷰를 따고, 기사를 작성하고, 삽화를 그리고, 편집과 인쇄를 하는 등…….
“별달리 흥미로운 기사가 없으니 이번 호에서는 이 뉴스를 메인 기사로 써야겠다. 라만차에서의 황후의 행적과 정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20p를 채워야겠어.”
보너 편집장이 최대한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고민하고 있던 그때, 걱정스러운 얼굴의 수습 기자가 다가왔다.
“저…… 편집장님. 황후가 라만차의 거리에 갔다는 건 알겠는데, 숨겨진 정부가 있다는 정보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 행적을 보고도 모르겠냐? 황후는 라만차에서 대량의 성인용품을 구매했어. 현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황후는 다른 남자와 사용하기 위해 그 물건들을 구매했겠지.”
“그…… 그럼 결국은 편집장님의 추측이 아닙니까. 정말 괜찮은 겁니까? 황실에 대해 이런 추측성 기사를 써도…….”
“이 녀석아, 이건 추측이 아니야! 연역적 사고에 따른 합리적 추리지! 설령 아니라고 해도, 제국법에 따르면 5대 언론사를 제외한 국내 언론사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제아무리 황실이라고 해도 우리 위켄드 오피니언을 어찌하진 못해. 제국은 법치 국가이니까.”
수습기자의 진심 어린 걱정을 코웃음 한 번에 넘겨버린 뒤, 편집장은 인쇄공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이게 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다! 너희는 무척 막중하고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해서 위켄드 오피니언은 창간 이래 인쇄 부수의 신기록을 달성했다. *** 아이샤는 위켄드 오피니언에 제보를 넣은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독 보도에 더 관심을 갖는 법이니 언론 제보는 한 곳으로 만족하고, 다음은……. 바람잡이를 해두는 것이 좋겠어.’
그녀는 사람을 써서 사교계에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곧 황실에 관련된 놀라운 뉴스가 발표될 것이다. 최초로 보도되는 곳은 위켄드 오피니언이다.’라고. ‘황실과 관련된 놀라운 뉴스’라는 말에 수많은 호사가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황실과 관련된 놀라운 뉴스라는 게 대체 뭘까요?”
“황비 전하께서 아이라도 품으신 걸까요?”
“어쩌면 또 다른 황비나 정부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어떤 이야기든 정말 기대되는군요.”
유명인의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멋대로 추측을 떠들어대며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숨죽여 기다리고 또 고대하던 위켄드 오피니언의 발간일.
“특급 뉴스요! 로벨리아 황후 폐하께서 라만차의 거리에 행차하셨답니다!”
“무려 30명의 노예를 백지수표로 사들여 황궁에 들였다고 합니다!”
“총 12p에 달하는 황후 폐하의 숨겨진 정부에 대한 분석 기사도 있습니다!”
위켄드 오피니언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부수를 발간하였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일주일 동안 준비한 분량은 고작 3시간 만에 완판되었고, 이후에도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여 추가분을 인쇄하였으나 수요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편집장 윌리엄 보너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바로 우리 위켄드 오피니언의 저력이 아니겠냐! 으하하하하!”
귀족 여성은 쳐다보기는커녕 입에 담기도 부끄러워하는 장소인 라만차의 거리. 그곳에 다름 아닌 황후가 친히 행차했고, 성인용품과 노예를 대량으로 구매했다는 소식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화젯거리였다.
“어떻게 황후씩이나 되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망측한 물건은 물론이고 노예까지 구매하다니 황후 폐하께서는 절대 정숙한 숙녀는 아니로군요.”
“저는 일찍부터 그럴 줄 알았습니다. 평소에 황후 폐하께서 입고 다니시는 의복만 보아도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이 음란한 물건들은 대체 누구랑 사용하려고 구매하신 걸까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인 듯한데.”
하나, 정작 당사자인 로벨리아는 시사, 경제, 정치를 다루는 신문만 읽고 가십지에는 관심이 없었던지라 이 소식을 제일 늦게 안 사람 중 하나였다.
“황후 폐하! 크, 큰일이 났습니다.”
“하아암,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시녀가 깨우는 바람에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로벨리아가 눈을 비볐다.
“위켄드 오피니언이라는 가십지에 폐하께서 라만차의 거리에 다녀오셨다는 소식이 기사로 난 모양이에요!”
“그것도 메인 기사로서 그 분량이 무려 30p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를 어떡하죠, 폐하? 정말, 정말 큰일이에요!”
시녀들이 하는 말에 로벨리아의 눈이 확 뜨였다.
“뭐…… 뭐라고?”
“너무 상처 받지 마세요, 폐하. 폐하께선 떳떳하시니까요.”
“맞아요. 저희는 알아요. 폐하께서는 누구보다 순결하고 정숙한 마음을 가지셨다는 걸…….”
시녀들이 성심성의껏 위로하던 그때……. 로벨리아는 침대 위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만세! 드디어 소문이 났구나!”
“네…… 네?”
“난 또, 진짜 소문이 안 나면 내가 직접 사람 써서 퍼뜨리기라도 할까 했지. 정말 다행이야! 내가 한 일이 헛수고가 아니었다니!”
로벨리아의 이상 반응에 시녀들은 입을 떡 벌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보는 시녀들을 뒤로하고, 로벨리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나에 대한 여론은 바닥을 찍을 것이고, 그럼 아무리 알렉산드로스라도 나를 놔주는 수밖에 없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정치적인 이익에 목숨을 거는 인간이니까 말이야. 나처럼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아내를 설마 가만 놔두겠어?’
하지만 그녀의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로벨리아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오후 1시경, 오찬 시간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긴급 기자회견을 소집하신다고 합니다, 폐하!”
“뭐? 기자회견?”
로벨리아는 먹던 포크를 접시 위에 떨어뜨렸다. 이번이 황궁에서 먹는 마지막 만찬이라고 생각하고 든든히 배를 채우던 중이었다.
“네, 게다가…… 황후 폐하께서도 참석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뭐라고? 나까지?”
“그렇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폐하! 이제 기자회견까지 반 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로벨리아는 뒤통수가 다 띵해졌다.
‘그 인간, 이번엔 또 무슨 수를 꾸미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