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내가 왜 키스를 했지?2021.04.08.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어떤 생각을 하며 집무실에 돌아왔는지도 몰랐다. 그저 경황없이 걸은 끝에 알렉산드로스는 어느샌가 집무실 문을 닫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뜨거운 숨을 토하며 천장을 보았다. 목을 거슬리게 조르는 타이는 벗어서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 버렸다.’
로벨리아의 앞에서 화를 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입술을 덮치다니. 심지어 당초의 계획이었던 질문은 꺼내 보지도 못했다. 크든 작든 계획의 실패 자체를 용납하지 않던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멍청한 실수, 처참한 실패는 난생처음이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아무리 계획이 실패했다고 해도 로벨리아를 손에 넣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데……. 생각해라, 알렉산드로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좋은 방안을 짜내.’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면서도 자존심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구르는 듯한 고통은 여실히 느껴졌다. 고민하던 알렉산드로스는 신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역시 자신이 미친 게 분명했다.
‘이렇게 시급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입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니.’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지우려 해도 그 붉은 입술을 머금었던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때의 그 만족감, 그 달콤함! 그녀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고 입술을 취하는 일은 계획 몇 개를 이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쾌감이었다.
‘그래, 고작 그런 일 따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지.’
그것은 너무나 두근거리며 또 두려운 일이었다. 일평생을 계획을 세우고,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으로 살아왔던 그에게는 너무나 날것의 쾌감이었다. 그 미지를 파헤치고 싶기도 했고, 그저 영영 묻어두고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고 싶기도 했다. 고작 입술을 겹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그 이상의 것을 알았다가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 감각 앞에서는 계획…… 아니, 어쩌면 평생의 숙원조차도 별것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처럼 아득했다. 오로지 자신 스스로 가둬둔 숙원을 향한 레일로드 위에서만 살아온 그로서는 주저할 수밖에는 없는 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민했다.
‘일반적으로 이성과 입술을 겹치는 행위가 원래 이 정도의 쾌락을 안겨다 주는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여자를 대상으로 생각해보아도 로벨리아만큼이나 그의 기분을 동하게 하지는 않았다.
‘기묘한 일이군. 내게 그런 감각을 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로벨리아뿐이란 말인가.’
그건 대체 어째서일까? 양측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긴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로벨리아가 유난히 성숙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로벨리아가 특별히 자신의 ‘취향’이라서? 어떠한 답도 이거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렉산드로스는 혼란스러워졌다.
‘로벨리아가 밤중에 침실에서 노예와 독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분노를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 역시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고 한들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에 의해 맺어진 결혼이었다. 제국에는 정부 제도가 있어서 혼인한 귀족이 연인을 따로 두는 것도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의 혼인은 정략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생겨난 제도였다. 물론 자신 역시 아내를 둘 두고 있고 말이다. 동침을 하지 않으니 사실상 허울뿐인 부부관계이긴 하지만은.
‘그러니 노예든 귀족 남성이든 로벨리아가 누구를 독대한다 해도 문제될 일은 아니다. 부부로 연을 맺을 때 작성했던 혼인 서약서에도 적혀 있는 내용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로벨리아가 어린 노예 1명은커녕 남자 3000명을 줄줄이 데리고 패션쇼를 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자신이……. 지금에 와서, 로벨리아가 각별히 대해주는 노예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설마…… 로벨리아와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은 건가?’
날카로운 깨달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궁외부와 궁내부의 일을 나누어 하는 업무 동료로서의 부부관계를 넘어서서?’
그래, 그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와 정원 산책을 했을 때에도 그런 의문을 품었었지.’
이렇게나 뚜렷한 전조에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이 어리석어 보일 정도였다. 스스로의 지능을 꽤 고평가하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그 평가를 다소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로벨리아와 업무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좀 더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마치 그녀가 그 어린 노예를 대하듯이 말이지. 그리고 그건 아마도…….’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특별한 협력 관계!’
그래, 그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로벨리아와 그냥 협력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특별한 협력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인재였으니까.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욕심이 날 정도로……. 그렇게 결론짓는 순간,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인재를 탐하는 마음이란 다 이런 것인가?’
함께 산책을 하고 싶고, 단순히 업무와 정치상의 도움을 주고받는 것 이상의 좀 더 밀착된 관계를 맺고 싶으며, 밤중에 한 방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싶은 게 당연한 건가?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나 욕심나는 타인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떠한 스승도, 그가 읽었던 그 어떠한 책도 인재를 탐하는 기분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 분명 그런 거겠지. 그것 외의 답이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도 개인적인 애정이나 연민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특히 계획이나 목적과 긴밀히 관계가 있어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녀와 입을 맞춘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 수습하고,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종류의 유혹과 쾌감은 그를 계획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니 숙원을 달성할 때까지는, 계획을 이루는 성취감 이외의 쾌감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그러니 잊자. 그 감각은 잊어버리자. 지금의 나에게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17번째 황비의 자식에 불과했던 자신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들어 준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냉정하고 전략적인 판단뿐이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한들.’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으아악!”
나는 별안간 베개를 발로 뻥 찼다. 높이 날아간 베개는 다시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야!”
다행히 거위 깃털이 들어간 베개라 아프진 않았지만 창피했다. 이런 ‘뻘짓’을 하고 있는 나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지난밤 있었던 일의 기억이 해일처럼 머릿속에 밀려왔기 때문이다.
“아, 정말! 아, 미치겠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비명을 질렀다.
‘진짜 내가 미쳤지, 세상에 키스할 놈이 없어서 알렉산드로스와 해?!’
물론 그쪽에서 먼저 덮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받아줬다는 것이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망나니와의 키스에 헤롱헤롱 녹아버리다니!’
그렇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정말, 진심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다. 지난밤의 나는 알렉산드로스와의 키스에 온몸이 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정신 못 차리고 그가 하는 대로 끌려다닌 거지.
‘이게 다 그 자식이 너무 잘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거보다 조금이라도 못하기만 했어도……!’
그 망할 놈이 그 말도 안 되는 키스 테크닉으로 날 홍야홍야 녹여놓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너덜너덜 넝마가 된 자존심을 끌어안고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모르겠다.’
한참을 침대를 뒹굴며 괴로워하던 나는 결국 털썩 대자로 드러누웠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겠어. 일단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잊자.’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한참을 뒹굴며 괴로워한 탓인지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잊어버리고……. 재빨리 수습하고, 그리고 없었던 일로 치는 거야. 그 일이 없었던 평상시와 같은 날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 그러기 위해서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어야지. 물론 전문가들에게 궁내부 업무를 죄다 맡겨놓은 뒤로는 계속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더 아무것도 안 할 것이다.
‘산책도 안 가고 쇼핑도 안 할 거야. 그냥 조용히 방에나 있을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 시녀들도 싹 다 물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차나 마시고 과자나 집어 먹으며 뒹굴거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지. 충분히 재충전을 해야, ‘망나니와의 이혼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도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
‘좋아, 오늘의 계획은 이만하면 완벽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별안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 시녀였다.
“오늘 하루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거라고 말했을 텐데. 나는 지금 매우 바쁘단 말이야.”
“물론 그리 명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황공하게도 반드시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기에…….”
“그게 뭐지?”
나는 퉁명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시녀는 몸 둘 바를 모르겠는 듯 주저하며 말했다.
“그게, 귀한 손님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쩐지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그를 결코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얼굴을 보면 어제의 창피한 일들이 쭉 생각날 것 같단 말이야. 어떻게 봐.’
“바빠서 못 간다고 전해드리렴.”
“하, 하지만……. 그분은 폐하의 부군이십니다.”
시녀의 동공이 진자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야, 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황제가 친히 행차했는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 바야? 성질나면 이혼해주든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이불속에 들어가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부군이고 부군의 할아버지고 절대 못 본다고 전해. 아, 차라리 아프다고 해. 열도 나고 전염성도 있어서 못 만난다고.”
결국 시녀는 울상을 한 채 자리를 떴다.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시녀는 5분 뒤에 다시 돌아왔다.
“저……. 오늘 만나 뵙기 힘드시다면 내일, 내일도 뵙기 힘드시다면 모레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십니다. 언제까지라도 찾아오시겠다고…….”
“…….”
“또한 편찮으신 것은 만나 뵙는데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뿐인 황후가 병환으로 앓고 있다면 하나뿐인 남편인 당신께서 꼭 친히 병문안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시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언제까지나 응접실에 앉아 있든가 말든가 찾아오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시녀가 문제였다.
‘지금도 가시방석 같을 텐데……. 그간 날 도와준 일이 많으니, 이 이상 곤란하게 만들어선 안 되겠지.’
결국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십 분 안에 찾아뵙겠다고 전하렴.”
“네!”
그제서야 시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 알렉산드로스는 시녀가 알려주기도 전에 익숙한 기척으로 기다리던 사람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몸이 좋지 않다기에 내가 직접 찾아가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했더니.”
로벨리아의 아프다는 전언이 꾀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나 문 뒤에서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알렉산드로스조차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