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노예와 황제의 대치 (32/151)

32. 노예와 황제의 대치2021.04.22.

한 차례의 요란한 소동 끝에 로벨리아의 방문이 열렸다.

16549679221725.jpg“정말 감사했어요. 네, 네. 평온한 밤 되세요.”

순하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웃으며 인사하던 케일럽의 얼굴은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씻어낸 듯 변했다. 그곳에는 로벨리아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한 그가 있었다.

16549679221725.jpg“아쉽게 되었네. 좋은 기회였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16549679221725.jpg“뭐,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리고 그분은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지. 충분히.”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언제나 가장하던 사랑스럽고 다정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뱀 같은 계략을 속내에 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16549679221739.jpg“어떤 기회를 말하는 거지?”

동굴 같은 저음이 적막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케일럽은 움찔 놀라며 앞을 보았다. 길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두 개의 금빛 눈동자가 나타나더니, 곧 검은 옷을 두른 거대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케일럽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밉살스러운 그의 적수.

16549679221725.jpg“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하지만 그런 속내는 익숙하게 숨긴 채, 그는 제국의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

16549679221739.jpg“내 일찍이 너더러 분수를 알지 못하는 놈이라 평한 적이 있었지.”

그의 눈빛은 흉흉했고 목소리는 몰아치는 서릿발과 같았다.

16549679221739.jpg“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만,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너는 이제 그 검은 흉계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황실 기사단도 얼어붙어 버릴 정도의 위압감이었으나 고작 16살인 케일럽은 버텨냈다. 주저앉거나 추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6549679221739.jpg“건방진 어린 노예야,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황후의 덕이다. 그런데도 너는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배반하고 그녀에게 흑심을 품다니, 네놈의 사지를 찢어 마물의 먹이로 던져준다 해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16549679221725.jpg“폐…… 폐하. 부디 제 말을 들어주세요.”

알렉산드로스의 거대한 위압감 앞에서 케일럽은 가엾을 정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16549679221725.jpg“폐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저는 노예인 주제에 감히 황후 폐하께 연모의 마음을 품은,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놈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케일럽의 갈색 눈동자가 별안간 번득이며 치켜 올라갔다.

16549679221725.jpg“하지만 폐하께서 그런 절 어찌하시겠습니까?”

16549679221739.jpg“뭐?”

16549679221725.jpg“말씀하신 대로 저의 사지를 효수하여 마물의 먹이로 던져주시겠습니까? 제 눈을 멀게 하여 변경 야만족의 땅에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영 지하감옥에 가두어두시겠습니까? 유감이지만 전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케일럽이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케일럽이 언제나 짓던 굴종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16549679221725.jpg“저는 폐하께서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 압니다.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와의 관계가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시죠. 하지만 실로 황공하게도……. 황후 폐하께서는 저를 상당히 총애하고 계시거든요. 뭐, 물론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라 남매간의 정에 가까운 감정임은 알고 있습니다만…….”

16549679221739.jpg“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이것이 네가 로벨리아 앞에서 보이지 않는 본성이로구나.”

16549679221725.jpg“그러므로 저는 폐하께서 이리도 오만방자한 저를 마물의 먹이로 주거나 변경으로 쫓아내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제 본성에 대해 아시게 되었다 해도, 그걸 황후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리도 없고요. 황후 폐하께서는 밉살스러운 남편보다는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케일럽을 더 믿으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케일럽은 다시 히쭉 웃었다. 숱 많은 갈색 속눈썹이 포개어지고 애굣살이 부풀어 오르는, 실로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16549679250045.jpg

16549679221725.jpg“자, 현명하시고 계산에 능한 폐하시라면 제 말뜻을 이해하셨겠죠. 그럼 이제…… 착하고 불쌍한 어린 노예 케일럽을 괴롭히는 것은 그만둬주시면 안 될까요? 이 이상 황후 폐하와 마찰을 겪으시는 건 곤란하시잖아요.”

16549679221739.jpg“…….”

알렉산드로스는 차갑기 짝이 없는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위압감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케일럽은 휴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허세를 좀 부렸지만 사실 등과 손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16549679221739.jpg“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라.”

알렉산드로스가 얼음장과 같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16549679221725.jpg“죄송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계속해서 접근하신다면 말이죠.”

16549679221739.jpg“…….”

16549679221725.jpg“그럼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평온한 밤 되옵소서, 폐하.”

노예로서의 예를 갖춘 뒤, 케일럽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16549679221725.jpg‘어쩌다 보니 허세를 좀 심하게 떨어버렸네. 내 인생 최초의 연적이라고 생각하니 그만…….’

특히나 알렉산드로스는 지략과 모략에 능한 자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사고를 가장해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케일럽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케일럽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로벨리아와 마법 스승은 그의 마법 실력이 3서클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16세인 지금, 케일럽의 마법 실력은 무려 6서클에 달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십 대의 나이에, 그것도 독학으로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16549679221725.jpg‘어쨌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도 내 한 몸 보전할 정도는 된다는 거지.’

물론 천하를 호령하는 검술의 귀재 알렉산드로스가 덤벼든다면 자신은 지체 없이 산산조각이 나겠지만……. 로벨리아의 시선을 의식하는 알렉산드로스는 절대 직접 자신을 해하려 하진 않을 것이고, 자신의 수하들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16549679221725.jpg‘그런 어중이떠중이에게서 몸을 지켜낼 자신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6서클의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 외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케일럽은 결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16549679221725.jpg‘자, 어쨌든……. 이제는 황후 폐하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겠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로벨리아는 16살이라는 그의 나이 때문에 거부한다고 했지만, 케일럽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직 자신이 로벨리아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 충분히 그녀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16549679221725.jpg“이걸 어떡한다…….”

고민하던 케일럽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어느 방의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었다.

16549679221725.jpg‘저곳이 아이샤 황비가 지내는 곳이구나.’

로벨리아는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해 잘 말해주지 않으려 했지만, 케일럽은 궁인들에게 들어 로벨리아와 아이샤의 관계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후인 로벨리아가 어째서 황후궁을 놔두고 황비궁에서 지내고 있는지도. 케일럽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것은 아까와 같은, 흉계를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자의 미소였다.

16549679276777.jpg

  ***

16549679302974.jpg“모르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다니?”

아이샤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올라갔다. 당황한 시종은 쩔쩔매며 그녀에게 말했다.

16549679302981.jpg“하지만 정말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혼인 전에는 늘 공작가 영지에서만 지내셨고, 혼인 후에도 오로지 궁에서 업무만 하시느라 외부 활동은 조금도…….”

16549679302974.jpg“그럴 리가 없어! 네가 무능하고 게을러서 조사를 제대로 안 한 게 아니고?”

16549679302981.jpg“저, 정말입니다! 최선을 다해 조사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접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작은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살롱 이후, 로벨리아가 이세계와의 접점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아이샤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의 행적을 조사했다. 로벨리아가 이세계인 대한민국의 정보를 아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러니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면 어딘가에는 수상쩍은 부분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16549679302974.jpg‘없을 리가 없어. 책이든 사람이든 로벨리아가 그 정보를 알게 된 곳이 있을 텐데, 대체 어디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행적에는 조금의 수상한 부분도 없었다. 지금껏 살아온 그녀의 인생은 마치 레일로드 같았다. 너무나 똑바르게, 단 한 치의 이탈도 없이, 부모님이 제시해준 길대로만 살다가 혼인을 하고는 정숙한 황후로서 해야 하는 행동만 했다. 몇 달 전 갑자기 성격이 이상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6549679302974.jpg‘이세계의 정보는 공공재라서, 대중에 공표되지 않은 이세계의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건 중범죄야. 그런 위험한 행동을 했는데 흔적이 남지 않을 리 없단 말이야.’

시종의 보고서를 신경질적으로 뒤적거리던 아이샤는 결국 홧김에 그것을 두 팔로 쓸어 던져버렸다.

16549679302974.jpg“멍청하고 쓸모없기는! 로벨리아의 하인, 하녀들은 하나같이 유능하다던데 왜 나한테는 이런 멍청한 애들밖에 없는 거야?”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던 시종은 그 말에 안색을 바꾸었다. 계속해서 무능하다고 비난만 당하받던 와중에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찾은 것이다.

16549679302981.jpg“아, 그 부분 말입니다. 황후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16549679302974.jpg“무슨 소문?”

16549679302981.jpg“황후가 새로 들여온, 유능하기로 유명한 하인과 하녀들이 전부 노예라는 소문이요.”

16549679302974.jpg“뭐라고? 노예? 제국에 노예도 있어?”

아이샤는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예전에 배운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요즘 그녀는 제국의 사회, 문화, 업무에 대해 강제로 공부하고 있는 처지였으니까.

16549679302974.jpg“그 소문의 출처는 어디야? 확실한 거야?”

16549679302981.jpg“그게……. 수도의 단 하나뿐인 그레이마켓, 라만차의 한 상점 주인에게서 들은 증언입니다. 황후가 수많은 호위병을 이끌고 친히 행차하셨다고요. 이건 황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시종이 보고서 묶음을 내밀자 아이샤는 그것을 황급히 받아들었다.

16549679302974.jpg“라만차라면 여자들은 절대 갈 수 없는 곳 아니야? 로벨리아가 거길 왜 갔대?”

16549679302981.jpg“그건 잘 모르겠지만, 황후는 그곳에서 쇼핑을 즐기다가 경매에도 참석하더니, 경매에 출품된 모든 노예를 구매했다고 합니다.”

16549679302974.jpg“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소문이 하나도 안 났대?”

16549679302981.jpg“그게……. 바로 다음 날, 검은 의복을 입은 자들이 몰려오더니 라만차 거리의 상점 주인과 직원들을 모두 입막음했다더군요. 어떤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던 걸 보면 아마 언론사에도 비슷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시종의 말에 아이샤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16549679302974.jpg“로벨리아? 아니면 알렉산드로스인가? 둘 중 하나가 분명해.”

아이샤는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16549679302974.jpg“황후가 되어서 그렇게 더럽고 수치스러운 곳에 가다니……. 이게 소문이 났어야 하는 건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