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왜 노예와 입을 맞추려 했지?2021.03.25.
“아이구구구. 내 팔이야.”
채찍질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로 볼 때는 그냥 짝! 짝!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왜 이렇게 팔이 아픈 거야?”
“팔근육을 갑자기 쓰셔서 그럴 겁니다. 평소 활동량이 많은 편이 아니시니까요.”
기사의 팩트 폭력에 뼈가 다 저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기사들은 완전히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그야 황후가 그레이마켓에 직접 행차하지를 않나, 수상쩍은 물건들을 마구 사들이지를 않나, 이제는 노예 30명을 한꺼번에 충동구매하고 합법적 사업을 하는 상인한테 채찍질까지 했으니…….’
물론 전부 내 이미지를 망치려고 일부러 한 것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이혼을 당할 수 있겠지? 정말 기대된다.’
나의 미친 짓들은 분명 내일부터 신문에 대서특필 될 것이다. 보수적인 귀족들은 나의 행각에 경악할 것이 분명했다. 거리에는 방방곡곡 나를 비난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고 황궁에는 투서가 날아들며 국정 회의에는 나를 폐하라는 안건이 올라오겠지. 알렉산드로스가 무슨 생각이든 간에, 그렇게 되면 아무리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이라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기대감에 가슴이 다 벅찼다.
“드디어 난 자유야!”
“저…….”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와 나의 상념을 깼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이리도 보잘것없고 하찮은 저를 폐하 같은 귀인께서 도와주시다니…….”
방금 내가 사들인 노예 소년이었다.
“저는 너무 보잘것없고, 보시다시피 몸도 성치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위해서라면 이런 쓸모없는 몸이라도 바치겠습니다. 평생을 바치더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나는 멋쩍어져서 말했다. 사실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끼어든 것뿐이었으니까.
“아까 맞은 데는 좀 괜찮니? 지금 당장이라도 치료를 받아야겠구나.”
“괘, 괜찮습니다. 정말로…….”
“어디 좀 보자.”
나는 소년의 다친 곳을 살펴보았다. 황후인 내가 노예인 자신의 상처까지 걱정해주어서 부끄러웠는지 소년의 얼굴은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괜찮기는, 다친 곳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파상풍에 걸릴 수 있어. 콘라드 경, 가장 가까운 곳의 의원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그, 그런……. 저, 저 같은 것을 위해서…… 폐하께서 직접…….”
소년은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이런,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정하면 안 됐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앞에서 이런 어린애가 채찍에 맞는 걸 봐버렸는데!
‘지금은 콘셉트 유지를 잠깐 쉬는 거로.’
우리는 콘라드 경이 의사를 데려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나도 지치고 피로했던 참이었으니까.
“너 이름이 뭐니?”
“케일럽입니다, 폐하. 성은 없습니다.”
“케일럽?”
기분 탓일까? 어쩐지 이름이 익숙했다.
‘내가 이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케일럽, 케일럽…….’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던 내 머릿속에…… 번뜩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노예 소년을 돌아보았다.
“너, 나 좀 봐!”
나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그의 양 뺨을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으앗?! 폐하……!”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케일럽의 얼굴이 다시 한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오래 씻지 못한 듯 꼬질꼬질한 데다가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상당한 미소년이었다. 살짝 곱슬기가 있고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긴 갈색 속눈썹. 미래가 기대되는, 선량하고 청순한 미모.
‘틀림없어. 이 외모에 케일럽이라는 이름.’
나는 경악했다.
‘이 아이는 분명……!’
그렇다. 원작의 서브남주, 케일럽!
케일럽은 원작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인물이다. 부모가 전쟁 포로라서 노예가 되었지만, 다리를 전다는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7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다. 그는 장차 뛰어난 마법 재능으로 큰 공을 세우고 노예의 신분을 벗을 예정이었다. 청순하고 선량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속은 시커먼 성격으로, 노예의 신분을 벗은 뒤엔 뛰어난 마법 실력과 재간을 이용하여 정보 길드를 세운다. 원작에서 등장할 때는 이미 유명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었는데, 아이샤에게 호감을 가져 그녀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얘가 그 케일럽이라고?!’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입을 벌렸다. 원작의 내용을 기반으로 역산해보면 지금 케일럽의 나이는 16살은 됐을 텐데 지금의 모습은 한 15살 정도로밖에 안 보일 정도로 작고 어려 보였다.
‘어릴 때부터 노예였으니까 영양부족으로 덜 컸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성격도 원작보다 훨씬 소심한 것 같은데…….’
원작에서도 자기 필요할 때는 착한 척, 불쌍한 척을 잘하긴 했다. 그래도 나름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라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역시 아직 어려서 그런 거겠지?’
하긴, 생각해보면 그가 그 케일럽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1년 뒤 독립시켜준 다음엔 더 이상 만날 일도 없을 텐데.
“폐, 폐하…….”
케일럽은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도 저항하거나 놔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당혹스러운 듯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그제야 난 내가 꽤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 놔줄…….”
그때였다.
“지금 뭣들 하는 거지?”
최근 부쩍 낯익어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깜짝 놀라 케일럽의 뺨을 놓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역시 화들짝 놀라며 경례 자세를 취했다.
“폐하!”
내 말에 케일럽 역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분이 바로?”
부리나케 일어나는 케일럽을 보며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시지요?”
여유를 가장하며 그렇게 물어보았으나,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황후가 라만차의 거리에 왔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거겠지.’
그 근거로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여유만만하게 웃던 그가 지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특유의 강렬한 빛이 번쩍이는 눈을 부릅뜬 채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화가 난 듯한 그를 향해 일부러 싱긋 웃었다.
“제가 있어선 안 될 곳에 왔으니 야단치러 오신 건가요?”
“…….”
“저를 끌고 가실 건가요? 이곳의 볼일은 다 보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그럴 바엔 차라리 저를 궁에서 내쫓으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약 올리듯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느샌가 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내 뒤에 서 있는 케일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추레한 녀석은 뭐지?”
“케일럽입니다, 폐하. 제가 이번에 사들인 노예죠.”
“……노예?”
“네.”
나는 일부러 ‘사들인’에 강세를 뒀다. 봐라, 나는 심지어 노예까지 샀다! 이 얼마나 정신 나간 황후니? 라는 뜻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케일럽을 빤히 보았다. 케일럽은 무서운 듯 내 뒤에 숨어 눈치를 보았다.
“그대는 왜 저 녀석과 입을 맞추려 했지?”
“이, 입이요?”
나는 기가 막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저는 그저 케일럽의 상처를 살펴봤을 뿐이에요!”
사실 상처가 아니라 얼굴을 본 거긴 한데,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케일럽의 얼굴에도 이리저리 다친 상처가 있었으니까.
“……상처를 살펴봤다고?”
“네! 아니, 오해를 해도 정도껏이지. 케일럽은 어린애라고요! 제가 요런 꼬맹이랑 키스할 정도로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악녀라고 욕먹고 싶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미성년자한테 흑심 품는 파렴치한으로 보이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의 낌새가 이상했다. 그는 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숨기는데 능했지만, 이번만큼은…….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런 반응이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그가 그러는 이유가 감이 잡혔다.
‘하긴 아무리 철면피라 해도 황후가 아동성애자인 건 좀 그렇겠지.’
알렉산드로스와 만나자마자 옥신각신하는 통에 나는 등 뒤에 있던 케일럽이 조금 시무룩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를 보았다.
“별일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
별일이 없다고? 내가 이곳에 온 것과 노예까지 사들인 것만 해도 충분히 별일일 텐데?
“제가 라만차의 거리에 온 것에 대해서는 화내지 않으시네요?”
“내가 왜 그런 거로 그대에게 화를 내겠나.”
“저는 그것 때문에 저를 잡으러 오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알렉산드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로벨리아. 내가 그대가 이곳에 왔다는 이유로 화를 낼 리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이니 더더욱.”
대놓고 수상쩍은 발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 의심스러워하는 반응에 알렉산드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갑자기 나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그야……. 이곳, 라만차의 거리의 주인은 바로 나거든.”
“네?!”
내가 깜짝 놀라자, 알렉산드로스는 주변을 향해 잠시 시선을 주었다.
“듣는 귀를 좀 물리지. 비서관 외 몇 명을 제외하면 기밀인 사항이라.”
기사들과 케일럽이 눈치껏 물러난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의 소유주가 된 것은 즉위 직후야. 개인 비자금으로 이 거리 전체를 사들였지.”
“네? 하지만 이런 곳을 무엇 때문에요?”
“이곳 라만차의 거리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지. 그런 곳일수록 감시하에 두는 것이 안전하기 마련이야.”
그에 말에 나는 팔에 소름이 좍 돋았다. 세상에, 그런 이유로 거리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다니! 나는 전생 때 거리는커녕 집 하나도 못 샀는데! 기가 질릴 정도의 재력에 먼저 놀라야 하는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레이마켓을 자기 수중에 두어 관리한다는 모략에 먼저 놀라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비서관을 비롯한 극소수뿐이야.”
“그런 것을 저에게 왜 알려주시는 거죠?”
“질문이 잘못된 것 같군. ‘그대이니까’ 알려주는 거야.”
알렉산드로스는 능글맞게 눈꼬리를 접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차, 곧 이혼할 사이에 이런 기밀을 들어 버리다니!’
곧 이혼할 사람에게 극비사항을 알려주는 바보는 세상에 없다. 즉 이것은 절대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고, 이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기밀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그와 깊게 엮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하여간에 지독히도 계획적이라니까.’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인 줄 알았으면 듣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대는 듣고 말았지. 나는 그대가 남의 비밀은 지켜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아닌데요? 제가 폐하의 비밀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어쩌실 건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감은 없었다. 내가 소문을 퍼뜨려봤자 물증이 없는 이상 먹힐지 확신이 안 서기도 하고. 그런 내 마음속을 읽은 것인지 그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어쩐지 알렉산드로스에게 한 방 먹은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찝찝했다. *** 콘라드 경이 의원을 데리고 돌아왔고, 로벨리아는 의원과 함께 케일럽의 상처를 살폈다.
“아프지는 않니?”
“저, 전 정말 괜찮습니다, 폐하.”
“약과 약초를 드리겠습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약초로 매일 밤 환부를 찜질하시고…….”
‘로벨리아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군.’
로벨리아는 어린 노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 영문 모를 불쾌감이 스멀스멀 뱃속에 부대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미간을 꾹 눌러 깊게 새겨진 주름을 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로벨리아와 노예 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