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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녀가 나와의 밤을 원하고 있다면 (26/151)

26. 그녀가 나와의 밤을 원하고 있다면2021.04.01.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로벨리아가 이 리스트에 쓰여 있는 물건들을 산 것이 맞는지 확인해보았다. 유능한 비서관이 처리한 일이니 실수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의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물론 그 결과는…….

16549678225158.jpg“조사해본 결과 이 영수증에 적힌 목록은 황후 폐하께서 직접 구매하신 물건이 맞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이 물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황비궁의 창고에 보관해두기까지 하셨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의 보고에 알렉산드로스는 이마를 짚었다.

16549678225164.jpg‘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정보원이 제출하고 간 증거품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단정한 은제 트레이 위에는…… 영락없이 남성의 특정 부위를 본뜬 듯한 형태의, 지극히 노골적이며 외설적인 물품이 놓여 있었다. 위엄이 넘치는 집무실의 분위기와 단지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음탕함을 뿜어내는 물건은 무척 어울리지 않아,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부조리극과 같이 느껴졌다.

16549678225164.jpg‘나의 정보원에 따르면 로벨리아가 황후로 지낸 시간 동안 다른 남성을 만난 흔적은 전혀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16549678225164.jpg‘그렇다면 그녀가 이러한 물건들을 구매했다는 것은…… 역시 나와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지금으로선 제일 타당하다.’

워낙에 철저한 그이니만큼, 그녀가 이 물건을 구매한 것 자체가 실수라는 가능성 역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아무리 로벨리아라고 한들 황후가 성인용품점에 들어가 대량의 성인용품을 구매하는 일의 리스크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실수로 손에 넣은 물건이라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최대한 빨리 없애는 것이 합리적인데 로벨리아는 모든 물건을 창고에 보관해두고 있었다.

16549678225164.jpg‘지략이 뛰어난 그녀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진 않을 터. 그렇다면 역시, 그녀가 이 물건을 구매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16549678225164.jpg‘그녀가 나와의 밤을 원하고 있다는 결론인가?’

물론 이것도 속 시원한 해답은 아니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더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매일 이혼을 주창하며 더 이상 그와의 만남을 갖는 것조차 거부하는 그녀가 대체 왜 자신과의 밤을 바라겠는가, 라는 의문. 하지만 그 의문조차 대답할 말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껏 그와의 밤을 원하는 여성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가진 부와 권력 때문이 아닌, 순수하게 그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 그 자체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뒷방으로 밀려나 황궁에서 존재조차 잊힌 17번째 황비의 자식이었던 시절부터 그의 애정과 육체를 갈구하던 여인들을 숱하게도 보아왔으니까. 심지어 그녀들의 출신과 지위도 다양했다. 귀족 영애,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부녀,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 몇 년간 그를 뒤쫓아 다니며 애정을 요구하다가 멋대로 상처받아 이별을 선언하더니 단 하룻밤의 정사라도 좋다며 다시 매달리던 여자까지. 그러니 어쩌면 로벨리아 역시 이혼을 원하면서도 하룻밤 정돈 그와 침대에서 뒹굴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재수 없게 들리긴 하겠지만 그가 지닌 매력은 그만큼이나 악마적이었으므로.

16549678225164.jpg‘보통의 경우라면 이 가능성을 확신했겠지만……. 그녀는 결코 「보통의 경우」 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역시 아무리 고민해도 뚜렷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반적인 인간에게 있어 정욕은 상당히 강력한 동기였다. 그러니 그가 그녀의 의도와 욕망을 읽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나 비정형적인 인간인 탓에 생각만으로 그녀의 의도를 완전히 읽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읽던 두꺼운 서류와 정보원이 제출한 증거품은 미련 없이 전부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그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6549678225164.jpg‘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탄탄한 어깨 위에 겉옷을 걸치며, 그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당겼다.

16549678225164.jpg‘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거지.’

그대로 그는 황비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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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78225164.jpg‘만에 하나, 그녀가 나와의 밤을 원하고 있다고 하면…….’

적막한 어둠이 깔린 복도를 걸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16549678225164.jpg‘그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에 따르면, 그는 숙원을 이루기 전까지는 어떤 여자라도 안아서는 안 됐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들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는 지난 3년의 결혼생활 동안 로벨리아와 한 번도 잠자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상황을 저울질했다. 로벨리아를 자신의 협력자로서 끌어들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그녀의 가치와, 오랜 계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신이 잃을 기회비용. 이 자리에 올라올 때까지 수도 없이 저울질을 해왔으나 그건 언제나 지극히 냉정한 계산과 이성적 판단하에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이성이 아닌 감정이 저울의 두 팔 중 한쪽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16549678225164.jpg‘이건 대체 뭐지?’

로벨리아가 자신과의 밤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메마르고 목이 탔다. 얼마 전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침실에 찾아갔던 날.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협력자가 될 것을 제안했던 그날 밤. 난생처음으로 느꼈던 어떠한 충동에 알렉산드로스는 혼란스러웠다. 맞부딪친 시선 속,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인 긴장감의 씨실과 날실 사이에서 그는 눈앞의 여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끌림’을 느꼈다. 붉게 물결치는 탐스러운 머릿결, 그 틈에서 드러난 희고 가는 목과 화장 없이도 붉게 혈색이 도는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결코 굴하지 않는 눈을 마주한 순간. 그의 몸은 강하게 그녀의 몸을 바라게 되었다. 그래, 그때 분명 그는 순간적으로나마 이성의 고삐를 놓기까지 했다. 물론 그러자마자 로벨리아에게 베개로 두들겨 맞고 쫓겨났지만.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알렉산드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이곳에 한순간 닿았던 그녀의 입술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한순간이 아니라 충분히,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마음껏 취할 수 있다면. 핥고 깨물고 빨아들여 마치 제 것인 양 취하고, 자신의 입술과 처음부터 하나였던 듯이 결합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본래의 계획 따윈 생각조차 나지 않고, 세상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감을 손에 쥘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격히 싸늘해지는 늦가을의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는 그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몸에 열기가 오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신체 반응이었다.

16549678225164.jpg‘이상한 일이군.’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했다.

16549678225164.jpg‘계획에 없었던 이런 반응 따위 방해로 느껴져야 마땅한데……. 어쩐지 싫지 않단 말이지.’

그때 알렉산드로스의 눈에 반가운 것이 들어왔다. 바로 로벨리아의 침실이었다. 그저 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표면적인 미소를 짓는 일은 능숙했지만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문으로 다가가는 짧은 순간 동안 그는 로벨리아에게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고민했다.

16549678225164.jpg‘아무리 직접 물어보러 왔다고 해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단호하지만 섬세한 면이 있는 그녀이니, 부드럽게 접근해서…….’

그런데 그때 그의 귀에 예상치 못한 음성이 내리박혔다.

16549678251724.jpg“아이, 이런 건 정말 곤란해요.”

그것은 로벨리아의 목소리도,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시녀들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틀림없었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높고 부드러운 음색이었으나…… 이건 그 남자 노예의 목소리였다.

16549678251724.jpg“저에게는 너무 과분해요. 저는 그저 폐하의 노예일 뿐인걸요. 그저 곁에서 폐하를 모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읍한데, 이런 분수에 맞지 않게 비싼 옷은 좀…….”

16549678251732.jpg“정말 받지 않을 거니? 오직 너만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의상인데. 네가 입지 않는다면 입을 사람이 없단다.”

단지 몇 초 들은 것만으로도 알렉산드로스는 상황과 분위기를 전부 파악했다. 처음의 놀라움은 점차 뜨겁고 비이성적인 감정으로 바뀌었다.

16549678225164.jpg‘이 밤중에 침실에서 둘이 이렇게 다정한 대화를 나눈단 말인가?’

로벨리아의 침실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뱃속에서 영문 모를 열기를 끓어오르게 했다. 심지어 자신의 옷 선물은 받지도 않던 로벨리아가 노예에게 옷 선물을 주기까지 하다니! 저 분에 넘치게 운 좋은 노예는 그 일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16549678225164.jpg‘잠자코 봐주었더니 그야말로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16549678251732.jpg“어맛!”

16549678251724.jpg“으앗!”

문을 열자, 바닥에 늘여져 있는 알록달록한 옷들과 노예의 몸에 옷을 이리저리 대보는 로벨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는 정말로 로벨리아와 노예 단 둘뿐이었다. 하다못해 지켜보는 시녀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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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가 막히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16549678225164.jpg“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방해해서 미안하게 되었군. 하지만 이 광경을 보니 궁금한 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데……. 세상에 어떤 호위기사가 황후와 밤중에 침실에서 독대를 한단 말인가?”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얼굴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음산한 그늘이 졌다. 그것은 그저 그의 큰 키가 조명의 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예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16549678251724.jpg“저, 정말 송구합니다. 하지만 로벨리아 황후 폐하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십니다. 폐하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제게 새 옷을 전해주려 부르셨을 뿐입니다. 만일 벌을 주시겠다면 부디 분수를 알지 못하고 경거망동했던 저에게만 벌을 내려주세요.”

16549678251732.jpg“케일럽, 사과할 필요가 없단다. 자리에서 일어나렴.”

로벨리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는 노예를 등 뒤에 숨기더니 알렉산드로스를 올곧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기사들조차 찔끔하게 만드는 그의 위압감도 그녀에게만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16549678251732.jpg“저에게 충정을 바치는 수하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 설마, 이런 어린아이도 남자라고 외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케일럽은 아이에 불과하고 저는 이 아이를 그릇된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16549678225164.jpg“……아무렴, 그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잘 알지.”

알렉산드로스는 무겁게 침잠한 눈빛을 그녀의 어깨너머로 옮겼다.

16549678225164.jpg“하나 다른 자 또한 제 분수를 똑바로 알고 있는가,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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