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고2021.04.15.
알렉산드로스가 사과한다며 다녀간 뒤,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황후가 직접 그레이마켓에 다녀오고 경매에 깽판을 놓은 데다 노예를 서른 명이나 사들였는데……. 아무 일도 없잖아?!’
그랬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국 5대 일간지는 물론이고 싸구려 가십지까지 전부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내가 라만차의 거리에 다녀왔다는 소식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목격자들을 만들어냈는데, 대체 왜?!’
내가 최대한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수많은 호위기사들을 이끌고 쏘다닌 것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목격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말도 안 돼! 황후가 그레이마켓에 다녀와 황실의 권위를 훼손했다는 것만큼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어디 있어?’
분명 수많은 신문에 주요 기사로 날 것이고, 입방아 찧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대화에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나에 대한 비난과 황후를 폐하라는 여론이 거세질 줄 알았는데……. 그중 어떠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에 실망도 컸다. 허탈한 마음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내 머릿속에 섬광 같은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알렉산드로스가 꾸민 짓 아니야?’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 인간을 진짜……!’
화가 나서 한걸음에 알렉산드로스에게 달려가려던 나는, 채 열 걸음도 걷지 못하고 뚝 멈추어 섰다.
‘아니야, 어쩌면 이것까지 그 인간의 계략일 수도 있어. 나를 화나게 해서 찾아오게 만들려는 거지.’
과도한 생각인가 싶지만 알렉산드로스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애초에 그는 나를 설득하려 안달이 나 있었고 나는 설득 당하기 싫은 입장이 아닌가.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접점이 생기면 생길수록 나에게는 손해였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어디 내가 찾아가나 봐라. 절대 안 가. 얼굴도 안 마주칠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 분을 다스렸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그로부터 얼마 뒤.
“폐하, 다름이 아니고……. 지난번 구매하셨던 물건들을 어떻게 할까요? 창고 2개에 가득 쌓여 있는데 아무런 분부도 없으시기에 여쭈러 왔습니다.”
내가 시녀에게 손톱 관리를 받고 있을 때, 또 다른 시녀 한 명이 내게 물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때 샀던 물건들을 떠올렸다. 라만차의 거리에 다녀온 뒤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게 있었지. 참, 이걸 어찌한다…….”
그때 사 온 것은 출처 모를 마도구들과 성인용품으로 그냥 내다 버리기도, 남 주기에도,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기에도 찝찝한 것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상쾌하게 말했다.
“전부 불태워버리도록 해.”
“예? 저, 전부 말인가요?”
시녀는 깜짝 놀란 눈치였다. 하긴, 비싼 돈 주고 사 온 물건들을 한 번 꺼내 보지도 않고 불태워버리라니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애초에 관심 있어서 산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 악명을 위해 산 거니 상관없지.’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불태워버려.”
나는 반질반질 매끄럽게 관리된 데다가 예쁜 물까지 들인 손톱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녀는 아리송한 얼굴을 하면서도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산 물건 중에 이것도 있었지.’
나는 장식장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찾았다!’
장식장의 어느 칸에는 눈코입이 삐뚤빼뚤 수놓여 있는 못생긴 인형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 으스스한 모양새 하며, 몸통에 장기가 그려져 있는 것 하며, 그건 아무리 봐도 저주 인형이었다. 그 못생기고 초라한 모양새가 묘하게 정감이 가기도 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짜증 나게 하면 쓰려고 따로 두었던 것이다.
“케이시, 저주 인형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니?”
내 손톱을 손질해주던 시녀는 내 질문에 깜짝 놀란 듯했다.
“저, 저주 인형이요?”
“그래.”
“제가 알기로는 저주를 걸고 싶은 상대방의 모습과 비슷하게 꾸미고, 상대방의 신체 일부, 그러니까 손톱이나 머리카락 같은 것을 넣으면 된다고 알고 있어요. 그, 그런데 저주 인형 같은 것은 왜 물으시는지…….”
시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런 게 있어.”
시녀들은 이 인형에 대해서 모른다. 시녀들이 없을 때 산 물건이니까.
‘그렇단 말이지. 알렉산드로스와 똑같이 꾸미고, 신체 일부를……. 흐음.’
알렉산드로스는 늘 나를 짜증 나게 만들곤 하지만 당장 그에게 저주를 걸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째로 제국법상 황족에게 저주를 거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황족시해죄에 준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그의 신체 일부가 없다는 것.
‘난 황후이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머리카락 한 가닥 얻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별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
어쨌든 그러려면 그를 만나야 하니까 말이다. 황족시해죄에 준한 처벌을 받게 되는 일을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뭐, 이건 그냥…….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가지고 있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손톱에 칠하는 물감과 붓을 가져다가 인형 위에 그림을 그렸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 눈, 의뭉스러운 미소. 물론 저주 인형을 황제의 모습으로 꾸며놓은 걸 들켰다간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나는 얼굴을 일부러 못생기게 그렸다. 이 정도면 아무도 알렉산드로스인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만하면 됐겠지.’
나는 완성된 인형을 보고 피식피식 웃다가, 인형을 책장 금고에 넣고 잠갔다.
“휴, 재밌었다.”
심술을 부리고 나니 화가 좀 풀려서, 나는 한층 더 맑은 머리로 이후의 계획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알렉산드로스의 고집이 좀 세긴 하지만……. 어쨌든 이혼은 반드시 하게 될 일이고, 그럼 그 이후는 어떡한다.’
사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나자 점차 흐려졌다.
‘하긴, 어차피 가족들과는 절연했고, 별달리 친구도 없고. 차라리 여기서 계속 사는 게 나을지도 몰라. 비록 남의 자리를 빌린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계속 살아간다는 전제하에. 이혼을 한 뒤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로벨리아도 가족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믿을만한 친구도 하나도 없지.’
나는 냉정한 눈으로 생각했다.
‘결국 믿을 건 돈과 나뿐이야.’
사실 내가 미친 듯이 돈을 쓰고 다니는 것도, 악녀가 되어 이혼당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위한 대비이기도 하다. 제국 사회는 극히 보수적이라서 이혼 시 기본적인 재산은 전부 남성이 가져간다. 하지만 여성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딱 두 개 있는데, 그건 바로 보석과 드레스였다. 즉 황실의 재정을 축내며 보석과 드레스를 마구 사들이는 것은 그것이 나의 미래의 자산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나 사치를 부려댔으니, 소도시에 적당한 집 한 채 정도는 얻고도 남겠지.’
남은 돈으로는 사업을 하면 나 한 몸 정도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나의 재능을 살려서 법무사, 세무사와 같은 일을 하거나. 제국 역사상 여성 법무사, 세무사가 없었다고 하지만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가능은 할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이리저리 안면을 터놓고 뒷배를 만들어놓는 것이 좋겠지.’
돈을 쓰기만 하는 것에서 나아가서 상단들과 친분을 쌓아두고 사업 아이템을 물색해둔다면 장차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나는 오후 내내 장래의 계획을 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황후 폐하께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 누가 보냈지?”
“라만차의 거리에서 일하는 평민 남성입니다. 이름은 조셉 머렌트라고 하더군요.”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도 들지 않고 서류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나, 비서관의 말을 듣는 순간 손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내용은?”
“그게, 음……. 지난번 라만차의 거리에서 황후 폐하께서 주신 가르침이 너무나 인상 깊었으며,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그러한 ‘가르침’을 꾸준히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일평생 황후 폐하께 충성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제국법상 황족에게 오는 우편물 중 평민 혹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자의 것은 일차적으로 궁인들이 검토하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13대 황제가 신원 미상의 평민에게서 온 편지를 열었다가 편지에 발라져 있는 독극물에 독살당했을 때 생겨난 규율이었다. 라만차의 거리에서의 로벨리아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받았기에 알렉산드로스는 조셉 머런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린 노예에게 채찍질을 하다가 로벨리아한테 벌을 받은 사내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채찍질이 그렇게 좋다면 그렇게 해주어야지. 보낸 자를 잡아 고문하고 지하감옥에 처넣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비서관 로버트가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새로 나타난 인물은 알렉산드로스의 믿을만한 정보원이었다.
“왔나. 보고할 건은?”
알렉산드로스는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그게……. 황후 폐하께서 창고에 보관해두었던 상품을 전부 처분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처분을?”
“예.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에 태우셨다고 합니다만…….”
예상 외로 알렉산드로스가 놀란 티를 내자 정보원은 당황한 나머지 말꼬리를 흐렸다.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역시…… 나와 사용하려고 구매한 건 아니었군.’
물론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로벨리아가 알렉산드로스와 밤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고 해도 그는 그녀를 유혹해낼 능력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속 어딘가가 허전해지는 듯한 이 기분은 대체 뭘까?
‘결국 처분해버린 것을 보면 실수로 구입했거나, 그것들을 구매한 일 자체가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나 본데.’
알렉산드로스는 재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것은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그게 전부인가?”
“아닙니다, 폐하.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그게……. 황후 폐하께서 라만차의 거리에서 사 온 노예들이 말입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노예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니요. 그게……. 노예들이 일을 너무 잘합니다.”
“응?”
“노예들이 일을 어마어마하게 잘해서, 궁내에서 황후 폐하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