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제 폐하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2021.03.18.
아이샤는 로벨리아가 정말로 ‘이세계의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내가 알기로 역사상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이세계에서 넘어온 성녀는 여러 번 존재했지만 그때마다 성국이 반드시 신탁을 내렸지. 더군다나 늘 이세계에서의 모습 그대로 넘어오고. 기존에 제국에 있던 사람의 정신이나 기억이 모종의 이유로 이세계의 사람과 뒤바뀐다? 확률이 너무 낮아.’
차라리 로벨리아가 아주 우연히 김치부침개를 만들었다는 게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고 아이샤는 생각했다.
‘내 생각에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로벨리아가 어떠한 이유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배운 거야. 읽었든가 들었든가 해서 우연히 한식 요리법을 알게 되었다, 이쪽이 지금으로서는 더 타당해.’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제껏 역사적으로 두 세계 간의 접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성녀.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차원 이동자들은 성녀로서 새로운 문물을 설파하여 이쪽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다. 성녀가 전해준 새로운 문물은 널리 공표되고 많은 책에 기록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로벨리아만 알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거지.’
로벨리아가 대체 어떤 경로로 남들은 모르는 이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나, 그것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샤는 신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게 어떤 이유건 간에…….’
그녀의 희고 가는 손가락 사이에서 두 눈이 번득였다.
‘방해돼.’
성녀인 자신이 이곳에서 가지고 있는 이점은 그것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이세계에 대한 정보. 그것만이 이 낯선 나라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로벨리아가?’
아이샤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가까스로 손에 넣은 사회적 입지는 연이은 실수로 불안정해지고, 알렉산드로스의 호의조차 불투명해졌으며, 유일한 무기마저 흔들리는 상황.
‘절대로 안 되지. 내가 어떻게 손에 쥔 무기인데.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는 없어.’
아이샤는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아 진정시키려 했지만, 다른 손 역시 떨리고 있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악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로벨리아, 그년은 방해물이야.”
그 여자는 알렉산드로스와의 관계와, 자신의 사회적 입지와, 심지어 ‘목표’마저 방해하고 있었다.
“절대 가만둘 수 없어.”
아직은 분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로벨리아가 대체 이 정보를 어떤 경로로 얻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로 가지고 있는지.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한 번 알아봐야겠어. 그래, 내 당장의 과제는 이거야.’
하지만 만약에…… 그녀가 상상 이상으로 큰 위협이 된다면? 자신이 어떤 짓까지 하게 될지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도 위험부담이 될만한 행동을 하게 될 일은……. 최대한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최근의 연이은 알렉산드로스와의 만남 탓에 나는 더더욱 다급하게 이혼을 갈구하게 되었다.
‘진짜 안 되겠어. 어떤 미친 짓을 해서라도 내 이미지를 최악으로 끌어내려야만 해!’
그렇게 해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그것도 ‘일반적인 황후라면 절대 가서는 안 되는’ 장소에. 나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무수히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저 여자 대체 누구야?”
“이렇게나 많은 호위병들을 데리고 이런 곳에…….”
“쉿! 황후 폐하라고 하신다!”
“뭐라고? 황후 폐하?”
오죽하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황궁에서도 좋지 않은 눈초리를 겪어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본 것은 나로서도 처음인지라 솔직히 쫄렸다.
‘그래도 티를 낼 수는 없지.’
나는 일부러 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목에 쥐가 날 정도로.
‘오늘을 위해서 옷도 완전 쎈 언니 스타일로 입고 왔다고.’
그러던 중 내 시야에 어떤 남자가 보였다. ‘황후가 되어서 미친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곳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완전 찐한 눈화장을 한 덕인지 그는 흠칫하더니 뒷걸음질 쳤다. 나는 씹어뱉듯 내뱉었다.
“뭘 봐? 꺼져.”
이곳은 바로 라만차의 거리. 합법과 위법의 틈새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물건들을 파는 일종의 ‘그레이마켓’이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상품과 서비스들은 절대 위법은 아니다. 만약 이곳이 그런 블랙마켓이었으면 내가 등장하자마자 전부 도망갔겠지. 다만 완전히 떳떳하게 취급하기도 뭐한……. 그러니까 부모님께 저 이거 샀어요! 라고 자랑하기 좀 거시기한 물건들을 다루는 그런 곳이다. 그런 이유로 유명인이 얼굴을 드러내고 드나들기는 창피한 곳인데, 심지어 보수적인 제국에서 숙녀가 당당하게 드나드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황후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욕을 미친 듯이 먹겠지.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난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다고.’
나는 남들 몰래 한숨을 쉬곤, 호위 기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뭣들 하나? 가지.”
“아……. 예, 예.”
기사들 역시 공무 중에 이런 곳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꽤 당황하고 민망한 것 같았다. 참고로 미안해서 시녀들은 안 데려왔다. 그녀들의 명예와 순수한 마음에 큰 타격을 줄 테니까.
‘이런 곳을 당당하게 들락거리고, 심지어 여기서 돈을 펑펑 쓰기까지 하면 분명 황실 품위 훼손으로 맹공격을 받겠지.’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간략하게는 알았지만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몰랐기에 솔직히 좀 궁금했다. 입구 근처에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도박장이었다.
‘저기가 바로 수도 유일의 국내인 대상 도박장, 그랜드 바우어 카지노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신소, 탐정 사무소가 많네. 수상쩍은 마도구를 파는 곳도 많고. 이거 다 허가받은 건가?’
이곳에 온 뒤 다양한 마법 물품들을 봤지만, 이곳에서 취급하는 마도구들은 허가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웠고, 악용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이 이상한 저주 인형처럼 생긴 건 뭐야? 진짜 작동하나?’
내가 가게에 입장했을 때부터 동공을 마구 떨며 안절부절못하던 마도구 상점의 사장은 내가 특정 상품을 오래 들여다보자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배, 백 프로 허가받은 상품입니다, 황후 폐하. 정말입니다. 저희 가게는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고 영업 허가증도 있는 완전히 합법적인…….”
“됐고.”
나는 냉정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이 가게에 있는 거 다 줘.”
“제, 제발 영업 중지만은……! 예, 예?”
사장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여기 있는 거, 다 달라고.”
솔직히 별로 흥미도 없고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가 필요한 건 이 수상쩍은 물건들이 아니라 ‘황후가 라만차의 거리에 방문했으며 심지어 돈도 썼다!’라는 악명이니까.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사장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턱이 아플 정도로 입을 벌리고 나서야, 그는 용수철처럼 튕기듯 허리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포장해서 황궁으로 보내. 아, 이건 지금 가져갈래.”
다른 것들은 그냥 다 창고에 처박아둘 생각이었지만 저주 인형은 조금 마음에 들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짜증 나게 굴면 써야지.’
나는 저주 인형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좋아, 그럼 다음 가게.’
나는 다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당당하게 외쳤다.
“여기 있는 거 다 줘. 일시불로.”
이때 나는 저주 인형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가게 내부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넵! 당장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가게 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저주 인형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인 것은……. 붉은색과 눈이 아플 정도로 자극적인 핫핑크의 실내 장식. 저게 ‘의복’으로서 의미가 있는 건지 의심되는, 손가락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야한 속옷. 미약. 피임약. 사랑의 묘약. 그 외에도 온갖 수상쩍은 용도의 약병들. 살색으로 가득한 그림을 담은 서적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본뜬 것이 분명한 물건들.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나는 입을 벌렸다. 나는 몸을 돌려 기사들을 보았다. 기사들 역시 경악한 것 같았다. 이 가게 안의 풍경 때문인지, 이곳의 물건을 내가 싹 쓸어간다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멍하니 직원들 중 한 명을 보았다. 직원 역시 당황했는지 몇 번 실수를 하더니, 나의 시선을 느끼곤 바짝 굳어버렸다.
“어…… 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이 거리에서 저, 저희 가게만큼 고품질의 용품들을 취급하는 곳은 어, 없으니까요!”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화, 화, 화, 황제 폐하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나는 그냥, 세상에서 콱 사라지고 싶었다. *** 당당하게 거리에 들어섰던 것과 달리 나는 모든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망했어……. 성인용품을 가게째로 구매한 황후라니…… 진짜 망했어…….’
그것만으로도 죽을 만큼 수치스러운데, 심지어!
‘다들 내가 알렉산드로스와 쓰려고 산 건 줄 알 거 아니야!’
가게 직원들도, 궁인들도, 내 시녀들도, 전부 다!
‘아, 그냥 죽을래!’
멍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는 나에게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물었다.
“화, 황후 폐하. 음료를 드시겠습니까?”
“많이 피곤하십니까?”
“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상사가 넋을 놓은 부랑자가 되었으니 곤란한 것도 이해하지만……. 나는 그들을 신경 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됐어. 난 잠깐 쉴래.”
나는 손을 휘휘 내젓고는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일단 밤바람을 쐬면서 얼굴이라도 좀 식히고 싶었다. 그때였다.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경매장?’
광장 중앙에 무대가 서 있었다. 거리는 멀었지만 구름떼같은 군중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저주 인형과 성인용품만 사갈 수는 없지.’
잠시 집 나갔던 호기심과 의욕이 되돌아왔다.
‘진짜 당장이라도 이혼당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건이 있을 수도 있어.’
그래, 보통 가장 대단하고 값비싼 물건들은 경매에 나오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운을 차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매장의 ‘상품’은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