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사과와 유혹2021.04.11.
그의 눈앞에 나타난 로벨리아는 빗지도 않은 머리에 가운 차림을 하고 서 있었다.
“눈치채셨겠지만 그거야 핑계였죠. 그 핑계에 저의 의사를 깨닫고 돌아가 주시길 바랐는데 제가 폐하께 과도한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그녀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순간 알렉산드로스는 일종의 시각적 충격을 받았다. 그야 그는 황제로 제국에서 가장 지엄한 자였다. 그런 그의 앞에 나설 때는 남녀와 지위의 고저를 불문하고 누구나 최고로 깔끔하게 세신하고 단장을 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면도를 다시 하고, 머리가 벗어진 자라면 가발이라도 썼다. 그런데 대낮에 머리조차 빗지 않고 잠옷 차림으로 나타나다니! 이 또한 로버트가 보았으면 뒷목을 잡고 고혈압으로 실려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찾아온 것에 대해 항의하고 싶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군.’
알렉산드로스는 속으로 헛웃음 짓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자신의 당황과 놀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협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돌아가겠다고 했지. 다만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을 뿐.”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길 원한다면 그런 거로 하지. 나는 지금 그대를 마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거든.”
알렉산드로스의 순순한 태도에 로벨리아는 의아함을 느꼈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물론 오만방자하게 다리를 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찾아오신 거죠?”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씀해주시길 바랄게요. 저는 지금 바쁜 용무가 있거든요. 머리조차 빗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말투는 불손하기 그지없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그런 화법에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그대에게 사과하고 싶다.”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무거워서 상대에게 부담을 줄 정도도 아닌, 자로 잰 듯 딱 선을 지키는 말투.
“내 감정이 앞서 입술을 맞대고 말았지. 그대가 당황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대에게 사과하고자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달콤하고 나직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로 사과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로벨리아만은 그 ‘누구라도’에서 예외였다.
‘최대한 잊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이야기를 하다니!’
사과고 자시고 그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알렉산드로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더더욱! 그의 입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듣자 로벨리아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오랜 사회생활 경력으로 표정을 숨기는 것은 자신이 있었으나 단 하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만은 예외였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은 생리현상이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전생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로벨리아가 특별히 얼굴 피부가 얇나 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자각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차라리 꾸미고 나올 걸 그랬나. 그랬다면 부채로 얼굴을 가릴 수 있었을 텐데.’
붉어지는 낯빛을 숨기기 위해 로벨리아는 벽의 장식을 보는 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죄책감’이라, 폐하께서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으셨다니 그거 정말 놀라운 사실이로군요.”
한편 그런 그녀를 보며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아무리 숨기려 해봤자 그의 눈에는 상대의 낯빛이 훤히 보였다. 눈치가 워낙 좋은 그였기에,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도 대강 짐작이 갔다.
‘이전에도 종종 느끼곤 했지만……. 로벨리아는 보기보다 이성의 접근에 아주 약한 것 같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용쓰는 모습은 상당히 귀여웠다. 알렉산드로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휘어졌다. 하지만 그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잠깐이었다.
“제국의 태양이라는 분께서 이토록 짐승 같은 면모가 있으실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저야 곧 이혼해 남이 될 몸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지만, 입 맞출 상대가 황비로는 부족하셨던 건가요?”
로벨리아의 가시 같은 말은 잘 벼린 날붙이처럼 알렉산드로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타인의 폭언 따위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던 그였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차피 벌레들의 날갯짓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로벨리아의 말은 어째서 이렇게 깊게 파고드는 건지. 알렉산드로스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로벨리아. 그대도 알지 않나. 나는 그대든, 황비든 누구하고도 동침하거나 입을 맞추지 않는다는 걸.”
“그야 그건…… 네?”
다시 쏘아붙이려던 로벨리아는 그만 하던 말도 삼켜버렸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도, 동침하거나 입을 맞추지 않으신다고요?”
“왜 그대가 놀라는지 모르겠군. 혼인 초기에 했던 말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황비와는 몰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아, 아니 그게…….”
심지어 혼인 초기에 한 말이라고? 로벨리아는 정말이지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빙의 전의 기억이 없으니,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아내들과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은 원작과 공식 기록물에 기록된 정보뿐이었다. 그리고 어디에도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아내들과 동침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와 있지 않았다. 어쨌든 부부관계이고 또 일반적으로 왕족은 후계의 생산을 중요시하니만큼 당연히 로벨리아나 아이샤와 동침을 했을 줄 어림짐작했던 것이다.
‘아내를 둘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동침은커녕 키스 한 번 안 해봤다고? 대체 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족에게 있어서 후계생산보다 중요한 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너무 궁금해서 눈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분명 알렉산드로스가 이상하게 볼 터이니.
‘아니, 그, 그럼…… 어제 한 그게…….’
더군다나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 사이의 첫 키스였단 말이야?!’
정말이지, 너무 놀라워서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로벨리아는 필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궁금한 것도 많고, 상대에게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미 알렉산드로스는 눈에 의아함을 품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가 상대에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아, 알죠, 물론! 하지만 황비하고는 몰래 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데 한 번도 안 하셨다니, 그거 새로운 사실이네요.”
“이거 참, 그대에게 내 신뢰도가 얼마나 낮은지는 확실히 알겠군. 하지만 사실이다, 로벨리아. 내가 누군가와 입을 맞춘 건 지난밤이 처음이었어. 영영 꺼지지 않는 불길의 메스타포를 걸고 맹세할 수도 있다.”
제국의 사회, 문화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로벨리아는 그가 한 맹세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제국인들이 하는 맹세 중 가장 등급이 높은 것이었다. 메스타포는 타오르는 불로 가득한 바다를 뜻했는데, 제국인들은 메스타포에 거짓 맹세를 하면 사후 불바다에서 영원히 불타오르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데 메스타포를 걸고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로벨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나 로벨리아는 물론 그 어느 누구와도 입을 맞춰본 적이 없다니, 말도 안 돼! 얼굴을 보나 성격을 보나 분명히 엄청난 경험치를 가진 닳고 닳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그럼 어제의 그 엄청난 키스 실력은 대체 뭐였던 거야?’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읽은 지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사실인데……. <이세계에서 온 꽃>에는 베드신은커녕 키스신도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
작품의 후반부까지도 키스신 한 번 나오지 않아서 원망의 댓글이 자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그가 지난밤의 일에 대해 언급해서 뒤숭숭하던 차에, 그가 동정이라는 TMI와 그의 첫키스를 가져갔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더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몰라.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랑 입술을 부비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남의 연애산데. 먼저 키스한 것도 저쪽이고 첫 키스라고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너무 구시대적인 생각이지. 나는 조금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결국 그렇게 결론지어버린 로벨리아는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정보네요.”
기분 탓일까? 그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아주 약간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저 능글능글하고 음험한 남자가 풀이 죽다니 말도 안 되지. 잘못 본 걸 거야.’
***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사과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로서도 한가지 수확이 있었다.
‘이로써 확실해진 게 있군. 로벨리아가 남성의 접촉에 약하다는 사실 말이지.’
로벨리아가 시녀들과 가까이 붙어 놀고 있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남성과는 그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능숙한 척, 여유로운 척하기는 하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로벨리아가 다른 남자들과 어떠한 신체적 접촉도 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접촉해올 때 행여 그녀가 자신에게 그랬듯 얼굴을 붉힐까 봐 조마조마해지기도 했다.
‘로벨리아의 호위를 늘려야겠어. 아니, 기왕이면 여기사로 호위를 구성하면 딱 좋겠군.’
그리고 이번에 얻은 소득으로 그의 머릿속에서 짜인 새로운 계략 하나.
‘그녀를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그녀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당근을 써보았으나 그 어떠한 것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그녀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였던 것. 그것은 바로 이성적인 접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나를 흠모한 전적이 있다. 한 번이 가능하다면 두 번은 더욱 쉬울 터.’
사실 알렉산드로스는 연애감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스승이 가르쳐주거나 책으로 읽는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이 자신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적은 있어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유혹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그저 호인인 척 웃어주고 약간의 예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만으로도 여자들을 안달하게 만들곤 하던 그였다. 비록 로벨리아는 일반적인 여자와는 다르지만……. 아무런 의도 없이도 무수한 여자들을 유혹해내곤 했으니,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시도한다면 로벨리아를 유혹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계략이 있으니까. 이토록 냉랭하고 자신에게 퉁명스러운 그녀를 사랑의 사슬로 옥죌 수만 있다면? 그녀가 자신의 감정적 포로이자 헌신적인 협력자가 되어준다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 얼마나 큰 기쁨일까? 알렉산드로스는 그러한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구미가 당기는 계획이로군.’
그렇게 생각한 그는 호인으로 보이는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