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충동구매한 노예들2021.03.21.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라하만 반도에서 공수해온 품질 좋은 노예들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노예라고?”
나는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사회자의 말대로, 무대 위로 삼십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그들은 모두 서로 이어진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성별과 연령대, 머리색과 피부색이 다양했다.
“이번 노예들은 경매 역사상 역대급의 품질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전쟁 포로로 제국 노예 법에 따라 백 퍼센트 합법적인 노예라는 사실! 저희 라만차에서는 합법적이고 공정한 거래를 지향합니다.”
“노예 거래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도 귀족들 사이에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외국인 포로는 불결하고 믿을 수 없다는 인식도 있고, 임금이 아까운 평민 부르주아들이나 선호한다고 생각하죠.”
내 호위 기사들 중 한 명이 부연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래 봬도 나는 이곳에 온 뒤 법전과 제국 사회에 대한 책을 잔뜩 읽어두었으니까.
‘반인륜적이라든가 인권 침해적이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귀족들 답네.’
나는 무대 위의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경매를 위해 깨끗하게 씻기고 좋은 옷을 입혀놓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묻어나는 슬픔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의 주요인물 중에서도 노예 출신이었던 인물이 있었지.’
“먼저 첫 번째 상품입니다! 18살의 귀여운 바냐입니다. 자수와 바느질을 무척 잘하며, 미모 역시 뛰어나지요.”
피부색이 갈색이고 검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가 앞으로 끌려 나왔다. 여자아이는 무척 겁에 질리고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사회자는 여자아이의 양 갈래 머리 중 한쪽을 희롱하듯 흔들었다. 사회자의 희롱하는 듯한 손짓이 기분 나빴는지 여자아이는 몸을 움찔 떨며 어깨를 웅크렸다. 하지만 사회자는 오히려 껄껄 웃으며 그녀의 등을 찰싹 내리칠 뿐이었다.
“정말 사랑스럽죠? 자, 시작가는 5만! 5만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기분 나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를 깍 악물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기분 나빴다. 전부 다! 허가를 받았는지 불확실한 마도구나 도박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제국 법상 합법이고 자시고 내가 알게 뭐람? 어차피 곧 황후가 아니게 될 건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 경매에 깽판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경매의 열기는 달아오르고 있었다.
“5.5만!”
“7만!”
“네, 7만! 7만 나왔습니다. 8만은 없으신가요?”
“8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금액에 사회자의 입이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멈춰라! 황후의 명령이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끄러웠던 경매장이 찬물이라도 들이부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놀란 듯한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설마 황후가 그레이마켓, 그것도 노예 경매에 참석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당황하던 사람들이 주저하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가는 길마다 홍해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졌으며, 사람들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황후를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 나는 호위병들을 이끌고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몇 명의 스태프들이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나와 기사들의 강렬한 눈빛을 받고는 찔끔하며 물러났다. 나는 사회자의 목소리 확대 마도구를 빼앗아 들고는 소리쳤다.
“카스티야의 황후, 로벨리아가 명한다. 오늘의 경매는 이걸로 끝이다. 모두 해산하도록 해라.”
“예?! 하, 하지만 황후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그리하면 저희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장사는 고객들에 대한 신뢰가 생명인…… 아니 그게…….”
사회자가 항변하려고 하자,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쏘아보았다. 사회자는 내 눈빛을 받은 것만으로도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아마 스모키 화장이 엄청나게 잘 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기사가 건네주는 펜으로 수표 중 한 장에 날림으로 서명을 하곤 그것을 사회자에게 던졌다.
“백지수표다.”
“예, 옙?!”
“그 수표에 숫자를 기입하는 순간, 여기 있는 노예 전원의 소유권은 나에게 양도된다. 이걸로 불만은 없겠지?”
내 말에 순간 멍해졌던 사회자의 표정이…… 다림질이라도 한 듯 활짝 펴졌다.
“무,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마치 폴더폰처럼 몇 번이고 허리를 접었다. 사람의 몸이 저렇게까지 접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살다 살다 백지수표를 다 써보고,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해.’
백지수표라니, 완전히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생의 삶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사치였다. 사회자는 신이 나서 떠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명령 때문에 관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노예들을 보았다. 서른 명의 노예들은 족쇄에 묶여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노예들의 얼굴을 요목조목 훑어보았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그냥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건 그냥 굶어 죽으라는 것밖에 안 돼. 더군다나 노예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킨다면 인신매매단에 잡혀가서 다시 노예가 될 수도 있고.’
결국 나는 결정을 내렸다.
“들어라. 나는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너희들을 구매했으니, 너희들의 정당한 주인이다. 앞으로 나를 주인으로서 섬겨야 할 거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했는지 노예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황비궁에서 일하며 나의 하인, 하녀로 일하게 될 것이다.”
“……!”
나의 말에 노예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눈을 휘둥그레 뜨거나, 입을 떡 벌리거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놀란 것은 노예들뿐만이 아니었다.
“폐, 폐하! 감히 간언 드립니다. 황궁에서도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곳은 아주 중요한 장소이기에 이교도 노예들이 드나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황궁에서 일을 한다니요!”
“맞습니다. 일반 제국민 중에서도 특별히 신분이 고귀한 이들만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까? 이건 노예들에게는 과분한 처사입니다!”
기사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루 3시간씩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제국어, 제국 사회, 제국법과 기초적인 학문을 말이지.”
“노, 노예에게 교육이라니요!”
“황후 폐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나는 기사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돌렸다. 아까 많은 사람들을 찔끔하게 만든 그 시선 말이다.
“시끄럽다. 책임은 내가 진다. 경들은 입 다물고 있도록.”
“……!”
그제야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전부 성인이니 한 1년 정도만 가르치면 독립하기에 무리가 없겠지. 그때 각자 홀로서기를 할 자금을 주고 풀어주어야겠다.’
그런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내어놓지 않았다. 기사들이 더욱 반발할 게 뻔한 데다가 악녀 콘셉트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저 황궁에서 하인, 하녀로 일하게 해준다고 한 게 다인데도 노예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벨리아 황후 폐하께 신의 가호 있기를!”
“황후 폐하 만세! 만세!”
몇 명은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고, 몇 명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뻐했다.
‘그, 그 정도로 좋아할 일인가?’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노예들은 아주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니 굉장히 무서웠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뭔가 뿌듯하기도 했다. 스태프들이 노예의 족쇄를 풀어주고, 우리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들을 궁으로 데려가 황궁 일을 교육하도록.”
“예.”
기사 한 명이 노예들을 이끌고 궁으로 먼저 돌아갔다.
‘아직 더 볼 게 있으려나? 아니면 이만해도 충분히 대형 사고를 친 거니까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철수하려고 하는 경매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 중 유난히 낡은 옷을 입고 꾀죄죄한 소년이 있었다.
“빨리빨리 옮기지 못해! 이 게으른 것. 마물의 먹이로 줘버린다!”
“으윽! 죄, 죄송합니다…….”
스태프 중 특별히 몸집이 큰 사람이 그 소년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짐을 옮길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한쪽 다리까지 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 잠깐! 그 소년은 노예인가? 노예는 내가 전부 사들였는데 어째서 한 명을 남겨뒀지?”
내가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노예인 건 맞지만 이 아이는 경매장 소유라 판매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한쪽 다리를 절어서 상품성이 없거든요.”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런 어린애를 학대하다니……. 덩치만 봐도 차라리 자기가 짐을 옮기는 것이 빠를 텐데!’
“그럼 그 아이도 내가 사 가도록 하지. 여기 이 수표를 받도록.”
“예?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찌 이렇게 비싼 값을…….”
“그리고 너.”
나는 채찍질을 하던 남자를 보았다. 내 살벌한 눈빛에 남자는 덩치가 무색하게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예…… 예?”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사람을, 그것도 어린애를 채찍으로 때리면 안 되지. 아무래도 채찍이 얼마나 위험한 흉기인 줄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손에서 채찍을 뺏어 들었다.
“내가 직접 그 위험성을 실감하게 해주지.”
멍하던 남자의 얼굴이, 내 말뜻을 이해하고 천천히 창백하게 질려 일그러졌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씨익 웃었다. 짜악! 채찍을 돌바닥에 한 번 내리치고는, 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뒤돌아서! 황후의 명령이다.”
***
“황후가 라만차의 거리에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비서관의 대답에 알렉산드로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위험한 곳에 간단 말인가.’
알렉산드로스의 손가락이 신경질적인 리듬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것은 그가 불쾌함을 느낄 때의 버릇이었다. 로버트는 알렉산드로스가 불쾌한 이유를 잘못 해석하고 말했다.
“역시 큰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라만차의 거리에 가시다니, 틀림없이 황실의 명예가 훼손될…….”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알렉산드로스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로버트의 말허리를 잘랐다.
“예? 그, 그럼……?”
로버트는 그 이유가 아니라면 알렉산드로스가 어째서 화가 난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군.”
“예?”
알렉산드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두었던 겉옷을 입었다. 로버트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직접 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업무가 바쁘지 않으십니까? 황후 폐하를 모시고 오는 것은 따로 사람을 보내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내가 가겠다.”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로스는 어느샌가 집무실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수행원은 필요 없다, 비서관. 자네도 따라오지 말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무실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