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대를 얻기 위해서라면 발밑에서 애원할 수도 있어2021.04.04.
“지금 케일럽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케일럽은 그저 순수한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폐하! 그리고 제가 이 아이를 부른 거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요.”
로벨리아가 강하게 항변했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가 케일럽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시선을 옮겨 눈앞의 여자를 빤히 보았다. 더없이 작고 가냘픈 여자. 자신의 돌발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불안해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제 손바닥처럼 훤히 드러나 보이던 여자. 그랬던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강해진 사람. 더없이 용기 있고 단호한 사람뿐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어서, 그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정말 본심대로라면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시건방진 노예를 맨몸으로 가장 위험한 험지에 던져놓고 싶었으나, 그는 그 욕망을 꾹꾹 눌러 가면 뒤에 철저히 숨겼다.
“넌 나가보아라.”
알렉산드로스의 차가운 말에 케일럽은 고개를 숙이더니 자리를 떠났다. 쾅 하는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완전히 단둘이 되었다. 잠시 어떠한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감정의 안개가 걷히고 천천히 이성이 빛을 보았다. 그와 함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계획에서 완전히 어긋난 행동을 했음을 깨달았다.
‘계획대로라면 그녀에게 정사 물품을 구매한 이유를 물어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화를 내어선 안 됐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자신이 왜 이렇게 계획에서 어긋난, 충동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걸까? 이제껏 이런 일은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는데 꼭 그녀와 관련된 상황에서만 예외적인 일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머리를 이마 뒤로 쓸어넘겼다.
“한숨을 쉰다고 제 기분이 풀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텐데요.”
그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상대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지?”
“이렇게 절 찾아오신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지요. 어차피 저를 회유하러 오신 것이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제게 화를 내셨으니 이제 원래 의도였던 회유를 하기 위해서 대체 어찌해야 하나.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 아닌가요?”
알렉산드로스는 낮게 웃었다.
“한 방 먹었군.”
마치 자신이 그녀의 머릿속을 읽듯이 이제는 그녀도 자신의 머릿속을 꽤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하여간에 그녀의 뛰어난 지략과 눈치는 자신마저 종종 깜짝 놀랄 정도였다.
“너무 그렇게 그대의 눈치가 좋다는 걸 드러내지 마. 그럴수록 더더욱 그대가 갖고 싶어지니까.”
“그러하시다면 제가 폐하에게 갑의 위치라는 것이로군요. 조언 하나 해드리죠. 앞으로는 갑이 기분 나쁠 만한 일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충동적으로 분노를 드러내거나 하는 건 금물이고요.”
갑이라! 그녀의 당돌한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만 다시 한 번 웃고 말았다.
‘황제의 갑이라니 놀라운 표현이군. 하나 이상한 일이지. 그런 주제도 모르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쁘거나 자존심이 상해야 정상인데.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단 말이야.’
“조언 고맙게 받지. 그래서 내가 고매하신 ‘갑’의 기분을 좋게 해주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야말로 지금 조언이 필요한 문제인데.”
“음…… 회유를 포기하고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시는 거죠.”
“유감스럽지만 그것만은 안 돼.”
알렉산드로스는 위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그의 눈빛에 상대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이 보였다. 눈앞의 상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는 로벨리아의 손을 감싸 쥐듯 잡아들어, 상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지난번 손등키스를 했을 때 상대의 반응이 범상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의 발등에 입 맞추며 기분을 풀어주기를 애원하는 편이 차라리 더 쉬울 거야, 로벨리아.”
아니나 다를까 상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까 전 황제의 앞에서도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그녀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온통 물들었다.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두 뺨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랐다. 대답할 말조차 잃은 듯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모습에 알렉산드로스는 척추를 내달리는 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보고 또 봐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군.’
그는 상대 몰래 입맛을 다셨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눈앞에 번듯이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밥상 같았다. 그녀가 가까스로 내어놓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시는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럴 생각까지는 없으시잖아요? 제국의 황제이신 분이.”
그녀의 말은 정답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앞에서는 충동적으로 된다지만 그녀의 발등 위에 입을 맞추며 무릎 꿇고 애원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지극히 오만하며 프라이드가 강한 자였다. 하지만, 방금 한 그녀의 말은 곧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은 뒤로 갈수록 가늘게 떨려, 마침내 ‘제국의 황제이신 분이.’에 와서는 자신의 동조를 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보여준 돌발행동들 때문이겠지.’
알렉산드로스는 날카롭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내가 그러지 않기를 말이지.’
이것이 바로 그가 파고 들어갈 지점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발밑에서 애원하지 않고도 그녀를 온통 흔들어놓을 방도. 알렉산드로스는 눈매를 접어 웃으며 로벨리아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녀는 어찌할 도리 없이 끌려와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는 태연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꼭 쥔 채였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대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듯하기에. 친히 보여주고 싶어져서 말이지.”
“뭐, 뭐를……?”
“그리도 눈치가 뛰어나면서 모르는 척하는 연기력은 대단치 않군. 그야, 그대의 발밑에 비는 내 모습 말이야. 내가 그대를 갖기 위해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주도록 하지.”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손목 위에 입술을 포개며 말했다. 철저히 계산된 모양새로 눈꼬리를 접어 눈웃음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웃음이 얼마나 색정적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벨리아는 화들짝 놀라 전신을 움찔거렸다.
“윽, 무슨……! 그, 그런 짓을.”
그녀의 여린 손이 다급히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신을 훑는 쾌감을 음미하며 입술을 핥았다.
“왜 막는 거지? 난 정말 보여주고 싶은데.”
“세, 세상에 대체 어떤 황제가 남의 발밑에 함부로 무, 무릎을 꿇고 애원해요!”
“세상에 어떤 황제가 갑을 따로 두겠나? 그래, 그대는 나의 하나뿐인 ‘갑’이니 이 정도쯤은 문제없어.”
알렉산드로스는 큭큭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하게, 그녀의 팔꿈치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어디까지 가능한지 간을 보듯이.
“앗, 으으……! 자, 잠깐.”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기쁘기 이를 데 없어……. 드디어 나의 진심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내가 그대를 손에 넣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증명하게 되지 않았나.”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로벨리아의 귓가를 훑듯이 울려 퍼졌다. 로벨리아의 얼굴은 이제 머리카락과의 경계가 흐려질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목과 귀는 물론, 팔에도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자신의 말 한마디, 손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달싹거리며 반응하는 그녀의 몸짓은 정말로 보기 좋았다. 황제로서 온갖 풍경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손에 꼽힐 정도로 빼어난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음미하듯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쇄골 위에 입을 맞추었다.
“웃……!”
알렉산드로스가 무릎을 꿇을까 봐 혼이 쏙 빠지는 바람에 로벨리아는 그의 입술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 거짓말하지 말아요. 어차피 전부 허세인 거 알고 있다고요.”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서는 필사적으로 알렉산드로스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나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알렉산드로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이지?’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와 눈치가 좋은 그로서도,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다면 보여주지. 내가 그대를 갖기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포갰다.
“으읍?!”
깜짝 놀라 로벨리아는 순간 굳어버렸다. 지난번보다는 조금은 거칠게 겹쳐온 그의 입술의 감촉이 낯설었다. 갑작스러운 충동에, 저도 모르게 닿아왔다는 느낌이 강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 그가 가진 의도는 명백했다. 그녀의 입술을 핥더니, 앞니를 세워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깨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빨아들였다.
‘이 인간 진짜 미쳤나 봐.’
기가 막히기 이를 데 없었다. 무릎 꿇고 빌어보겠다고 자신을 협박(?)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겠다며 입을 맞추다니!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남주인공 주제에 결국 자신에게 키스하고 말다니!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그의 입술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자신이었다.
‘이 인간…… 진짜, 진짜, 정말로…….’
로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면서 생각했다.
‘키스 미친 듯이 잘하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알렉산드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를 벌리더니, 이내 멈추지 않고 파고들었다.
“아…… 흐, 아…….”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았다. 자신의 숨결도. 그의 숨결도. 언젠가부터 인가 그가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꽉 잡고 침대 위로 부드럽게 누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로벨리아가 도망치면 끝까지 뒤쫓아와 마침내 얽어매고야 마는 그는 마치 사냥꾼 같았다.
‘안 되겠어.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아.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걸 다 받아주고 있는 거야?’
분위기에 휩쓸려 엉겁결에 해버리긴 했지만 진짜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비켜, 빨리……!’
로벨리아는 오른손을 더듬더듬하더니 베개를 잡았다. 그리고 눈앞의, 키스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한 남자에게 내리쳤다. 퍽! 퍽퍽! 어쩐지 익숙한 소리와 함께 흰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렉산드로스도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강제로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그는 의외로 바로 로벨리아를 놓아주었다.
“하아…… 하, 하아…….”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그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로벨리아는 공기를 한껏 들이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로벨리아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그의 무게, 그의 체온을 실감했다. 뜨거웠던 그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늦가을 공기에 닿은 피부의 솜털이 곤두섰다.
“……미안하게 됐군.”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됐으니까 나가요.”
“하지만…….”
“됐으니까 나가라니까요. 빨리!”
로벨리아는 베개를 던졌고 그제야 알렉산드로스도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간 뒤, 방 안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숨가쁜 숨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